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주를 ‘멸종’시키려 한 일제···밀주를 만들며 저항한 조선 여성들

김종목 기자
1948년 일본 경찰이 도쿄의 재일조선인을 대상으로 밀주 단속을 벌이는 모습. 출처: 아사히그래프 1236호(1948.5.12),  리행리 도쿄경제대 전학공통교육센터 전임강사 제공

1948년 일본 경찰이 도쿄의 재일조선인을 대상으로 밀주 단속을 벌이는 모습. 출처: 아사히그래프 1236호(1948.5.12), 리행리 도쿄경제대 전학공통교육센터 전임강사 제공

수제 탁주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하나의 대항문화로 존재했다.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탁주는 ‘해방주’로도 불렸다.


리행리(도쿄경제대 전학공통교육센터 전임강사)는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의 밀주와 계속되는 식민지주의’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는 “재일조선인 여성들에게는 조선문화를 되찾는 탈식민지의 일과도 직결되어 있었다”고도 썼다.

‘밀주’가 왜 대항문화일까. 리행리는 일본 공권력의 탄압을 근거로 든다. 다음은 1947년 8월 1일 도쿄 재무국장이 세무서장 앞으로 보낸 ‘무면허 주류 밀조자에 대한 단속 강화에 관해’라는 문서 중 일부다.

“대규모 종류의 밀주 주조는 주로 조선인이 하고 있다. 종전으로 인해 조선인은 해방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유로 반동적으로 일본 국내의 질서를 방해하고 있으며, 이는 일반 민중에게 마치 조선인이 치외 법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리행리는 이 문건을 두고 ‘인종 프로파일링’을 지적한다. “식민지 해방으로 인해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조선인을 질서를 교란하는 민족으로 포괄적으로 단속해야 한다”는 인종 프로파일링은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관념’”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법적으로는 식민지지배가 종료된 후에도 조선인을 집단으로 감시 또한 단속의 대상으로 삼아 계층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주세법이나 식량관리법을 비롯한 경범죄를 구실로 하는 부분에서 계속되는 식민지주의의 교묘한 수법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권력층은 패전 후 재일조선인을 식량관리법 범죄나 주세법 범죄 같은 ‘암거래 근원’으로 지목해 민족적 속성에 근거한 단속을 실시했다. 리행리는 “그것은 당초 위반을 증명할 근거가 부족한 것이었다. 식량난 때문에 생긴 암거래 문제라는 매우 전 사회적인 문제가 식민지민으로 전화된 것이 자료적으로 밝혀졌다”고 했다.

그 근거 중 하나가 1948년 일본 세무당국이 조선인 집중 거주 지역을 ‘특정집단밀주주조지역’으로 감시한 사실이다. 지방 주세법 위반자를 단속할 때 조선인만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그해 한 재판에서 당시 오다테 세무서 간세과장이 “일본인에게 더 많은 영장을 발부해 수사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 당시에는 조선인만 주로 조사했기 때문에 그다지 생각하지 않았다”고 답한 일도 있다. 경찰은 일본인의 밀주는 눈감거나 압류한 쌀을 되돌려주기도 했다.

‘인종 프로파일링’은 해방 전에도 진행됐다. 1944년 8월에도 시즈오카 지방 검찰이 “반도인(半島人)의 집단적 암거래 또는 물자 획득 경향은 일반 민중에게 막대한 물자 부족감을 주며, 쌀과 보리 그리고 다른 식량 등의 암거래의 근원은 반도인에게 있기에 검거를 환영한다”고 했다. 리행리는 “당시 실제 데이터를 봐도 ‘조선인의 범죄성이 일본인에 비해 높다는 결론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의 ‘암거래’가 ‘일반 민중’에게 ‘물자 부족감을 부여’하는 원인이 된 것”이라고 말한다.

1948년 일본 경찰이 니가타 현 조선인 취락의 밀주 설비를 적발하는 장면. 출처: 위키피디아

1948년 일본 경찰이 니가타 현 조선인 취락의 밀주 설비를 적발하는 장면. 출처: 위키피디아

재일조선인을 표적으로 한 밀주 단속은 재일조선인이 무궤도(無軌道)나 불법자라는 낙인화된 이미지 형성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리행리는 본다.

일제 강점기에도 조선 술은 부정당했다. 1923년 관동 대지진 이후 재일 조선인의 통제와 억압, 황민화를 추진하기 위해 일본 전국에서 조직된 일제 협력 단체인 ‘협화회’는 “‘일본인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탁주를 ‘멸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행리는 가양주가 ‘비위생적’으로 취급하며 근대적 주조업의 위생적 우위를 거듭 강조된 일을 두고 “식민주의에 근거하여 일반 민중으로부터 술의 생산수단을 빼앗는 한편, 소수의 주조가들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는, 즉 양극화된 자본축적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리행리는 이 글에서 재일조선인 여성의 역할과 젠더 문제에도 주목한다. 해방 뒤에도 재일조선인 부락에선 여성을 중심으로 탁주를 계속해서 만들거나 조선민요를 부르는 등 조선문화를 유지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기혼자의 경우 배우자인 여성은 함께 영세한 노동을 찾아다녔고, 심지어 집에 돌아와서도 돌봄 노동을 부담했다. 주조를 포함한 요리나 육아, 그리고 간호를 오로지 여성이 전담하는 상황은 전통적 가부장제 속에서 지속되어 왔다.”

리행리는 “밖에서는 생활과 괴리된 그럴듯한 이론을 용감하게 주장하면서, 집안에서는 술을 마시고, 날뛰고, 아내에게 폭력까지 휘두르는 재일조선인 남성들” 문제도 지적한다.

해방 후 조선부녀총동맹이 남성들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다. “침을 튀길 정도로 열렬히 이론을 주장하는 남성들조차 이해가 있는 것 같아도 여전히 대부분 봉건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다.”

여성들은 일본공산당이나 재일본조선인연맹 일부가 부정했던 밀주 주조를 자발적으로 계속 이어갔다. 재일본조선민주여성동맹도 이를 응원하고 지원했다. 리행리는 “그것에는 평소 생활에 깊이 들어가 도움을 주고받는 여성들의 문화와 횡적 연계가 존재했다”고 말한다.

리행리는 이 글을 지난 26일 동국대 일본학연구소와 연립서가 출판사 주관으로 열린 ‘경계를 넘어 - 재일디아스포라의 역사와 초국가적 교류’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다.

서경식(도쿄경제대 명예교수)이 ‘나는 왜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를 쓰게 되었는가?’는 제목으로 초청 강연을 진행했다. 그는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널리 알린 이다.

서경식은 이 강연에서 디아스포라는 “국가의 비호로부터 ‘추방’당한 자라는 의미”이고, “힘이 없는 존재”라고 했다. 그는 “디아스포라는 시오니즘 같은 국가주의를 낳기도 했지만, 원래는 비무장, 비폭력적 존재”라며 이같이 정의했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6일 ‘나는 왜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를 쓰게 되었는가?’는 제목의 초청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연립서가 제공

서경식 도쿄경제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6일 ‘나는 왜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를 쓰게 되었는가?’는 제목의 초청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연립서가 제공

“이런 의미에서 재일조선인 역시 분명히 ‘무력(無力)한’ 사람들입니다. 국가들이 무력(武力)을 경쟁하는 지금 같은 국면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디아스포라가 현재의 고통스러운 처지에서 버텨내고 살아남는 일이 가능하다면, 인류사의 미래상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일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런 날은 과연 올 수 있을까요?”

이날 심포지엄에서 강여린(동국대 일본학연구소 전문연구원 )은 ‘인권과 재일조선인의 북한송환’, 하야오 다카노리(도쿄경제대 도쿄경제대학 전학공통교육센터 교수)는 ‘서경식의 비평활동- 유대인의 회화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지식인과의 대화를 중심으로)’, 신민정(가천대 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은 ‘그림에 미친 자들에 대한 소고 ― 사에키 유조와 야마다 신이치의 월경’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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