핵소고지 vs 사일런스

백승찬 기자
[영화 리뷰]핵소고지 vs 사일런스

세상이 받아들이지 않는 신념을 가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 신념을 지켜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념’에 대한 영화가 잇달아 선을 보인다. 최고의 스타 배우였으며 감독으로도 명성을 높인 멜 깁슨(61)의 <핵소 고지>(22일 개봉)와 현대 미국 영화를 대표하는 명장 마틴 스콜세지(75)의 <사일런스>(28일 개봉)다. 둘 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앤드루 가필드(34)가 주연이다. 하지만 영화의 색채와 결론은 상이하다.

■<핵소 고지> - 앞뒤 재지 않고…직진하는 신념

데스몬드 도스(가필드)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비폭력을 고수하는 청년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도스는 의무병으로 복무하기 위해 자원 입대한다. 하지만 상사들은 훈련소에서부터 집총을 거부하는 도스를 갖은 수로 쫓아내려 한다. 결국 도스는 군사재판에 회부된 끝에 사격 훈련을 받지 않고 참전할 기회를 얻는다. 도스는 승리의 교두보가 될 일본 오키나와 핵소 고지 전투에 투입된다.

도스는 아이같은 청년이다. 첫눈에 반한 여성에게 앞뒤 재지 않고 다가선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와 강고한 종교적 신념이 겹쳐 폭력을 일절 거부한다. 군대처럼 획일적인 사고와 행동을 강요하는 조직에서 이런 신념을 가진 이는 골칫거리다.

하지만 이런 신념이 극한 상황에선 가장 필요한 행동의 동력이 됐다. 핵소 고지에서 적이 반격해오자 동료들은 모두 퇴각하지만, 도스는 혼자 남아 부상당한 동료들을 수습한다. 그렇게 살린 전우가 75명이었다.

감독으로서의 멜 깁슨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 매혹돼왔다. 스코틀랜드의 독립운동가를 그린 <브레이브 하트>(1995), 예수가 재판받고 죽어간 마지막 시간들을 그린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가 그랬다. <핵소 고지> 역시 전반부에 도스의 순수한 신념이 형성되는 과정과 후반부 해부실습을 하듯 끔찍한 전장의 풍경이 어울리며 수작을 만들었다. 하지만 멜 깁슨의 신념에는 그늘이 있다. <핵소 고지>의 일본군 묘사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수준이다. 미군 도스는 성자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일본군은 쥐 혹은 죽음을 즐기는 변태 정도로 그려진다. 멜 깁슨은 술에 취한 채 반유대적인 욕설을 하는 등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고, <아포칼립토>(2007) 이후 10년이 지나서야 연출 복귀를 할 수 있었다.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핵소 고지>를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6개 부문 후보로 지명해, 멜 깁슨을 ‘사면’했다.

■<사일런스> - 형식보다는 실질…우회하는 신념

17세기 포르투갈. 가톨릭 예수회 소속 로드리게스(가필드)와 가루페(아담 드라이버) 신부는 스승인 페레이라 신부(리암 니슨)가 선교지인 일본에서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두 젊은 신부는 스승을 찾아 일본으로 향한다.

[영화 리뷰]핵소고지 vs 사일런스

<사일런스>의 원작인 엔도 슈사쿠의 장편 <침묵>은 일본에서 선교 도중 배교한 뒤 불교학자가 된 크리스토바오 페레이라 신부의 실화에 기반했다. 제목은 극심한 인간의 고통에 대한 신의 무반응을 뜻한다. 영화는 에도 막부의 관료들이 사제와 신도를 색출해 개종시키기 위해 벌이는 각종 고문과 회유책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신도들은 밀물이 들어오는 해변에 묶인 채 조금씩 죽어가거나, 목에 작은 상처가 난 채 거꾸로 매달려 조금씩 피를 흘려 며칠에 걸쳐 죽었다.

이 모든 고통 속에서도 신은 끝내 침묵한다. 도탄에 빠진 신도들은 천국에 대한 열망 때문에 고통을 견디고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런 신도를 바라보는 사제들의 믿음은 뿌리부터 흔들린다. 당시 일본의 정신적 풍경은 ‘늪’으로 표현된다. 신앙의 씨앗이 뿌려졌지만, 싹은 틀 길이 없다. 사제들은 복음을 전한다는 자부심으로 행동하지만, 선교는 오히려 신도들을 죽음으로 안내한다. 어쩌면 사제들은 ‘재앙을 몰고 온 외부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결한 신념을 지킨다는 것이 타당한가.

이탈리아계 이민자의 아들인 마틴 스콜세지는 평생 폭력과 성스러움이라는 주제에 천착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원작에 바탕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은 스콜세지 종교관의 중간 결산 같은 영화였다.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와 결혼하고 평범한 삶을 산 예수를 상상한 데 대해 보수 교단은 격렬히 반발했다.

<사일런스>는 다르다. 페레이라 신부와 로드리게스 신부는 외형적으론 ‘배교자’이지만, 그들의 신앙은 성화나 묵주, 심지어 사제직과 같은 ‘형식’이 아니라 기층의 신도들을 위한 ‘실질’로 향했다. <사일런스>는 70대에 접어든 스콜세지의 ‘병자성사’였을까.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29년 전 ‘신성모독’ 혐의를 받은 이 노감독을 바티칸으로 초청해 환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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