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수 “나는 회색분자…늘 중간에 서 있으려 노력중”

박주연 기자

· 중학생 시절 도시락도 싸갈 수 없을 만큼 가난

· 라디오 팝송 들으면서 열등감·원망·슬픔 잊어

· 대학 땐 음악이 전부…운동권 친구들에게 부채감

· 이효리 소신있는 삶 ‘나이 잘 먹고 있구나’ 느껴

· 폴 매카트니보다 젊은데…‘송골매’도 다시 날 것

배철수씨를 만났다. 머리색이 하얬다. 콧수염도 하얬다. 벌써 62세. 스타일은 여전했다. 찢어진 청바지에 빛 바랜 청재킷, 스니커즈 차림으로 양 엄지손가락을 바지주머니에 꽂은 채 넓은 보폭으로 걷는 모습에서 젊었던 ‘송골매’ 시절의 흔적이 느껴졌다. 생각도 젊었다. 달라진 점은 배가 좀 나왔다는 것.

배철수씨가 지난 5월 28일 서울 상암동 MBC 사옥 9층, 국내외 CD들이 비치된 레코드 라이브러리에서 포즈를 취하며 웃고 있다. l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배철수씨가 지난 5월 28일 서울 상암동 MBC 사옥 9층, 국내외 CD들이 비치된 레코드 라이브러리에서 포즈를 취하며 웃고 있다. l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그는 지난 25년의 시간을 MBC FM4U <배철수의 음악캠프>(이하 ‘배캠’) 디스크자키로 살았다. 사반세기 동안 매일 오후 6시부터 2시간씩 청취자들과 만나왔으니 1만8000여 시간이다. 동일 타이틀, 동일 DJ의 음악방송으로 국내 최장수 기록이다. 무심한 듯 하면서도 까칠한 그의 화법, 정확하고 친절한 팝음악 소개에 매료된 팬층도 해가 갈수록 그 층이 두터워졌다. 실제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내는 청취자는 초등학생부터 70대 노인까지 폭넓다. 광고단가도 MBC FM에서 가장 높다. 그는 현재 KBS 1TV <콘서트 7080>도 11년째 진행중이다.

인터뷰는 지난 달 28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사옥에서 했다. 그가 언론과 단독 인터뷰를 한 것은 5년만이다.

 -<배캠> 장수 비결이 뭔가요?
 “하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평소 농담삼아 하는 얘기인데 성실해서? 하하하. 또 건강이겠죠.”

 -건강관리를 위해 따로 운동이라도 하세요?
 “피트니스클럽에 다니긴 하지만 열심히 하진 않아요. 운동하지 않고 목욕만 할 때도 많고요. 유일하게 열심히 하는 건 골프예요.”

 -골프는 누구랑 치고, 몇 타나 치세요?
 “최백호 선배와 구창모·주병진씨 등과 주로 쳐요. 실력은 핸디캡 9정도예요(웃음). 다들 비슷해요.”

MBC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 진행자 배철수씨가 서울 상암동 MBC 사옥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l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MBC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 진행자 배철수씨가 서울 상암동 MBC 사옥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l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있어야 하는 게 속박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내내 음악하면서 너무 자유롭게 살아서 질렸나봐요. 그때는 그게 좋았는데, 막상 방송 시작하고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까 이게 더 잘 맞더라고요. 출근시간은 규칙적이지만 내적 자유를 많이 누리잖아요. 무엇보다 저는 이 일을 진짜 좋아해요. 전세계에서 히트하는 팝음악을 매일 듣고 좋은 사람과 얘기하고 좋은 글도 매일 읽으니까요.”

 -좋은 방송을 위해 철저히 자기관리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술·담배도 안하잖아요. 하루일과가 궁금해요.
 “오전 9시에 잠에서 깨 신문기사들을 읽은 후 11시 넘어 집에서 나와요. 점심은 주로 젊은 PD나 작가들과 먹죠. 오후 2시부터 <배캠> 주말 방송분을 녹화하고 화요일엔 <콘서트 7080> 녹화를 해요. 4시30분부터는 생방송 준비를 하죠. 오후 8시에 방송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혼자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요. 자정부터 새벽 2시 잠들기 전까지는 책도 읽고 유튜브로 공연실황도 보면서 온전히 저만의 시간을 보내죠. 운동하지 않고 쉬는 날엔 하루종일 집에서 뒹굴뒹굴해요(웃음).”

■가난이 부끄러웠던 소년…“영영 깨어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국전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18일생이다. 평안남도 평원 출신으로 해방 직후 월남한 그의 아버지는 남한에서 결혼해 배철수씨와 철호(전 SBS 제작본부장) 형제를 낳았고, 군납업에 뛰어들어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배철수씨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사업이 실패하면서 가정형편은 곤두박질쳤다. 빚쟁이들을 피해 1년이 멀다하고 단칸 셋집을 옮겨 다니느라 배철수씨는 초등학교를 3군데나 다녀야 했다. 이때부터 소년의 꿈은 하루빨리 어른이 돼 돈을 벌어 가족이 살 수 있는 집을 사는 것이었다.

가난은 소년을 비관적으로 만들었다. 우울감과 열등감. 이 두 가지 감정이 소년의 일상을 지배했다. 배씨는 “하루 중 제일 행복한 시간은 잠들때였다”며 “이대로 영영 깨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송골매’ 시절의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광대뼈가 튀어나온 깡마른 얼굴, 헝클어진 듯 뻗친 긴 머리, 비쩍 마른 몸, 표정없는 얼굴을 먼저 떠올릴 지도 모른다. 그의 외모에서 20대 젊은이들에게서 풍기는 싱그러운 에너지보다 결핍이 먼저 느껴졌다면, 이같은 성장과정이 영향을 끼쳤을 게 틀림없다.

1978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그룹 ‘활주로’로 활동하여 은상을 받는 배철수씨.ㅣ경향신문 자료사진

1978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그룹 ‘활주로’로 활동하여 은상을 받는 배철수씨.ㅣ경향신문 자료사진

 -얼마나 어려웠나요?

 “중학생일 때 어머니가 동생과 제게 아침에 나눠준 10원짜리 삼립빵 하나를 먹고 점심은 굶었어요. 2년간 도시락을 싸가지 못했거든요. 겨울이면 난로 위에 올려진 도시락 냄새가 제겐 고통이었어요. 점심 시간이면 혼자 밖으로 나가 앞산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죠. 교복 살 돈이 없어 1학년 때 구입해 입은 동복을 졸업할 때까지 입어야 했는데 그때는 그게 몹시 부끄러웠어요. 여학생이라도 마주치면 여기저기 안기운 데가 없는 깡총한 교복을 입은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얼른 길을 건너 몸을 피하곤 했어요.”

 그 시절, 친구 집에서 우연히 들은 브라이언 하이랜드(Brian Hyland)의 ‘Sealed With a Kiss’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그를 팝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는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고 회상했다. 그는 당시 최동욱씨가 진행한 동아방송의 <3시의 다이얼>, 윤형주씨가 진행한 <0시의 다이얼> 등을 통해 팝음악에 대한 허기를 채웠다.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짓눌러온 열등감도, 가난을 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슬픔도 이 때 만큼은 잊을 수 있었다. 그는 독학으로 익힌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했다.

 그는 고교 진학을 포기하려 했다.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 생각이었다. 친구들에게 “나는 기술을 배우러 갈 테니, 어른이 돼 다시 만나자”고 말한 후 부모님께 결심을 털어놨다.

 “아버지는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셨어요. 암묵적 동의였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요즘 세상에 고등학교도 못나와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말도 안된다’면서 펄쩍 뛰셨어요. 그래서 마음을 바꿨죠. 고등학교에 진학해 아버지 고향 친구분 집에 얹혀 살게 되었는데 중학생 때보다는 사정이 조금 나아졌어요.”

 -사춘기였던 만큼 자칫 어긋날 수도 있었을 텐데, 잘 극복하셨군요.
 “여러 번 빗나갈 뻔했죠. 그러고보면 운명이란 게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여러 가지 안좋은 일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어찌어찌 대학까지 졸업하고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까요.”

록밴드 ‘송골매’는 ‘처음 본 순간’ ‘모두 다 사랑하리’ ‘어쩌다 마주친 그대’ 등 1980년대에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록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ㅣ 경향신문 자료사진

록밴드 ‘송골매’는 ‘처음 본 순간’ ‘모두 다 사랑하리’ ‘어쩌다 마주친 그대’ 등 1980년대에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록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ㅣ 경향신문 자료사진

 -청소년기에 겪은 가난의 경험이 이후 삶에 안겨준 선물이 있다면 뭘까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잖아요.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예전엔 밥도 굶고 산 적 있는데’ 하면서 별 일 아닌 것처럼 생각되죠.”

■활주로 그리고 송골매

그는 1972년 한국항공대 항공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국립대학이라 등록금이 없고, 취업이 잘되는 학과여서 선택했다. 입학과 함께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교내 밴드동아리 ‘활주로’ 신입멤버 모집공고였다.

 “아유, 그게 너무 재미있는 거에요. 일렉트릭 기타도 치고…. 대학생활 내내 수업을 무지하게 빼먹고 음악만 했어요”

 학점이 좋을리 없었다. 정상적인 졸업이 불가능했던 그는 제적을 피하기 위해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했다.

1991년 5월 MBC 라디오 녹화 스튜디오에서 배철수씨가 내달 아내가 될 박혜영 PD와 웃고 있다. ㅣ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1년 5월 MBC 라디오 녹화 스튜디오에서 배철수씨가 내달 아내가 될 박혜영 PD와 웃고 있다. ㅣ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 학기만 쉬고 복학하려 했어요. 그런데 휴학하자마자 바로 입영 통지서가 날라오더라고요. 원래는 무사히 졸업해 공군장교가 되려고 공군 ROTC까지 했는데…. 전혀 다른 인생을 살 뻔했죠.”

 3년6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후 ‘활주로’는 세상에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했다. 1978년 제1회 해변가요제에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를 부르며 데뷔했다. 여기서 인기상을 수상했고 한 달 뒤 열린 대학가요제에선 ‘탈춤’으로 은상을 받았다.

 이듬해인 1979년 그는 록밴드 ‘송골매’를 결성했다. 이후 1982년 구창모 등 홍익대 ‘블랙테트라’ 멤버들을 영입, 보컬 및 기타 주자로 활동했다. ‘송골매’는 ‘처음 본 순간’ ‘모두 다 사랑하리’ ‘어쩌다 마주친 그대’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1980년대 록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1990년 9집 앨범 <모여라>를 끝으로 ‘송골매’는 해체됐다.

 -돈도 많이 벌었겠네요? 어린시절 꿈이었던 가족의 집 마련도 이뤘나요?

 “그랬어요. 1984년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방 세 칸짜리 25평형 연립주택을 4000만원 주고 샀어요. 동생과 제가 번 돈을 합해 샀죠. 처음 내 집, 내 방에서 두 발 쭉 뻗고 누워있는 느낌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어요.”

 -콧수염을 기른 것도 이맘 때죠. 왜 기르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면도를 하고 거울을 봤는데 제 얼굴이 너무 뺀질뺀질해 보이더라고요. 수염을 길러봤죠. 그런데 이번엔 너무 지저분해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턱수염만 깍아봤더니 괜찮은 거예요. 그 뒤로 죽 콧수염만 길렀죠. 여자들은 안 좋아하더라고요(웃음).”

 -군부독재시대에 대학생활을 했고 저항의 음악인 록을 했어요. 시국문제엔 관심이 없었나요?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학생운동을 한 친구들에게 부채감을 갖고 있어요. 그 친구들이 노력해서 민주화를 이뤘으니까요. 저는 그저 제 음악하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거기에 0.1%의 힘도 보태지 않았어요.”

 -김민기, 양희은씨 등 당시 많은 젊은 뮤지션들은 음악으로 시대에 저항했는데요.

 “(생각에 잠기더니) 모르겠어요. 별로, 신경을 안 썼던 것 같아요. 그 분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게 된 것도 나중의 일이에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쪽에선 아웃사이더로 산 거죠.”

1991년 6월 배철수·박혜영씨의 결혼식에 조영남씨 등 연예계 선후배들이 축하를 해주고 있다.ㅣ경향신문 자료사진

1991년 6월 배철수·박혜영씨의 결혼식에 조영남씨 등 연예계 선후배들이 축하를 해주고 있다.ㅣ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른바 ‘넥타이부대’까지 거리로 쏟아져 나온 1987년 6·10항쟁 때는요?

 “그때도 심정적 동조는 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어요.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말도 있는데….”

 -지금도 정치적 발언은 잘 안하시죠?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제가 그런 발언 안 해도 사회적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할 일은 열심히 일하고 퇴근하는 청취자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농담 한번씩 날려서 피식 웃게 함으로써 하루의 피로를 잊게 해드리면 좋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제가 가진 재능을 사회를 위해 쓰는 것이라고 믿거든요. 또 후배들이나 젊은 친구들이 제 얘기나 제 프로그램을 들으며 좀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다면 제겐 굉장히 보람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이 대목에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좌우의 중간, 즉 중도성향”이라고 밝혔다.

 “제가 머리색깔도 회색(은발)이잖아요. 제가 늘 주장하는 게 ‘나는 회색분자다’예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그런데 보수쪽에 있는 친구들은 저더러 좌파라 하고, 아주 진보적인 사람들은 우파라고 하더라고요. 전체적으로 봤을 때 오른쪽에 서 있어도 더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보면 그는 좌파인 것이고, 왼쪽에 서 있더라도 더 극단에 가 있는 사람의 눈엔 우파인 것이죠. 저는 중간에 서 있으려고 노력해요.”

 -무조건 한쪽 진영의 얘기를 추종하는 게 아니라 사안에 따라 판단을 달리한단 말씀이시죠?

 “당연하죠. 이를테면 영남에 살면 보수, 호남에 살면 진보인 게 아니잖아요. 사안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 있는 거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것에는 굉장히 진보적인 생각을, 또 어떤 사안에 대해선 보수적인 판단을 할 수 있거든요. 방송하는 사람이 어떤 정치적 편향성을 띠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제주에 내려가 소박한 삶을 살면서 동물권과 환경, 사회적 약자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이효리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기특한 것 같아요. 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닌데 작년에 음반 낸 후 <배캠>에 출연한 적이 있어요. 그때 인터뷰하면서 ‘이 친구가 참 잘 나이들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걸그룹 출신이자 패션아이콘으로 굉장히 화려하게 살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도 기타 치는 털털한 남편 만나 제주도에 터를 잡고 콩도 심으면서 그렇게 사는 게 좋아보이더라고요.”

 -이효리씨는 정치적 발언도 많이 하잖아요. 그것도 기특하세요?

 “용기 있는 거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보면 저는 나이 들어 노회한 것이고, 비겁하기도 하고….”

■“송골매 재결성 논의…배캠, 마무리 잘 하고 싶다”

 화제를 돌려 가족 얘기를 꺼냈다. 그의 아내는 MBC 라디오국 박혜영 부국장(54)이다. 1990년 <배캠>의 첫 PD와 DJ로 만난 두 사람은 1991년 결혼했다. 슬하엔 한 달여 전 해군 만기 전역한 대학생 큰아들과 고교 2학년생인 작은아들이 있다. 건축공학을 전공하는 큰아들은 군 입대 전 연세대 록밴드 ‘소나기’에서 기타를 쳤다.

 -큰아들이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았나봐요. 계속 음악을 하겠다고 하면 허락할 거예요?

 “제가 보기에 재능이 그리 있는 것 같진 않아요. 뭐, 자기가 하겠다면 어떻게 말리겠어요? 하지만 스스로 안 할 거예요. 다른 사람의 연주를 들으면 재능이란 게 어떤 것인지 알거든요.”

 -부인은 결혼 전 배철수씨의 어떤 점에 매료됐다고 하던가요?

 “와이프는 저하고 얘기해보니까 괜찮은 사람인데 너무 거칠게 살다보니 피폐해진 게 아닌가 생각했다고 해요. 그래서 자기가 좀 도와주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젊을 때는 늘 화난 사람처럼 인상 쓰며 다녔잖아요. 저도 이 여자와 결혼하면 좀더 나은 사람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내는 어머니와 선생님 빼고 제가 만난 여자 중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어요. 같이 살면서 배운 점도 많았고요. 둘도 없는 친구죠.”

 -방송국에서 마주치면 어색하지 않아요?

 “서로의 직장인 만큼 회사에선 거의 남처럼 지내요.”

 -구창모씨는 요즘 뭐하며 지내요?

 “사업도 하면서 노래 부르러 행사도 다니는 것 같아요. 사실 그 친구도 (송골매 재결성을) 기다리고 있는 거죠.”

 -뭘요?

 “송골매 재결성이요. 아주 늦기 전에 해보자고 같이 얘기는 했어요. 언제가 될진 모르겠어요. 일단 방송을 접어야 할 수 있으니까. 얼마 전 폴 매카트니 내한공연이 있었잖아요. 폴 매카트니가 42년생이니까 저보다 11살이 더 많아요. ‘그분은 70 넘어서도 하는데 우리가 너무 늦은 건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송골매가 재결성되면 옛 멤버들이 다 모이는 것인가요?

 “그럼요. 세상을 뜬 친구도 있지만 나머지 멤버는 부르면 다 올 거예요.”

 -<배캠>도 30년은 채우셔야죠.

 “오래하고 싶지 않아요. 미련이 남을 때 그만두고 싶거든요. 기간이 아니라 얼마나 좋은 느낌으로 방송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니까요. 사실 <배캠> 20년이 가까이 됐을 때는 20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어요. 세계여행도 가고 이후엔 책을 쓰며 살아볼까 생각했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좋았던 나잇대는 언제였어요?

 “40대였던 것 같아요. 그때까지는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나름 경험과 여유가 있었으니까요. 50대도 그렇게 나쁜 나이는 아닌데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더라고요(웃음). 사실 제가 인터뷰도 안 하려고 하는 게, 지금 <배캠>과 <콘서트 7080>도 제 체력의 한계치에 와 있기 때문이에요. 여기에서 뭘 하나 더 하면 급 피곤해지거든요.”

 -나이 듦이 주는 행복도 있지 않나요?

 “어떤 것에 바로 혹하지 않는 것? ‘올드 앤 와이즈(Old and Wise)’라는 제목의 곡이 있듯, 젊을 때는 늙으면 지혜로워질 줄 알지만, 제가 막상 나이 들고 보니 그렇지 않은 경우도 참 많더라고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다만 흉내라도 내보려고 노력중이죠.”

 -좋은 디스크자키의 덕목은 뭐라 생각하세요?

 “사실 저도 몰라요. 어떻게 하면 방송을 잘 할 수 있느냐고 묻는 후배들에게도 그렇게 말해요. 다만 지엽적인 충고는 해주죠. 방송에서 거짓말하지 말라고요. 자기는 무슨 말을 했는지 잊어도 청취자들은 다 기억하거든요.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지 말란 말도 해요. 둘 다 발각되는 순간 신뢰를 잃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음악 프로그램 진행을 맡으려면 기본적으로 음악을 좋아하고 뮤지션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야 합니다.”

 정오에 만났는데 시계는 어느덧 오후 9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날 녹음과 생방송, 인터뷰로 목을 많이 사용한 그도 쉬어야 했다. 끝으로 바람을 물었다. 그는 “거창한 것은 없고 25년째 하고 있는 <배캠> 마무리를 잘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까운 지인들과 결성했다는 ‘호상(好喪)클럽’ 얘기를 들려줬다.

 “저보다 나이드신 분들이 들으면 ‘큰일날 놈들’이라고 하시겠지만, 나름 재미나게 살았으니, 내일 죽어도 호상인 사람들의 모임이에요. PD도 있고, 학교 동창도 있죠.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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