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뒤죽박죽 시공 속에서 비틀거리며 서로를 돌고 도는 사람들

유정인 기자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 배우들은 경사진 두 개의 달 위를 돌며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인 이야기를 편다.<br />남산예술센터(이강물 사진작가) 제공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 배우들은 경사진 두 개의 달 위를 돌며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인 이야기를 편다.
남산예술센터(이강물 사진작가) 제공

인간이 결국 패턴이라면, 그 패턴을 만든 가장 큰 힘은 시간일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에서 모두가 제각기 점멸한다. 단선적인 시간의 경험은 사람들이 세계를 기억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만든다. 마지막이 불행하면 전체가 다 불행한 것으로 기억하는 패턴 같은 것들.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이 패턴을 깬다. 시간을 뒤섞고, 여러 번 기억을 재구성하며 익숙한 패턴을 지워나간다.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작가 겸 연출가 정진새의 각색으로 강량원 연출가가 무대에 올렸다. ‘인간적’인 시간의 순서에 따르면 이야기는 이렇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동급생 영훈을 죽인 남자는 교도소와 정신병원에서 9년을 보내고 나왔다. 그의 고교 동창생인 여자는 남자가 자신이 일하는 출판사에 보내온 소설 원고를 읽고,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된다. 남자를 쫓아다녀 온 영훈의 어머니가 두 사람의 주변을 맴돈다.

시간과 기억, 상처와 사랑, 죄와 속죄에 대한 이야기는 ‘우주 알(Cosmic Egg)’이라는 독특한 설정 속에 전개된다. 인간의 패턴을 하나씩 지워나간 남자는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우주 알’을 삼킨다. 그때부터 단선적인 시간이 아닌 과거와 현재, 미래가 얽힌 시공간의 연속체를 살아간다. 이에 따라 극도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작두로 잘라냈다가 얼기설기 이어붙인 책처럼 되어버린다.

연극은 원작의 순서를 다시 한번 흐트러뜨렸다가 ‘극단 동’의 방식대로 묶었다. 무대는 크기와 경사가 다른 두 개의 달이다. 실제 달의 표면이 아니라, 지구에서 보이는 달의 표면이다. 사실이라고도, 사실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달이다. 그 위에서 역시 사실인지 아닌지 쉽게 말할 수 없는 각자의 기억과 현재가 뒤섞인다.

배우들의 움직임은 일반적인 연극의 패턴을 벗어난다. 감정이나 심리가 아닌 행동으로 인물을 표현하는 ‘극단 동’의 신체행동 연기다. 저마다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기울어진 무대를 균형이 깨진 상태로 돈다. 무너진 남자를 꼭 껴안은 여자가 ‘과거로부터, 너를, 지켜줄게’라고 할 때도, 영훈 어머니가 남자에게 ‘일진이 아니었던’ 영훈의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할 때도 이들은 끊임없이 비틀거리며 서로를 돌고 있다. 이는 자전축이 기운 지구에서 비틀리며 삶을 사는 인간들로도, 뒤섞인 시간을 되짚어 가는 시계추의 움직임으로도 보인다. 어떤 시공간에서든 자기만의 자장을 가진 사람들이 행성처럼 서로를 돌고 있는 모습이 비치는 순간에는 외로움과 위로가 동시에 왔다.

극이 끝나고 서사의 순서를 다시 세워보려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신 짙게 남는 것은 110분 동안 서로를 돌고 도는 사람들의 궤적이다. 단순하고 낯선, 그래서 아름다운 패턴이다. 오는 16일까지 남산예술센터 내 드라마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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