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와 사랑을 지닌 진짜 마녀가 되고 싶어”

글 김희연·사진 김기남 기자

뮤지컬 ‘위키드’ 초록색 마녀 엘파바 역 배우 박혜나

‘뭔가가 달라졌어 내 안의 무언가. 이젠 의미 없어, 남들이 정한 규칙들. 난 깨어나버렸어. 돌아가긴 늦었어, 내 직감을 따를래. 눈을 꼭 감고 날아올라 중력을 벗어나 하늘 높이 날개를 펼 거야. 날 막을 순 없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삶에 맞서기로 결심한 초록마녀 엘파바가 무대 위로 치솟으며 부르는 넘버 ‘중력을 벗어나(Defying Gravity)’. 초록색 피부로 태어나 아웃사이더, B급 인생으로 취급받던 그가 혼신을 다해 부르는 노래에 관객들은 숨죽였다가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다. 뮤지컬 <위키드> 1막의 절정. 가슴이 뭉클하고 통쾌하다. 땅에 발 붙인 보통 사람들의 대리만족 때문일까.

브로드웨이에서 10년간 정상에 올라 있는 뮤지컬 <위키드>의 한국 라이선스 공연에서 엘파바 역을 거머쥔 배우 박혜나(31). 그는 초록마녀와 닮은꼴이다. 중력을 벗어나 날아오르듯 <위키드>를 통해 배우 인생의 전환기를 맞고 있다. 대형 뮤지컬에서 여배우 주연작이 흔치 않은 때에 블록버스터 뮤지컬의 주연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2006년 뮤지컬 <미스터 마우스>로 데뷔한 후 8년간 무대에 섰지만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배우는 아니었다.

“용기와 사랑을 지닌 진짜 마녀가 되고 싶어”

▲ 2006년 데뷔했지만 ‘무명’
군무 역할로 오디션 참가
마법 걸린 듯 주인공 차지

지난 9월 초록마녀 엘파바 역으로 옥주현과 함께 더블캐스팅이 발표 됐을 때 “박혜나가 누구지?”부터 “이제서야 빛을 보는군” 등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다.박혜나 역시 올 초 시작된 오디션을 마칠 때까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군무 역할인 앙상블로 오디션을 시작했어요. 1차, 2차, 3차를 거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주연 커버 역할로 얘기가 되어갔죠. 4차, 5차를 밟으면서 연출가가 요구하는 게 많아지더군요.”

직접 오디션에 나선 브로드웨이 협력연출가 리사 리구일이 박혜나를 바라보는 눈빛과 귀는 오디션이 거듭될수록 더욱 예리해졌다. 마지막 오디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연출이 한번 더 보고 싶어한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두근거리며 달려갔더니 연출은 엉뚱하게도 춤을 춰보라고 했다. “속으로 ‘틀렸구나, 다른 오디션 알아봐야겠다’ 했죠.” 그리고 한 달 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연출가는 그를 두고 “엘파바로 이끌고 싶은 욕심이 났던 배우다. 순발력 있게 적용하며 관객에게 다가가 교감한다”고 평했다.

연출가는 독한 디렉션(연출지시)과 연습 요구로 배우들의 혼을 빼놓는 것으로 유명하다. 박혜나 역시 하루하루 발끝에 남아있는 기까지 쏟아내야 12시간 연습이 끝났지만 행복했다. 지난달 23일 긴장과 흥분으로 범벅된 첫 공연을 잊을 수 없다.

“3주간 무대 리허설을 했지만 역시 관객이 꽉 들어찬 실제 첫 무대에서는 정신이 없었어요. 공연 내내 관객 반응이 썰렁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커튼콜에서 전원이 기립 박수를 보내주시는 거예요. 제 팬들이라고 해봐야 앞 두세 줄도 안됐을 텐데…. 칭찬도 받고 욕도 먹으면서 저만의 초록마녀를 만들어갈 용기를 얻고 있어요.”

공무원인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세 자매 중 막내인 박혜나는 집에서는 별난 축에 낀다. 식구 중 노래와 춤에 끼가 있거나 흥미 있는 사람이 없다. 혼자 어려서부터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했고, 중·고등학교 시절 노래 잘한다고 칭찬받은 정도였다.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국민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뮤지컬 데뷔 후 크고 작은 어려움이 많았지만 주위에서는 진작부터 ‘대기만성형’이라고 점찍은 이들이 많았다.

“한번은 유명 뮤지컬에 오디션을 거쳐 비중 있는 역할로 캐스팅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계약서 사인 직전에 TV를 통해 얼굴이 알려진 여배우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죠. 당시 충격을 받긴 했지만 크게 실망하거나 영향받지는 않았어요. 실력이 모자라 그랬다면 스스로 부끄럽고 창피했겠지만 다른 이유로 밀려났기 때문에 얼마 안 있어 훌훌 털어냈죠. 이것 역시 성장하는 과정 중에 겪는 하나일 뿐이라고 여기면서요.”

요즘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는 “스타 옥주현과 비교돼 위축되지 않느냐”이다. “어차피 다른 길을 걸어왔고 각자의 개성이 다르니까요. 옥주현 선배와 함께 연습하며 많이 배웠어요. 나만의 색깔을 빨리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 하며 열심히 할래요.”

박혜나는 여배우 특유의 까탈스러움을 찾아보기 힘들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해 ‘나만의 노트’가 책장 한 칸을 차지한다. 요즘 그의 노트에는 공연 때마다 느끼는 초록마녀의 심정들이 담겨 있다. ‘엘파바의 강인함, 옳다고 믿으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 인간뿐 아니라 만물에 대한 사랑을 가슴 가득 지닌 초록마녀가 진정 되고 싶다.’ 내년 3월 막이 내릴 때 우린 어떤 초록마녀를 기억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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