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새 없이 토해 놓는 냉소적 독백, 절망과 비애 대변하는 풍성한 음악...1인극 '박상원 콘트라바쓰'

선명수 기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1인극 <박상원 콘트라바쓰>의 한 장면. 박앤남공연제작소 제공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1인극 <박상원 콘트라바쓰>의 한 장면. 박앤남공연제작소 제공

경사지고 비대칭적인 사각의 무대. 황량할 정도로 텅 빈 무대에 덩그러니 놓인 채 홀로 관객을 맞는 것은 키가 2m에 달하는 거대한 악기, 콘트라바스다. 막이 오르면 한 남자가 무대 뒤편에 걸터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다. 브람스의 2번 교향곡 1악장이 울려퍼지고, 남자는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잠깐만요… 조금만 더… 그래, 여기요! 들으셨나요? 지금 이 소리? 좀 있으면 또 나올 겁니다. (…) 바스 소리요. 콘트라바스 소린데… 제가 연주한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죠.”

남자는 오케스트라 가장 끝 줄에서 가장 낮은 음을 내는 악기, 콘트라바스 연주자다. 외롭고 위태로운 섬 같은 무대에서 그는 음악가로서 자신의 조용한 투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박상원 콘트라바쓰>는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1981년 발표한 희곡 <콘트라바스>를 원작으로 한 1인극이다. 쥐스킨트가 독일의 한 작은 극단의 의뢰를 받아 쓴 이 희곡은 콘트라바스 연주자를 통해 한 예술가의 고뇌뿐 아니라 평범한 소시민의 비애를 냉소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담아 주목을 받았다. 배우 박상원이 2020년 초연에 이어 다시 무대를 이끌어 간다.

남자는 국립 오케스트라의 단원이다. 그는 “오케스트라에 지휘자는 없어도 콘트라바스는 없어선 안 된다”며 연주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무대 가장 뒷줄에서 가장 큰 악기와 씨름하면서도 그 가치를 존중받지 못하는 것에 소외감을 토로한다.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낮은 음을 내는 그는 가장 높은 음을 내는 소프라노 세라를 남몰래 흠모하지만, 세라는 그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남자는 철저한 계급 사회인 오케스트라에 분개하기도, 콘트라바스 연주자로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기도 한다. “우린 이론적으로는 들을 수 없을 만큼의 높은 음을 연주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절대 쓰이진 않습니다. 이건 우리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살아가지만, 그 누구도 건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늠할 수 없는 가능성에 그 누구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죠.”

연극 <박상원 콘트라바쓰>의 한 장면. 박앤남공연제작소 제공

연극 <박상원 콘트라바쓰>의 한 장면. 박앤남공연제작소 제공

2020년 초연에 이어 두 번째 시즌을 맞은 <박상원 콘트라바쓰>는 초연과 상당 부분 달라졌다. 텍스트를 압축해 110분에 달하던 러닝타임을 90분으로 줄였고, 무대 위의 소품도 악기만 남긴 채 모두 지워 여백을 살렸다.

박상원은 마치 무대 위 콘트라바스와 정면대결이라도 하듯 악기 주변을 돌며 애증을 쏟아내기도, 자기 자신의 가치를 두고 투쟁하기도 한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연주자로서의 비애에 대해, 사랑 앞에서의 초라함에 대해, 평범함에서 비롯된 절망에 대해 쉴 새 없이 토해 놓는다. 때론 지휘자라도 된 듯 음악에 맞춰 양팔을 휘젓고, 춤을 추고, 또 악기를 연주하며 홀로 90분의 러닝타임을 끌고 간다. 극중 그가 말하는 콘트라바스 연주자의 삶은 냉정한 세상 속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평범한 삶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냉소적이면서도 쓸쓸한 독백만큼이나 극을 가득 채우는 것은 음악이다. 말러 교향곡 1번,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 나단조 1악장, 바그너 오페라 발퀴레 서곡,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 3막 등 다양한 클래식 음악이 인물의 심리를 대변하듯 적재적소에 배치돼 극을 풍성하게 한다. 공연은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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