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슬픔마저 껴안는 삶의 예찬…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

선명수 기자
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기억과 망각을 화두로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연극이다. 2017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한 뒤 영국 창작진과 한국 배우·스태프가 협업한 첫 라이선스 공연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연극열전·우란문화재단 제공

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기억과 망각을 화두로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연극이다. 2017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한 뒤 영국 창작진과 한국 배우·스태프가 협업한 첫 라이선스 공연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연극열전·우란문화재단 제공

기억이 사라진 후에도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The Nature of Forgetting)>은 흩어지는 기억, 망각 뒤에도 남아 있을 그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다. 영국 극단 ‘씨어터 리’가 2017년 런던에서 초연해 호평받은 작품으로, 2019년 내한 공연 당시 전석 매진을 기록하는 등 관객 관심이 뜨거웠다. 올해 아홉 번째 시즌을 시작한 연극열전의 첫 작품으로 지난 14일부터 관객과 만나고 있다. 이번엔 영국 창작진이 한국 배우·스태프와 협업한 첫 라이선스 공연으로 열린다.

막이 오르면 한 남자가 무대 한 켠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쉰다섯번째 생일을 맞은 남자에게 딸이 다가와 주머니 속에 빨간색 넥타이가 꽂혀 있는 남색 재킷을 입으라고 말한다. 천천히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딸의 모습에서 남자가 기억을 잃어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자에게 딸의 말은 곧 흐릿해지고, 그는 온통 ‘빨간색’이라는 단어에 휩싸여 옷장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참을 찾다가 옷장 속에서 무심코 교복 재킷을 꺼내 입게 된 순간, 그의 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났던, 또 고통스러웠던 순간의 기억들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공연은 남자의 기억 속을, 기쁘고 슬펐던 삶의 여러 순간들을 관객 앞에 펼쳐보인다. 무대엔 약간의 단차가 있다. 무대 정중앙의 낮은 단상은 남자의 머릿속, 기억을 표상하는 공간이다. 교복이 촉발한 기억은 남자를 수십년 전 교실로 데려다 놓는다. 그 공간은 뒤죽박죽 엉켜버린 남자의 기억에 따라 떠들썩한 교실에서 엄마가 등교 전 머리를 빗겨주던 어린 시절의 집이 되기도,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내달리던 등굣길과 결혼식 피로연장, 어떤 비극적인 기억의 장소인 자동차 안이 되기도 한다.

고장난 카세트 테이프처럼 뒤엉킨 기억은 앞으로도, 뒤로 가기도 하며 조기 치매를 겪고 있는 남자의 혼란을 그대로 보여준다. 남자가 기억의 파편들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면 배우들도 단상 밖으로 되돌아온다. 두 명의 연주자가 피아노와 바이올린, 퍼커션, 루프스테이션을 연주하며 이 모든 기억 속 환희와 슬픔, 혼란의 순간들을 표현한다. 배우들의 몸짓과 어우러진 연주는 기억의 단절이나 혼란이 발생할 때마다 날카로운 선율과 리듬으로 극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연출을 맡은 기욤 피지는 “기억과 망각이 우리 머릿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치매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달하는 공연”이라며 “그 기억을 온전하게 다시 조합해 내지 못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작품을 통해 조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의 한 장면. 연극열전·우란문화재단 제공

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의 한 장면. 연극열전·우란문화재단 제공

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의 한 장면. 연극열전·우란문화재단 제공

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의 한 장면. 연극열전·우란문화재단 제공

대사보다 신체 표현이 주가 되는 ‘피지컬 씨어터(Physical Theatre)’ 공연이다. 공연 내내 배우들의 대사가 거의 없고 일부 대사는 라이브 연주에 묻혀 잘 들리지 않지만, 이 공연에서 중요한 것은 대사가 아니다. 배우들의 몸의 언어는 그 어떤 대사보다 충만하게 생의 여러 순간과 감정을 표현한다. 실제론 무대에 고정돼 있는 자전거에 올라탔음에도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모습을 표현한 장면이나, 케이크 가게 쇼윈도에 코를 박고 군침을 흘리는 아이들의 모습은 마임과 표정 연기만으로도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네 명의 배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연령대를 표현해야 하는 만큼 교실에서 아이들이 손에 쥔 연필의 크기로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는 등 재치와 상상력이 빛나는 장면이 많다. 기억을 잃어가는 남자 ‘톰’을 연기하는 배우 김지철은 장난스러운 꼬마 아이부터 사랑에 빠진 청년, 첫 아이의 탄생에 기뻐하는 아빠와 망각에 혼란스러워 하는 50대 중년 남성까지 한 사람의 수많은 시간을 울림 있게 연기한다. 톰의 아내와 딸을 맡은 배우 김주연이 보여주는 다채로운 얼굴도 인상적이다. 배우들은 특별한 분장 없이 표정만으로 아이와 성인을 오가며 연기한다.

망각의 슬픔마저도 껴안으며 삶의 경이로움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70분의 러닝타임 동안 한 사람의 인생을, 가장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들여다본 듯한 기분으로 공연장을 나서게 된다. 말을 생략한 채 몸으로 그 모든 여정을 표현했기에 잔상이 오래 남는다. 공연은 서울 성동구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에서 30일까지.


Today`s HOT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해리슨 튤립 축제
페루 버스 계곡 아래로 추락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불타는 해리포터 성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