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그럼에도 사랑을 노래하라…‘흑사병 시대’ 이탈리아 대문호의 ‘위로’

문학수 선임기자

보카치오 ‘데카메론’ 에 등장하는 칸초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1492년경 출판된 <데카메론>의 삽화 일부. 페스트를 피해 모인 10명의 남녀를 소개하고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1492년경 출판된 <데카메론>의 삽화 일부. 페스트를 피해 모인 10명의 남녀를 소개하고 있다.

■흑사병, 그리고 중세의 겨울

성(聖)과 속(俗)을 넘나들었던 음악가 기욤 드 마쇼는 1377년 세상을 떴다. 14세기가 서서히 저물던 무렵이다. 그의 제자였던 프랑스의 시인 외스타슈 데상(1346~1406 추정)은 “나를 기르시고 내게 호의를 베푼 그분”의 죽음을 장엄한 발라드로 애도했다.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이여/ 슬퍼하라, 울어라, 그것이 온당하거늘/ (…) 검은 옷을 입고 울어라, 상파뉴의 사람들이여/ (…) 울어라 하프여, 사라센의 뿔피리여/ 위대한 시인, 마쇼의 죽음을!” 짧은 지면상 전재하기 어려워 극히 일부만 소개했다. 이렇듯이 제자로부터 추모의 발라드를 헌정받은 기욤 드 마쇼는 어찌 보면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가 아직 40대였던 시기에 유럽 전역에 전대미문의 재난이 몰아닥쳤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유럽뿐 아니라 세계를 뒤흔든 팬데믹이었다. 몽골과 중국, 인도와 중동을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휩쓸었다. 당시에는 아무도 원인균을 알지 못했다. 그저 피부가 새카맣게 타들어가다가 속절없이 쓰러져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이 혼돈과 공포의 상황을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신이 내린 재앙’으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 재난의 이름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흑사병(Black Death, 페스트)이었다. 유럽에서는 1347년부터 유행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교역로를 따라 유럽 전역으로 삽시간에 퍼졌다. 1348년과 그 이듬해에 하루에 3㎞씩 감염지역이 확산됐다고 하니 엄청난 속도였다. 이후 4년간에 걸친 1차 대유행에서 최소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욤 드 마쇼는 그런 재난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운이 좋았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위기와 공포를 견뎌낸다. 피렌체에서 남서쪽으로 35㎞쯤 떨어진 체르탈도에서 태어난 조반니 보카치오(1313~1375)가 <데카메론>을 쓰기 시작한 해는 흑사병이 무섭게 번져가던 1348년이었다. 위대한 작가는 머리말에서 밝힌다. “한창 괴로워하고 있을 때 몇몇 친구들은 즐거운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더없는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위로 덕분에 죽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 이 책은) 무서운 페스트가 거리에 만연했을 때 점잖은 일곱 명의 부인과 세 명의 젊은 남성이 한자리에 모여 열흘 동안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두세 명의 부인이 여흥으로 노래한 칸초네(Canzone)도 들어 있습니다.”(<데카메론>, 올재 클래식스, 이하 등장하는 인용도 이 책을 중요하게 참조했음을 밝힌다.)

‘열흘간의 이야기’를 뜻하는 <데카메론>은 흑사병이 창궐한 도시 피렌체를 벗어나 피에솔레의 어느 별장에 머물게 된 열 명이 각자 10개씩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열에 열을 곱해 모두 100개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런 구성을 흔히 ‘액자 형식’이라고 한다. 이야기 속에 또 이야기가 들었다는 뜻이다. 당연하게도 첫날 첫번째 이야기에서는 피렌체의 참상을 언급한다. “1348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는 흑사병이 만연하여 시내의 거리거리에 시체가 산을 이루고 악취는 가득했으며, 의사의 진단이나 어떠한 약도 소용없이 이삼일이면 죽어 갔습니다. (…) 관을 멜 자도 없어져 파 둔 구덩이가 있다면 즉각 묻어 버리거나 관도 없이 한 구덩이에 몇 명씩을 묻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집이나 밭에 짐승처럼 방치된 채 밤낮 없이 죽음은 계속됐습니다.”

대재난의 영향은 엄청났다. 지난 세기에 풍부한 잉여생산물로 도시를 부흥시켰던 농촌은 거의 붕괴했다. 도시 쪽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더 혹독했다. 인구 밀도가 높은 그곳에서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제조업과 상업의 기반이 온통 흔들렸다. 게다가 재난은 흑사병만이 아니었다. 흑사병 직전에는 기후변화로 인한 기근이 유럽을 휩쓸었다. 1315년의 폭우로 밭들은 형체를 잃었고 물레방아는 속절없이 떠내려갔다. 들판에서는 농작물이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했다. 기근은 7년이나 이어졌고 아사자가 속출했다. 알프스 북쪽의 인구 가운데 적어도 10%가 이 시기에 사라졌다. 이어진 재난은 전쟁이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100여년에 걸친, 정확히 말하자면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른바 ‘백년전쟁’으로 불린다. 물론 100년이 넘도록 쉬지 않고 싸운 것은 아니다. 때때로 휴전하면서 산발적인 싸움을 계속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외에 다른 나라들도 국면에 따라 전쟁에 휘말렸음은 물론이다. 당연하게도 전쟁은 가혹한 세금을 필요로 했다. 겹겹의 재난에 수탈까지 겹치면서 곳곳에서 반란과 봉기가 이어졌다. 흑사병은 이렇듯이 연속된 재난의 정점이었다. 결국 중세 후기의 ‘좋았던 시절’은 막을 내리고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흑사병을 피해 모인 열 명의 남녀들

이탈리아의 화가 살바토레 포스틸리오네(1861~1906)가 <데카메론>의 한 장면을 유화로 표현했다. 1906년 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화가 살바토레 포스틸리오네(1861~1906)가 <데카메론>의 한 장면을 유화로 표현했다. 1906년 작으로 알려져 있다.

보카치오보다 반세기쯤 먼저 태어난 대(大)작가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는 <신곡>을 썼다. 1308년 무렵부터 사망하던 해까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흑사병이 유럽에 상륙하기 30년쯤 전이다. <신곡>은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 문학의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또 지식인뿐 아니라 평민도 문학을 접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우리는 이 위대한 걸작에서도 여전히 ‘지엄하신 신’을 중심에 놓고 있는 중세적 세계관과 대면하게 된다. 하지만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완전히 결이 다르다. 그는 단테를 존경하고 단테에 대한 전기를 썼을 뿐 아니라 피렌체의 성 스테파노 성당에서 시민들에게 ‘단테 강독’도 60회나 했지만 작가로서는 다른 길을 걸었다. 한마디로 말해 <데카메론>에서 신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종교적 세계관, 혹은 교회적 엄숙주의를 과감하게 벗어난다. 수도원장이나 수도승 같은 인물들이 가끔 등장하긴 하지만 대부분 ‘개망나니’들이다. 재물을 탐내고 음탕한 짓들을 일삼는다. 그외의 인물들도 현실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생생한 캐릭터들이다. 거짓으로 고해성사를 하거나 협잡을 일삼는 인물, 사람들을 웃기는 만담꾼, 고리대금업자, 과부를 탐내는 의사, 도굴꾼, 해적, 못생긴 남편과의 잠자리를 피하면서 잘생긴 젊은 남자와 동침하는 여자 등등, 이야기가 100편이나 되다 보니 일일이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근대 프랑스의 작가인 발자크의 총서(叢書) <인간 희극>을 고스란히 연상시킨다. 이렇듯이 <데카메론>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단테의 ‘신곡’(神曲)에 대비해 ‘인곡’(人曲)으로 불리는 이유다.

열 명은 날마다 한 편씩 이야기를 풀어놓고는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여흥을 즐겼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데카메론>의 머리말에서 보카치오가 여러 차례 사용한 ‘위로’라는 단어의 실체는 바로 이 여흥에서 불렀던 노래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공포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무엇으로 위로할 것인가. 보카치오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겼다. 신을 향한 외경과 경모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사랑, 남자와 여자의 사랑, 스킨십으로 서로를 느끼는 사랑이었다. 그래서 <데카메론>은 첫날 저녁부터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일동은 시냇가로 이동해 아이들처럼 흥겹게 놀았으며 저녁 시간이 되어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악기 연주와 함께 라우레타는 춤을 추고 에밀리아는 디오네오의 기타 반주에 맞춰 칸초네를 불렀다.” 번역된 문장 속의 ‘기타’는 아마도 현악기 류트(Lute)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일동은 이렇듯이 날마다 ‘사랑의 칸초네’를 부른다. 둘째 날에는 “에밀리아가 춤을 추고 팜피네아가 칸초네를 선창”하자 모두 따라 부른다. “사랑이여 오세요. 내 모든 선(善)이여/ 모든 희망과 즐거움이여/ 잠시 멈춰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 어떤 한숨도, 씁쓸한 고통도 아닌/ 당신의 기쁨은 나의 달콤함/ 환하게 타오르는 불꽃과 같아/ 그 안에서 나는 생생하고 즐겁게 타오릅니다.”

네번째 날에 “필로스트라토가 부르는 칸초네”는 애절하기 이를 데 없다. “눈물로 보여주려 합니다/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사랑, 그대를 믿었으나 배신당했을 때”라고 노래하자, 일동 가운데 어떤 부인이 “유독 얼굴을 붉힌다”. 다섯째 날에는 디오네오가 “장난기 어린 외설적인 내용”의 노래로 사람들의 배꼽을 빼놓는다. 일곱째 날에는 “아름다운 분수대 곁의 풀밭에서 피리와 악기에 맞춰 춤을 추고”, 이어서 팔로메나가 “내가 붙잡지 않았던 그대”가 다시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마지막 열번째 날에 “라우레타가 춤을 추고 피암메타가 애절한 사랑의 칸초네”를 부른 다음, “날이 밝자 (일동은) 피렌체로” 귀환한다. <데카메론>에는 이외에도 많은 노래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 넷째 날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3행짜리 노래는 특히 인상적이다. “내 동백꽃 화분/ 앗아간/ 그 못된 사람은 누군가요?” 마치 일본의 하이쿠를 연상시키는 이 노래는 ‘칸초네’보다는 ‘칸초네타’(Canzonetta)라고 불려야 할 듯하다. 축소형 접미사 ‘etta’가 붙었으니 ‘짧은 노래’ 혹은 ‘작은 노래’라는 뜻이다.

■‘사랑의 칸초네’로 위로를 전하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초기 화가인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1423~1457)가 재현한 조반니 보카치오의 모습. 보카치오 사망 이후인 1450년경에 제작한 프레스코화 연작의 일부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초기 화가인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1423~1457)가 재현한 조반니 보카치오의 모습. 보카치오 사망 이후인 1450년경에 제작한 프레스코화 연작의 일부다.

이 글의 맨 앞에 ‘외스타슈 데상이 장엄한 발라드로 기욤 드 마쇼의 죽음을 애도했다’라고 썼다. 그렇다면 발라드(Ballade, 이탈리아어로 발라타, 독일어로는 발라데)란 무엇인가. 요즘에는 주로 느린 템포의 사랑 노래를 ‘발라드’라 칭하지만 원래 의미는 다르다. 어원이라고 할 수 있는 라틴어 ‘발라레’(Ballare, 춤추다)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춤곡의 리듬으로 부르던 노래였다. 물론 ‘춤곡’이라는 의미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희석됐다. 기욤 드 마쇼와 외스타슈 데상이 발라드를 짓던 시절에는 ‘사랑’이나 ‘애도’ 등의 주제를 ‘유절형식’으로 표현하는 노래를 뜻했다. ‘유절’이라는 용어가 좀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사실은 별것 아니다. 말 그대로 유절(有節), 즉 절(節)이 있다는 뜻이다. 가사는 절마다 바뀌지만 선율은 반복된다. 우리가 그동안 배우고 불러온 노래들이 사실은 거의 다 유절이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은 통절형식(通節形式)인데, 말 그대로 절의 구분이 없다는 뜻이다.

발라드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짧은 후렴’이 붙는다는 사실이다. 이 후렴구를 ‘르프랭’(Refrain)이라 하는데 굳이 명칭을 외울 필요는 없다. 다만 ‘1절-후렴, 2절-후렴, 3절-후렴’의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정도는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후렴이 매우 짧다는 점도 아울러 기억하면 더욱 좋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노래들의 후렴에 비하자면 참으로 짧다. 앞서 언급했던 데상의 발라드에서는 “위대한 시인, 마쇼의 죽음을!”, 이 짧은 한 행이 후렴이다. 당대에 발라드만큼 유행했던 ‘비를레’(Virelai)라는 장르도 있는데,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는 특이하게도, 후렴이 각 절의 맨 뒤가 아니라 시작부에 놓인다는 특징이 있다. 사실 이 두 장르는 음악적 차이보다는 음유시인이 어떤 패턴으로 시를 지었는가에 따라 구분된다. 물론 내용적 측면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존재했다. 간단히 말해 발라드는 진지했다. 존경하는 인물을 애도하기에 적절한 장르였다. 반면에 비를레는 좀 더 가볍고 화사했다. 자연에 대한 묘사와 연애의 감정을 연결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장엄한 발라드’라는 표현은 가능하지만, ‘장엄한 비를레’라는 말은 어색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에서 언급하고 있는 칸초네는 무엇인가. 사실 이 작품에서 보카치오는 칸초네, 칸초네타, 발라타 등 다양한 명칭을 혼용하는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용어는 칸초네다. 물론 칸초네도 시기적으로 다양한 음악적 변천을 거쳤다. 하지만 이 지면에서 그 변천사를 서술하는 것이 그다지 유용해 보이진 않는다. 다만 <데카메론>의 전체적 맥락으로 보건대 보카치오가 사용하는 ‘칸초네’라는 용어는 서정적인 노래의 총칭인 것으로 보인다. 사랑의 감정을 노래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프랑스의 비를레와 흡사하지만, 특정한 후렴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별개다. 동시대의 시인 페트라르카(1304~1374)가 이탈리아어로 쓴 서정시들을 모아 <서정시집>(Canzoniere, 칸초네 모음)을 펴냈듯이,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에서 말하는 ‘칸초네’는 그냥 ‘서정적인 노래’ 혹은 ‘인간적인 노래’라는 의미를 지닌다.

중요한 것은 <데카메론>에 등장하는 노래들이 단순히 글자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대의 피렌체 사람들은 실제로 이 노래들을 불렀다. 보카치오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어떤 장면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던 노래들을 인용하기도 했다. 이렇듯이 보카치오는 엄숙한 성가가 아니라 그야말로 세속적인 ‘사랑의 칸초네’로 ‘흑사병 시대’의 사람들을 위로했다. 그것이 바로 코로나19 팬데믹을 겪고 있는 지금에서야 제대로 실감하는 <데카메론>의 또 다른 의미인 셈이다.

[클래식 오디세이 - 음악의 역사를 항해하다]④그럼에도 사랑을 노래하라…‘흑사병 시대’ 이탈리아 대문호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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