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역사

'마음이 고와야 여사(女史)지

|경향신문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예로부터 규문(閨門·부녀자들이 거처하는 곳) 안의 일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은 여사(女史)가 없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깊은 궁궐에서 거처하므로 그 하는 일을 바깥 사람이 알 수 없습니다.”

중종 14년(1519년), 동지사 김안국과 장령 기준 등이 잇달아 임금에게 아뢴다.

“따라서 여사가 있으면 비록 구중궁궐 속, 혼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라도 소홀히 넘어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여사를 두어 그 선악을 기록하게 하면….”

■중종이 말꼬리를 돌린 까닭

한마디로 일과시간은 물론 은밀한 사생활까지,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서에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금으로서는 귀찮기 이를 때 없는 간언이었다.

“옛날엔 여자들이 모두 글을 지을 줄 알았지만 지금은 글에 능한 여자가 없으니 기록할만한 사람을 얻기가 어려울텐데….”

조선시대 사관가문으로 유명한 광주 이씨의 승정원 사초.  승정원사초는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는 데 원고격인 사초(史草)이다. 이담명(李聃命.1646-1701)이 승정원과 춘추관에 재직하던 1672(현종13년)-1675년(숙종원년)에 손수 기록한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조선시대 사관가문으로 유명한 광주 이씨의 승정원 사초. 승정원사초는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는 데 원고격인 사초(史草)이다. 이담명(李聃命.1646-1701)이 승정원과 춘추관에 재직하던 1672(현종13년)-1675년(숙종원년)에 손수 기록한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중종은 하기 싫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하지만 김안국 등은 물러서지 않았다.

“여사가 반드시 글에 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보는 그대로만 기록하는 수준이면 됩니다. 그러면 후대의 사람들이 ‘아! 선왕이 사생활 공간에서도 잘못한 바가 없었구나’ 하고 느낄 겁니다. 밖에는 시종과 사관을 두고 있으면서 안(규문)에서는 여자 사관이 없으니, 이는 정치의 도에서 큰 결격사유 입니다.”

시강관 이청은 한술 더 떴다.

“언문(諺文)으로 기록해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꼭 문자(文字·한문)으로만 기록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쯤되니 임금의 논리가 몹시 군색해졌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여자 사관도 선악을 구별해서 기록해야 햔다. 그러니 반드시 마음이 올바른 여자라야 할 수 있다.(必正之女 然後可而) 사필(史筆)은 아무나 잡는 것이 아니다.”

이 대목에서 불현듯 가요 가사 생각이 난다. 남진의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라는 노래가…. 신하들의 집요한 공세에 중종은 그만 “마음이 올바른 여자라야 여사를 할 수 있다”는 실언을 하고 만 것이다. 지금이라면 ‘남녀차별 발언’이라고 공격받을 일이다. 신하들이 “여사는 규중 안에서 임금의 일상생활을 기록할 뿐”이라고 계속 고집을 피우자, 화제를 돌려버린다. 엉뚱한 얘기를 꺼내면서 되레 신하들을 꾸짖는다.

“그런데 어진 이를 천거하는 것이 대신의 직임이거늘, 최근 대신들은 소임을 다하지 않는 것 같구나.”

곤란하니까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로 화살을 피한 것이다. 신하들은 여자사관을 두는 문제를 이후에도 끈질기게 제기했다. 하지만 ‘사생활 침해’를 우려한 임금의 반대에 번번이 벽에 부딪쳤다. 그런데 중종이 누구신가. ‘여사’ 논란이 일기 11년전인 1508년 승정원과 예문관에 뜻깊은 선물을 내린 분이 아닌가. 붓 40자루와 먹 20홀…. 그러면서 이른 말이….

“이 붓과 먹으로 모든 나의 과실을 숨김없이 마음껏 쓰도록 하라.(以是筆墨 凡吾過失 百書無隱)”

그랬던 분이 막상 여사논란이 일자 마음을 바꾼 것이다. 하기야 임금의 일거수일투족, 즉 은밀한 사생활까지 빠짐없이 쓰겠다는 것이니 어느 임금이 좋아할까.

■지독한 직필 삼형제

대대로 임금이 사관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역사가의 기본자세는 공자가 춘추를 쓰면서 견지했다는 ‘춘추필법’이다, 즉 객관적이면서도 엄정한 비판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는 것이다. 특히 옳고 그름을 엄정하게 가리는 ‘포폄(褒貶)’은 춘추필법의 정신이다. 공자는 이같은 역사서술 원칙은 “난신적자들을 두렵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못박았다.

직필의 모범사례를 하나만 꼽아보자.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장공 6년(기원전 586)의 일이다. 호색한인 장공은 신하 최저의 부인을 유혹하다가 그만 최저에게 살해 당했다. 최저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런데 제나라 사관은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崔저弑莊公)”고 기록했다. 최저는 사관을 죽였다. 그러자 사관의 동생이 나타나 다시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고 썼다. 최저는 동생까지 죽였다. 이번에는 사관의 막내동생이 나와 역시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고 기록했다. 천하의 최저라도 막내동생 만큼은 어쩌지 못했다. ‘지독한 직필 삼형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전통이 있으니 조선의 임금들도 끈질기에 따라붙는 사관을 몹시 싫어했다.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1401(태종 1년), 임금이 편전에서 정사를 펼치는데 사관 민인생이 들어왔다. 임금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이곳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다. 그러니 편전에는 들어오지 마라.”

민인생은 한치의 거리낌이 없었다.

“편전이라 하지만, 대신들이 정사를 아뢰고, 강론을 펼치는 곳인데 사관이 들어오지 못하면 어떻게 기록한단 말입니까.”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신이 만일 곧게 기록하지 않는다면, 신의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臣如不直 上有皇天)”

즉 “사관 위에는 하늘이 지켜보고 있으니 곧게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직필의 역사가가 아닌가.

태종이 누구인가. 1, 2차 왕자의 난으로 엄청난 피를 묻히고 막 왕위에 오른 무시무시한 임금이 아닌가. 그런 태종도 민인생 같은 사관에게는 고양이 앞에 쥐였다. 태종 4년(1404) 임금이 노루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일어서면서 곧바로 했다는 말이 기가 막힌다.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勿令史官知之)”<태종실록>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도 역사를 두려워했다.

“임금이 두려워 한 것은 사서 뿐이다.(人君所畏者 史而已)”

바로 연산군이 한 말이다. 하지만 역사를 두려워 한 것은 좋았는데, 그만 역사를 감추려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 연산군의 다음 말을 보면 기가 찬다.

“사관은 시정만 기록해야지 임금의 일(사생활)을 기록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근래 사관들은 임금의 일이라면 남김없이 기록하려 들면서 아랫사람의 일은 감춰서 쓰지 않으니 그 죄 또한 크다. ~이제 사관에서 임금의 일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니 아예 역사가 없는 편이 낫다.”

역사가 무서우니 아예 없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지안의 통구(퉁거우) 사신총에 그려진 글을 쓰는 선인, 당시 이들을 사(史)라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지안의 통구(퉁거우) 사신총에 그려진 글을 쓰는 선인, 당시 이들을 사(史)라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앉아서 기록하렵니다.’

1489년(성종 20년) 8월27일 조정에서 재미있는 논쟁이 벌어진다. 검열 이주가 아뢴다.

“저희(사관)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들지 못합니다. 그러니 목소리만 듣고 용모를 보지 못하니 사람을 제대로 구별할 수 없습니다.~옛 역사서를 보면 ‘발연히 얼굴빛이 변했다’, ‘용모가 태연자약하다’,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성색(聲色)이 모두 노기를 띠었다’는 등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이주의 말은 “옛 사관들은 용색(容色)과 언모(言貌)를 모두 기록했는데 조선의 사관들은 땅에 엎드려 기록하니 매우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럼 서서 기록하겠다는 말이냐?”(성종)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중국의 사관들은 지필을 잡고 황제의 좌우에 선다고 했습니다만…. 땅바닥에 엎드려 기록하는 것은 옳지않다고 봅니다.”(이주)

대신들은 설왕설래했다. 고개를 빳빳히 쳐들고 기록하는 것도 버릇없는 짓이라는 주장과. 엎드려서는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그래? 그러면 앉아서 기록하도록 하여라”

임금은 나름대로 묘안을 짜낸 것이다. 이 때부터 사관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사관을 싫어한’ 성군 세종

“두려운 것은 역사 뿐”이라는 연산군의 말처럼 역대 임금들은 사관의 평가를 몹시 두려워했다.

그랬으니 사관이 대체 무슨 평가를 내렸는지, 또 내리고 있는지 보고 싶어 하고, 또 고치고 싶어했다. 태조 이성계가 대표적이었다.

1398년 윤5월1일, 태조는 “왕위에 오른 때부터 이후의 사초를 바치게 하라”고 서슬퍼런 명령을 내린다. 그러면서 “군주가 당대의 역사기록을 보지 못하는

경주 인용사지에서 발견된 명문목간. “대룡께서 왕께 아뢰길 ‘왕의 백성들이 흩어지던 차에 마음에 많이 걸리는 바가 있습니다.(大龍王中白主民渙次心阿多乎去亦在) 천거할 사람은 소귀공으로 나이 서른이고, 김후공은 서른 다섯입니다.(名者所貴公歲삽金(候)公歲삽五) 두 사람은 나이가 적당합니다.(是二人者歲○○亦在)”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학자들은 이 목간이 역사서를 쓰기위해 작성된 통일신라시대 사초라고 추정했다. |

경주 인용사지에서 발견된 명문목간. “대룡께서 왕께 아뢰길 ‘왕의 백성들이 흩어지던 차에 마음에 많이 걸리는 바가 있습니다.(大龍王中白主民渙次心阿多乎去亦在) 천거할 사람은 소귀공으로 나이 서른이고, 김후공은 서른 다섯입니다.(名者所貴公歲삽金(候)公歲삽五) 두 사람은 나이가 적당합니다.(是二人者歲○○亦在)”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학자들은 이 목간이 역사서를 쓰기위해 작성된 통일신라시대 사초라고 추정했다. |

것근 무슨 이유인가”라고 물었다. 도승지 문화가 대답했다.

“역사는 사실대로 써야 합니다. 만약 대신과 군주가 보게 된다면 사관은 숨기고 꺼려해서 사실대로 바로 쓰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태조의 명은 거역할 수 없었다. “임금이 보겠다는데 사관이 거역한다면 이는 신하의 도리가 아닐 것”이라며 “빨리 사고를 열어 사초를 남김없이 바치라”고 명했다. 사실 사초에 관한한 태조에게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사연은 이렇다.

조선개국 직후 개국공신 조준이 고려왕조의 사초를 읽어보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려말 사관인 이행이 “(고려의) 우왕과 창왕을 죽인 자는 바로 이성계”라고 지목한 사초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성계로서는 정통성에 큰 흠집으로 남을 기사가 역사(고려사)에 남을 뻔 한 것이다. 만약 고려왕조가 지탱되었다면 이성계는 왕을 2명이나 죽인 패륜의 대역죄인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이런 가슴 철렁한 기억을 간직했던 태조 이성계였기에 사관들의 사초를 일일이 검열한다고 나선 것이다.

최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통에 일가견이 있다는 세종이었지만 몇몇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는 윤대(輪對)에는 사관의 입시를 불허했다. 이에 1425년(세종 7년) 사간원은 “윤대할 때 반드시 사관을 참여시키도록 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임금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말년에는(세종 28년·1446)에 사관 정신석이 “사관이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항의했지만 “피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며 일축했다. 즉 세종은 정사를 의논할 때 제일 먼저 사관을 물리쳤으며, 이로써 사관은 한마디도 못했다.

■사초실명제가 뿌린 재앙의 씨앗

1469년 즉위한 예종은 <세조실록> 을 편찬하면서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쓰라고 명했다.

“사초에 이름을 쓰면 사관이 직필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었다. 장계이가 “안된다”고 직간했다.

“역사는 본디 직필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초는 국가의 일만 기록한 게 아니라 사대부의 선악과 득실을 모두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초에 실명을 기록한다면 사람들의 원망을 얻을까 염려하게 됩니다, 이로써 직필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논란 끝에 이 의견은 기각됐다. 이른바 ‘사초실명제’를 도입한 것이다. 그런데 이 제도가 장계이의 걱정대로 피바람을 불렀다.

사관 가운데 민수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사초를 쓰면서 대신들의 인물평을 적어놨다. 게중에는 특정 인물들을 혹평한 일이 많았다. 문제는 혹평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내로라는 대신들이 많았다는 점이었다.

예컨대 “윤사흔(尹士昕)은 술에 취하고, 임원준(任元濬)은 의술(醫術)로 관직(官職)을 임명받고, 양성지(梁誠之)는 탐오(貪汚)한 일이 있고….” 등등.

만약 당사자들이 이 인물평을 안다면 대신(大臣)들에게 원망을 살까 두려웠다. 민수는 드디어 동료 사관 강치성·원숙강 등과 함께 사초를 뽑아내 문제의 내용을 삭제·수정했다. 이렇게 사초를 수정한 것이 발각되자 문제의 민수는 제주 관노로 쫓겨났다. 민수는 임금(예종)의 세자시절 교육을 맡았던 서연관(書筵官)이었다. 즉 예종의 스승이었으니 극형을 면한 것이다. 그러나 민수에게 사초를 건네준 강치성과 원숙강은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를 ‘민수 사옥’이라 한다.

■“사서의 한 글자가 부월(斧鉞)보다 엄하다”

따지고 보면 몇몇 신하의 인물평을 슬쩍 고친 것에 불과한 것 치고는 너무 심한 벌을 받은 것은 아닌가. 하지만 중종 때 예문관 관리들이 올린 상소를 보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역사가 있은 뒤에 시비가 밝혀졌으며, 시비가 밝혀지자 공론(公論)이 사라지지 않았다 합니다.~ 그러므로 한 글자의 포폄(褒貶·평가)이 부월(斧鉞·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말)보다도 엄하고, 만세의 경계됨이 별이나 햇빛보다도 밝았습니다. 그러니 사관의 직책이 너무도 중하지 않습니까?”

이를 보면 늘 ‘역사’를 무서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사를 회피하려는 자는 사가의 ‘춘추필법’을 두려워하는 자이다.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자 ‘천하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 했다지 않은가. 또 하나. 사마천은 불후의 역사서 <사기>를 쓰면서 역사를 써야 하는 까닭을 밝혔다.

“지난 날을 서술하여 미래에 희망을 걸어본다.(故述往事 思來者)”

역사가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미래사의 거울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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