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음악을 잠에서 깨운 이방인…그의 선율은 ‘최고의 선물’이다

문학수 선임기자

(13) 헨델, 우리가 아는 그 이상의 위대함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영국의 화가 토머스 허드슨 (1701~1779)이 1756년 그린 헨델의 초상화. 당시 헨델은 71세였다. 3년 뒤 타계했다. 그림은 런던의 국립 포트레이트 갤러리에 소장돼 있다.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영국의 화가 토머스 허드슨 (1701~1779)이 1756년 그린 헨델의 초상화. 당시 헨델은 71세였다. 3년 뒤 타계했다. 그림은 런던의 국립 포트레이트 갤러리에 소장돼 있다.

바흐·스카를라티와 함께…1685년은 헨델을 우리에게 안겨준 고마운 해
여섯 살 때 ‘깜짝 데뷔’한 독일 소년은 훗날 영국 음악을 이끌며 화려한 꽃을 피웠다

■1685년, “이 얼마나 위대한 해인가!”

지난 회에 언급한 헨리 퍼셀은 36세에 세상을 떴다. 훗날 모차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참으로 짧은 생애였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래서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더라면 영국 음악의 위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들은 이런 가정법을 부질없는 공상으로 만든다. 헨리 2세 시절에 음악가로 첫걸음을 뗀 그는 제임스 2세 치하를 거쳐 윌리엄과 메리 2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활약했지만, 이어지는 조지 1세의 시대에 영국 음악을 주도한 인물은 뜻밖의 이방인이었다.

짐작하듯이 그의 이름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andel)이다. 독일 할레(Halle)에서 1685년 태어난 그는 20대 후반부터 1759년 74세로 사망할 때까지 영국에서 살았다. 아예 이름을 조지 프리데릭 헨델(George Frideric Handel)로 개명해 ‘프로이센 사람’이라는 정체성에서 스스로 멀어졌다. 그의 고향은 애초에 작센의 도시였으나 헨델이 태어난 해에는 브란덴부르크 공국에 속해 있었으니 ‘국적’으로 보자면 프로이센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노마드였던 그에게 ‘고향’은 별 의미가 없었다. 비유하자면 그는 ‘집’보다 ‘호텔’을 좋아했다. 같은 해에 할레에서 150㎞쯤 떨어진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태어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이 지점에서 헨델과 판이했다. 성정(性情)이 급하고 뜨거웠던 것은 서로 닮았으나 바흐는 헨델과 달리 평생토록 독일땅을 벗어나지 않았다.

바로크 후기를 대표하는 두 거장이 1685년 태어났다는 것은 유럽 음악사를 논할 때 종종 의미심장한 ‘팩트’로 떠오른다. 헨델과 바흐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하프시코드(Harpsichord) 연주자이며 작곡가였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도 역시 같은 해에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물론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 의해 바로크 음악이 절정에 달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저 우연으로만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헨델과 바흐는 생전에 서로 만난 적이 없었지만, 바흐는 ‘그 유명한 헨델’의 연주를 직접 들어보지 못한 것을 평생 안타까워했다. 헨델과 스카를라티는 20대 초반에 이탈리아 로마의 오토보니 궁정에서 오르간과 하프시코드로 ‘연주 배틀’을 펼치기도 했으니, 두 사람은 서로를 충분히 알았고 음악적으로도 상대를 의식하고 교류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듯 같은 해에 태어난 거장들이 동시대의 음악을 진보시켰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1685년’이 음악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혹자는 이를 ‘기념비적인 해’로 격상시킨다. 예컨대 음악비평가 요제프 베슈베르크(1907~1983)는 헨델이 출생하고 26일 뒤에 바흐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이 얼마나 위대한 해인가!”라고, 복받치는 감정을 드러냈다.

물론 ‘바로크 후기’를 거론하면서 지난 회에 짧게 언급했던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1681~1767)이 빠질 수 없음은 자명하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도 말했듯이, “위대한 동시대인들이었던 바흐와 헨델, 텔레만은 바로크에서 고전으로 넘어가는 새로운 음악언어의 이디엄을 찾고 만들어낸 선구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번 글의 초점은 “바로크 시대에 가장 감동적인 선율을 썼던 작곡가, 위대한 세계인, 매력적인 오르간 비르투오조”(아르농쿠르, <바로크음악은 ‘말’한다>)였던 헨델에게 맞춰져 있음을 양지해주기 바란다. 서양음악의 조종(祖宗)으로까지 거론되는 저 위대한 바흐도 이번 글에서는 조연으로 출연했음을 밝힌다.

■함부르크에서 날아오르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로 배웠다. 당연하게도 이 대구법에는 바흐가 헨델보다 한 수 위라는 전제가 깔렸다. 다시 말해 ‘바흐=1등, 헨델=2등’이라는 뜻일 텐데, 두 사람의 음악에 이처럼 등위를 매기는 것 자체에 동의하기 어렵거니와 명백하게 성차별적 표현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데 한국의 5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이 ‘괴상한 수사’를 기억한다. 교과서에 그렇게 기술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상당수의 중·고등학생들이 헨델을 여자로 알았다. 긴 머리카락을 치렁하게 늘어뜨린 헨델의 초상화는 그런 확신을 더욱 부추겼다. 물론 이제는 누구나 가발임을 알고 있다. 당시에는 남자들도 웬만한 사회적 지위를 갖췄다면 가발로 멋을 부렸다. 남성의 가발 착용은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됐지만 중세 기독교는 이를 허영심으로 규정했고 상당 기간 금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부터 교회의 단속이 힘을 잃었고 바로크 시대로 접어들면서 왕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가발이 성행했다. 결정적으로 유행을 부추긴 인물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였다. 영국에서는 1660년 왕정 복고와 더불어 가발 열풍이 불었다. 헨델은 워낙 유명 인사였던 까닭에 여러 점의 초상화가 전해지는데 그중 가발을 쓰지 않은 것으로는 영국의 화가 제임스 손힐(1675~1734)이 1720년쯤 그린 것이 유일하다. 이 그림에서 헨델은 가발 대신 빨간 모자를 썼다. 상당히 멋스러운 비니 스타일의 모자다.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로, 헨델을 어머니로 칭하는 건 맞지도 않지만 명백한 차별
유럽 모든 언어에 능통했고 문학과 미술에도 높은 안목을 지녔던 교양인
리날도의 ‘울게 하소서’처럼…헨델보다 더 감동적 선율을 남긴 작곡가는 없다

이 시기의 헨델은 30대 중반이었고 서유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저명한 음악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의 그는 누구도 의심하기 어려운 ‘영국 음악가’였다. 헨델은 20대 중반에 영국에 정착했으며 40대 초반이던 1727년에 아예 영국인으로 귀화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그는 퍼셀 사후의 영국에서 가장 큰 인기와 영향력을 지닌 음악가였다. 그렇다면 1685년 할레에서 태어난 그는 어떤 행로를 거쳐 그 지점에 당도했던 것일까. 애초에 그의 집안은 음악과 무관했다. 아들과 이름이 같았던 아버지 게오르크는 이발사이자 외과의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지만 당시에는 이발사가 외과의사를 겸하는 경우가 흔했다. 헨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영국의 전기작가 존 메인워링(1724~1807)이 쓴 최초의 헨델 전기(1760년 출간)를 참조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드라마를 극대화하려고 과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헨델의 ‘깜짝 데뷔’는 아버지로 인한 우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일은 1691년, 그러니까 헨델이 겨우 여섯 살이었을 때 일어났다. 외과의사인 아버지가 바이센펠스 공작을 왕진하려고 출발하려는데 어린 헨델이 자기도 데려가 달라면서 죽자살자 따라붙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섯 살 꼬맹이는 아버지가 탄 마차를 끝까지 쫓아 달렸고 아버지도 할 수 없이 막둥이를 마차에 태웠다는 것이다. 고스란히 사실이라면 매우 영화적인 장면이다. 어릴 적부터 헨델의 성품이 얼마나 고집스러웠는지, 또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에 상당히 흥미를 느꼈음을 짐작하게 한다. 어쨌든 헨델은 바이센펠스 공작의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해 놀라운 재능을 입증했고, “아이의 주머니는 공작의 하사금으로 가득 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공작은 헨델의 음악교육을 후원하겠다고 나섰지만 아버지는 이를 공손히 거절했다. 그는 자식들이 외과의사나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다.

헨델의 어린 시절. 영국의 화가 마거릿 이자벨 딕시가 1893년 그린 상상화다. 어린 헨델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옥탑방에서 하프시코드를 몰래 연습했다는 풍문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헨델의 어린 시절. 영국의 화가 마거릿 이자벨 딕시가 1893년 그린 상상화다. 어린 헨델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옥탑방에서 하프시코드를 몰래 연습했다는 풍문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바이센펠스에서 ‘신나는 경험’을 하고 돌아온 꼬마 헨델은 마리아교회(Marienkirche)의 악장이자 오르가니스트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자코프(Zachow)에게 음악을 배울 수 있었다. 헨델의 첫 번째 음악선생이었다. 이런 사실로 보건대, 아버지가 아들의 음악교육을 극단적으로 반대하진 않았을 것으로 유추된다. 만약 그랬다면 할레의 저명한 음악가였던 자코프에게 음악을 배우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헨델은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열일곱 살이던 1702년 할레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겨우 한 달 만에 그만두고 할레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채용됐다. 그것이 음악가로서 봉급을 받은 첫 번째 자리였다.

이때부터 헨델의 걸음이 빨라진다. 이듬해에 그는 함부르크 간제마르크트 오페라극장(Oper am Gansemarkt)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이올리스트 겸 하프시코드 연주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한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 있으니, 1678년 문을 연 간제마르크트 극장은 궁정극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극장은 한자동맹의 회원들, 다시 말해 함부르크의 부유한 상인들이 설립한 독일 최초의 민간 오페라극장이었다. ‘세계 최초의 민간 오페라극장’으로 기록되고 있는 테아트로 산 카시아노(Teatro San Cassiano)가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문을 연 해가 1637년이다. 그로부터 약 40년 뒤 독일땅에도 같은 형태의 오페라극장이 들어섰다. 이제 돈만 있으면 입장권을 사서 오페라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보편화하고 있었다. 헨델은 부르주아의 도시 함부르크에서 날아올랐다. 간제마르크트에서 공연했던 그의 첫 번째 오페라 <알미라(Almira)>가 시쳇말로 ‘대박’이 났다.

■독일인 헨델, 영국 음악을 이끌다

이후 헨델의 행보는 눈부시다. 메디치 가문의 초청을 받아 이탈리아로 떠난 그는 피렌체, 로마, 나폴리, 베네치아 등지에서 4년을 보낸다. 이때 헨델은 이탈리아 음악계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네트워크를 확장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현지에서 공연해 국제적 명성을 쌓는다. 앞서 언급했던 스카를라티와의 배틀도 이 시기에 펼쳐졌다. 아르칸젤로 코렐리, 안토니오 비발디, 토마소 알비노니 등 당대의 영향력 있는 음악가들과 교류하면서 헨델의 명성도 함께 올라갔음은 자명하다. 예컨대 헨델이 로마의 보넬리 궁정에서 오라토리오 <부활(La Resurrezione)>을 초연했을 때, 당시로서는 대편성이라고 해야 할 45인조 오케스트라를 이끈 인물은 다름 아닌 코렐리였다. 가장 큰 성공은 ‘오페라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이뤄졌다. 1709년 베네치아에서 초연한 오페라 <아그리피나(Agrippina)>는 헨델의 명성을 톱 클래스에 올려놨다. 그를 자신의 궁정으로 데려가려는 귀족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헨델을 고용한 이는 하노버의 선제후 게오르크 레오폴트(1660~1727, 훗날의 영국 왕 조지 1세)였다. 헨델은 1710년 봄, 하노버 궁정의 카펠마이스터(궁정 악장)로 임명돼 1000탈러의 연봉을 받게 된다. 이는 헨델이 음악가로서 받았던 최초의 봉급, 즉 할레 대성당 오르가니스트로서 받았던 연봉의 20배였다. 하지만 25세의 헨델은 멈추지 않았다. 하노버 궁정은 ‘스카우트 경쟁’을 뚫고 헨델을 영입하기 위해 ‘언제라도 휴가’를 약속했는데, 헨델은 이를 톡톡히 활용했다. 그는 기질적으로 멈출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의 유럽에서는 음악가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여전히 돈과 권력을 쥐고 있었기에 음악가에 대한 ‘전통적 수요’가 여전했다. 게다가 곳곳에 민간 극장들이 들어서면서 음악가들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다.

헨델의 눈길이 향한 곳은 자본주의가 발흥하던 대도시 런던이었다. 하노버의 카펠마이스터는 불과 6개월 만에 ‘휴가’를 받아 런던으로 떠났다. ‘런던의 음악가 헨델’의 삶은 그렇게 막을 올렸다. 헤이마켓 퀸스시어터(1714년 ‘킹스시어터’로 개명)에서 공연한 ‘런던 데뷔작’은 오늘날까지도 헨델의 오페라 중에서 가장 빈번히 회자되는 <리날도(Rinaldo)>였다. 당시 극장의 운영을 맡고 있던 인물은 26세의 프로듀서 애런 힐(1685~1750)이었다. ‘퀸스시어터’라는 이름 때문에 ‘궁정극장’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엄연히 민간 기획자가 운영하는 극장이었다. 말하자면 힐이 헨델에게 오페라를 위촉했던 것이다. 런던의 관객들은 2월24일부터 6월2일까지 15차례 공연된 <리날도>에 완전히 매료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오페라에는 그 유명한 아리아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가 등장한다. 소프라노 배역인 ‘알미레나’가 2막에서 부르는 애절한 노래다. 영화 <파리넬리>에서는 주인공 파리넬리가 이 노래를 부른다. 숨도 쉬지 않고 긴 고음을 뽑아내 여성 관객들을 졸도하게 만든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아니다. 이 오페라의 초연에 등장했던 카스트라토는 파리넬리가 아니라 ‘니콜리니’라는 예명으로 불렸던 니콜로 그리말디(1673~1732)였다. 당시의 런던에서 그가 어느 정도 스타였는지는 개런티로 확인된다. 알미레나 역의 소프라노 이자벨 지라르도는 300파운드를 받았는데, 타이틀롤을 맡은 니콜리니는 자그마치 860파운드를 받았다. 이자벨 지라르도도 당시의 유명 소프라노였지만 인기 있는 카스트라토의 몸값은 차원이 달랐다.

이처럼 당시의 오페라극장에서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확고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더불어 중요한 것은 헨델의 런던 데뷔작이 ‘이탈리아 오페라’였다는 사실이다. 이탈리아인(자코모 로시)이 이탈리아어로 쓴 대본에 출연진도 이탈리아 출신이 대다수였다. 이는 지난 회에 언급한 작곡가 헨리 퍼셀의 ‘모국어에 대한 사랑’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장면이다. 이렇듯 헨델이 영국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1710년대 초반부터 적어도 1730년대 말까지, 런던의 청중을 사로잡은 것은 이탈리아 오페라였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대작곡가 헨델이 있었다. 그는 영국의 부르주아 청중뿐 아니라 앤 여왕과 그 뒤를 이은 조지 1세(하노버의 레오폴트)에게도 총애를 받았으니, 말하자면 양손에 ‘떡’을 들고 영국의 음악을 이끈 것이다. 이런 경력 탓에 상업적이고 타산적인 사람으로 종종 오해받지만,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성격이 급하면서도 온후하고 배려심이 많았다. 금전적인 기부도 많이 한 것으로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언어에 능통했고 문학과 미술에도 높은 안목을 지닌 교양인이었다.

프랑스의 비평가 롤랑 마뉘엘(1891~1966)은 <음악의 기쁨>에서 “영국 음악은 (1695년) 퍼셀이 죽고 난 후 혼수 상태에 빠졌다. 죽음처럼 깊은 잠이었다”고 말한다. 그로부터 거의 20년간 휴지부를 거쳐 독일에서 온 헨델이 ‘영국 음악의 바통’을 이었다는 뜻이다. 물론 헨델은 퍼셀의 음악적 유산도 배제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이탈리아와 영국을 모두 끌어안으면서 바로크 시대에 가장 매력적인 선율을 만들어낸 음악가였다. 그래서 아르농쿠르는 “헨델보다 더 감동적인 선율을 쓴 바로크 작곡가는 없다”고 확언한다.

[클래식 오디세이 - 음악의 역사를 항해하다]영국 음악을 잠에서 깨운 이방인…그의 선율은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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