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대한 통찰부터 적대적 세상을 대하는 삶의 지혜까지···홍상수 ‘소설가의 영화’

백승찬 기자
영화 <소설가의 영화>의 한 장면 | 전원사 제공

영화 <소설가의 영화>의 한 장면 | 전원사 제공

‘오토픽션’이란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소설 형식으로 풀어낸 글을 칭하는 용어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는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고, 노르웨이 작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는 가족사를 적은 <나의 투쟁>을 쓴 뒤 가족으로부터 절연당했다.

한국에서 오토픽션에 가장 가까운 영화를 만드는 이를 꼽는다면 홍상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같은 초기 영화들에는 전통적 영화 내러티브의 요소가 있었지만, 자신만의 연출 방법론을 확립한 2000년대 이후 영화에서는 촬영 당시 홍상수의 생각과 삶, 주변 환경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배우를 캐스팅하고 역할만 정해둔 뒤 대본은 촬영 당일 아침 매일 제공하는 연출방식도 이 같은 경향에 맞닿아 있다. 게다가 근작들에서 홍상수는 제작·촬영·편집·음악까지 겸한다. 영화는 통상 시스템에 의해 제작되지만, 홍상수 영화에서 시스템은 홍상수 그 자신이다.

지치지 않는 다산의 감독 홍상수는 매년 1~2편의 영화를 선보이고 있다. <소설가의 영화>는 홍상수의 27번째 장편이다. 영화는 글쓰기를 사실상 접은 소설가 준희(이혜영)의 발걸음을 따른다. 준희는 연락이 끊겼던 후배 세원(서영화)이 운영하는 서점을 찾는다. 준희는 인근을 산책하다 과거 함께 작업하려다 못한 영화감독 효진(권해효)과 그의 아내 양주(조윤희)를 만난다. 준희는 연기를 그만둔 배우 길수(김민희)를 만나 친근감을 느낀다. 준희는 길수에게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에 나와달라고 제안한다. 길수가 출연한 준희의 영화가 상영되면서 <소설가의 영화>도 끝난다.

영화 <소설가의 영화>의 한 장면. 여느 홍상수의 영화들처럼 술자리에서 많은 대화가 이뤄진다.  | 전원사 제공

영화 <소설가의 영화>의 한 장면. 여느 홍상수의 영화들처럼 술자리에서 많은 대화가 이뤄진다. | 전원사 제공

영화 <소설가의 영화> 촬영 현장. | 전원사 제공

영화 <소설가의 영화> 촬영 현장. | 전원사 제공

홍상수의 영화는 출연 배우의 캐릭터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곤 한다. 이혜영은 홍상수의 전작 <당신 얼굴 앞에서>(2021)부터 ‘홍상수 월드’에 진입했다. <당신 얼굴 앞에서>보다 <소설가의 영화> 속 이혜영이 조금 더 활력과 개성이 있다. 이혜영이라는 배우가 가진 독특한 캐릭터와 카리스마가 홍상수 영화에 본격적으로 녹아들었다. 영화 속 인물들도 준희에게 카리스마가 있다고 찬탄하고, 준희는 웃으며 아니라고 손사래 친다.

연기와 인기 면에서 톱클래스였던 김민희는 홍상수와 연인 관계임을 인정한 이후 홍상수 영화에만 출연하고 있다. 이 상황에 대한 논평인 듯 <소설가의 영화> 속 효진은 길수가 영화에 나오지 않아 “아깝다”고 말한다. 이를 듣던 준희는 “뭐가 아깝냐”고 발끈한다. 성인인 길수가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며, 돈 많이 벌 수 있는 상업영화에 나오지 않는다고 아깝다는 인식은 문제라는 것이다. 길수는 자기 대신 화를 내주는 준희를 보며 재밌다는 듯 웃는다. 준희의 입을 빌린 홍상수의 연출론도 짐작할 수 있다. 준희는 “좋아하는 사람을 편한 상태에 두고 찍고 싶다. 모든 게 편하고 진짜여야 한다”고 말한다. 길수가 다큐멘터리냐고 하자 준희는 아니라고 한다. 배우라는 각기 다른 소우주가 꾸밈 없이 드러나고, 이 매개체를 통해 창작자의 생각과 감정도 솔직하게 밝히는 것이 홍상수 영화들의 요지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내러티브가 있긴 하지만 내러티브는 느슨한 연결고리일 뿐 이 과정을 왜곡하지는 않는다.

영화 <소설가의 영화>의 한 장면 | 전원사 제공

영화 <소설가의 영화>의 한 장면 | 전원사 제공

영화 <소설가의 영화> 촬영 현장 | 전원사 제공

영화 <소설가의 영화> 촬영 현장 | 전원사 제공

아무리 솔직하고 투명하다 하더라도 영화감독 개인의 넋두리라면 굳이 그 영화를 볼 필요는 없다. <소설가의 영화>에는 예술의 본질에 대한 통찰부터 우연한 만남이 주는 기쁨, 적대적인 세상에 대처하는 방법 같은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전반적으로 유머러스하면서도 때로 삐져나오는 날카로운 냉소가 영화 보기의 재미를 더한다.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21일 개봉.

영화 <소설가의 영화> 촬영 현장. 바닥에 무언가를 그리는 왼쪽 아래 남자가 홍상수 감독. | 전원사 제공

영화 <소설가의 영화> 촬영 현장. 바닥에 무언가를 그리는 왼쪽 아래 남자가 홍상수 감독. | 전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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