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에 대한 일본의 두 시선

송윤경기자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비정규직에 대한 일본의 두 시선

#1. “퇴근시간 이후의 업무지시는 계약사항에 없습니다! 그럼 전 이만.”

오후 6시를 갓 넘긴 시각, 이 한마디를 남기고 회사 문을 나서는 파견사원이 있다. 야근 및 회식 사절, 시급 3000엔 이하의 계약도 사절. 상사 눈치를 봐야 하는 다른 비정규직과는 차원이 다르다.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비정규직에 대한 일본의 두 시선

#2. 1920년대 캄차카 반도 부근의 차가운 바다. 게를 잡아 통조림으로 가공하는 ‘게공선’에서 한 남성이 시신으로 발견된다. 감독이 게으르다는 이유로 며칠 동안 화장실에 가둬놓은 노동자였다.

게공선 노동자들은 폭풍우 속에서 “하반신이 없다”고 느낄 만큼 오래도록 서서 일해야 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이들은 파업을 감행하지만, 일본제국의 해군에 의해 간단히 진압된다. “우리에겐 우리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느낀 노동자들은 다시 저항하기로 마음먹는다.

자기 책임이다, 사회 책임이다

파견직의 삶을 주제로 한 TV드라마가 히트를 치고, ‘파견’이란 말은 나오지도 않지만 지금의 파견직 이야기나 다름없다며 80년 전의 소설에 열광한다. 비정규직이 넘쳐 나는 일본사회의 단면이다.

첫 번째는 2007년 방영된 TV드라마 <파견의 품격>이고, 두 번째는 지난해 55만부가 팔리면서 ‘게공선 현상’까지 불러온 소설 <게공선>의 일부 내용이다. 두 작품은 비정규직의 고달픈 현실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두 가지 마음’을 보여준다. < 위 # 1, # 2 참조 >

TV드라마 <파견의 품격>은 평균시청률 20.1%를 기록하는 등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인기 요인은 판타지와 사실성의 묘한 조합에 있었다.

정리해고를 당한 뒤 파견사원이 되어 10년 동안 열심히 일한 덕에 ‘슈퍼 파견’에 이른 주인공 하루코의 이야기는 판타지에 가깝다. 하지만 고용불안에 떨며 주인공을 부러워하는 ‘후배’의 이야기는 ‘리얼‘하다.

이 드라마는 ‘노력하면 하루코처럼 될 수 있다’는 논리를 주입한다는 점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사회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임을 암시한다. ‘노력만 한다면 곤궁한 처지를 극복할 수 있으며, 현재의 빈곤은 노력을 덜한 탓’이라는 자기책임론이 일본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게공선에는 자기 책임론이 없다는 점에서 비정규직 사회를 보는 일본인의 다른 시선이 드러난다. ‘워킹푸어, 이거 혹시 게공선 이야기 아닌가요’. 도쿄의 한 서점 점원이 서가 한쪽에 꽂아둔 작은 광고팻말의 힘은 셌다. ‘현재의 워킹푸어 이야기와 닮았다’는 입소문을 타고 게공선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2차대전 무렵 쓰여진, 읽기 힘든 ‘프롤레타리아 문학’이었는데도 그랬다.

게공선 속 노동자들은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고된 노동에 시달리지만 저항할 생각을 쉽사리 못한다. 찢어지게 가난한 현실은, 그들을 게공선 속으로 자꾸 밀어 넣는다. 이를 두고 일본인들은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동시에 저항할 힘조차 갖지 못한 현재의 워킹푸어’와 닮았다고 느낀 것이다.

소설에 담긴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의식과 ‘연대해 저항하자’는 메시지는 자기책임론·자기계발론에 익숙했던 일본인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고 곧 열광으로 이어졌다. 일본인들은 게공선 독후감을 모은 책 <우리는 어떻게 게공선을 읽었나>까지 베스트 셀러로 만들었다. 저자 고바야시 다키지가 소속됐던 공산당의 청년층 가입자는 게공선 붐 이후 1만명이나 늘었다.

인식변화의 원동력은 비정규직 현실의 변화였다. 1999년 정규직에 버금갔던 비정규직의 업무 만족도가 10년 사이 크게 떨어지고 있었다. 후생노동성의 조사에 따르면 비정규직의 ‘업무내용, 보람’ 등의 만족도가 1999년엔 50.1%였다가 2003년엔 49.1%로, 2006년엔 22.2%로 떨어졌다. 임금만족도는 1999년 정규직보다 약 10% 높았지만 2006년엔 정규직보다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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