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지운 것과 남긴 것···연극 ‘금조 이야기’

선명수 기자
극작가 김도영의 신작 <금조 이야기>는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는지, 전쟁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묻는 작품이다. 국립극단의 작품개발 사업 ‘창작 공감’의 일환으로 지난 1일부터 공연 중이다. 국립극단 제공

극작가 김도영의 신작 <금조 이야기>는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는지, 전쟁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묻는 작품이다. 국립극단의 작품개발 사업 ‘창작 공감’의 일환으로 지난 1일부터 공연 중이다. 국립극단 제공

한 여자가 메밀밭을 내달린다. 언덕 위, 주인집의 마른 땅에 메밀 씨앗을 뿌리던 여자는 어디론가 황급히 도망치는 마을 사람들을 목격하고 정신없이 산비탈을 내려온다. 천지가 굉음으로 울리는 텅 빈 마을을 헤매지만 어디서도 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딸을 잃어버린 여자 ‘금조’의 이야기는 그로부터 7개월이 지난 1951년 1월, 긴 전쟁의 한가운데서 다시 시작된다.

지난 1일 막을 올린 <금조 이야기>(신재훈 연출)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연극이다. <왕서개 이야기> <무순 6년> 등 전작에서 꾸준히 전쟁과 폭력의 역사를 담아온 극작가 김도영의 신작으로, 한국전쟁 와중에 잃어버린 딸을 찾아 피란길을 거슬러 가는 금조의 험난한 여정을 그린다.

메밀밭 위에 선 금조를 비추며 막을 올린 연극은 시간이 흐른 뒤 더 남루해진 행색의 금조가 새로운 거처로 피란 온 주인집을 찾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금조는 주인집 여자에게 주인집에 남겨두고 온 딸은 어디로 갔는지, 전쟁이 날 것을 알면서도 왜 자신을 그날 산 위의 메밀밭으로 보냈는지 따져 묻는다. 그러나 주인 여자는 “애들이 제일 먼저, 제일 많이, 아무것도 아닌 일로 그렇게 되는 게 전쟁”이라고 답할 뿐이다.

딸을 잃어버린 금조의 여정에는 어미를 잃은 ‘들개’가 동행한다. 관객은 4시간의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이 둘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들이 피란길에서 마주친 수많은 인간과 동물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금조와 같은 피란민들부터 텅 빈 역사를 지키는 역무원, 전쟁 고아들, 군번도 부여받지 못한 소년병과 ‘래빗’이라 불리는 여성 첩보원, 친일 부역자였다가 이제는 전쟁을 설파하는 시인까지. 전쟁에 휩쓸린 사람들과 표범, 말, 개구리 등 동물까지 약 30개의 캐릭터를 13명의 배우가 연기한다.

거대한 폭력 속에 희생된 무명(無名)의 사람들을 조명한 작품은 이전에도 꽤 있었지만, <금조 이야기>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의 시선을 통해서도 전쟁에 접근한다. 연극은 이야기의 한 축에 금조와 피란민들의 현재를, 또 다른 한 축에는 들개가 되어버린 표범 ‘아무르’의 과거를 놓고 이를 번갈아 보여주며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폭력과 광기의 역사를 조명한다. 인간이 불태운 숲에서 가족을 잃은 뒤 조선인을 사냥하도록 훈련된 살육의 도구였다가, 이제 본능마저 잃어버린 들개가 되어버린 ‘아무르’의 존재는 인간이 만들어낸 광기의 산물인 전쟁과 겹쳐진다. 서로 동떨어져 보였던 사람들과 동물들이 서로 얽혀 있음이 서서히 드러나며 연극은 정점을 향해 간다.

이들 모두의, 또 각자의 전쟁 속에서 생존은 인간성 상실의 명분이 되기도 한다. 금조가 숲에서 만난 ‘죽은 친구의 시신을 끌고 다니는 남자’는 전쟁이 “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를 살육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이 목도하게 되는 것 역시 수많은 살육이다. 그 참상은 사실적으로도, 때로는 비현실적으로도 그려진다. 주인 여자의 시신에서 반지를 빼가는 가정부, 그 가정부의 목에 올가미를 매는 역무원, 그 역무원을 죽이는 시인, 시인을 달려오는 기차 앞에 세운 ‘신발 장수’의 존재까지. 전쟁은 폭탄이 터지고 국가가 상대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전장에서뿐만 아니라, 나의 생존을 위해 타인을 해하는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이 연극은 환기한다.

연극 <금조 이야기>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금조 이야기>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김도영은 금조로부터 출발해 수많은 사람과 동물로 확장되는 방대한 이야기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들과 촘촘하게 엮어냈다. 배우 윤현길이 ‘금조’ 역을 맡아 4시간 이상 열연한다. 작품 속 여러 상징을 지닌 ‘들개’를 여러 명의 배우가 번갈아 연기한다.

연극은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를 비추며 끝을 맺는다. 긴 여정의 끝에 금조는 오랫 동안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새하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메밀밭에 다시 오른다. ‘잘 자라버린 메밀과 아무것 남지 않은 상실’을 마주한 금조의 얼굴에서, 전쟁이 남긴 것들을 돌아보게 된다. 연극은 70년 전 전쟁을 그리고 있지만, 극장 밖 세계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1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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