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포럼

“수십년 믿어온 녹색성장은 불가능”…탈성장을 모색하다

이창준 기자

‘한계’에 직면한 세계

유럽의회·세계경제포럼 등
인류 번영을 위한 대안 논의

3.0%.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 4월 전망한 5년 뒤 중기 세계 경제성장률이다. IMF가 이 지표를 집계하기 시작한 1990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올해 세계 경제가 2.8% 성장한 뒤에도 상당 기간 비슷한 수준의 침체 흐름이 이어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나마 개발도상국은 3%대 후반의 성장을 기록하지만 선진국 성장률은 1%대 후반, 한국은 2%대 초반으로 예측했다.

세계 경제가 장기 침체 국면에 접어들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인류가 새로운 방식으로 공존과 번영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최근 50년간 거듭해온 고성장 추세를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무리하게 성장에 매진했다가는 인류와 지구가 재앙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대사 ‘이러다가는 다 죽어’라는 호소와 다르지 않다. 지난 수세기 성장을 추구한 결과 초래된 기후변화와 양극화 등 부작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 50년 전 성장 경고…바뀐 것 없어

국제사회에서 성장의 한계를 처음 거론한 것은 50여년 전 ‘로마클럽’이었다. 로마클럽은 세계 유수의 학자와 기업가, 정치인 등이 모여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논의하는 비영리 연구기관으로 1968년 발족했다. 출범 4년 만인 1972년 3월, 경제 성장과 환경의 관계를 설명한 연구보고서 <성장의 한계>를 발표하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성장 신화에 물음표를 던졌다.

<성장의 한계>는 인구 급증과 급속한 공업화, 식량 부족 등 당시 인류에게 닥친 위기 요인을 조목조목 짚었다. 인류가 그간의 성장 방식을 고수한다면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 등으로 인해 100년 내에 경제 성장이 멈출 것이라고 지적했다. 새로운 방식을 찾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경고한 이 보고서는 <성경> <자본론> <종의 기원>과 더불어 인류가 남긴 가장 중요한 책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성장 사회를 향한 로마클럽의 경고는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달리는 성장을 멈출 수는 없었다. 보고서가 발간된 뒤 반세기 동안 세계 경제는 성장 지상주의를 고수하며 더 빠른 속도로 몸집을 불려 왔다. 보고서의 저자 중 한 명인 데니스 메도스 전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최근 “인류는 성장 속도를 늦출 기회가 있었지만 지난 50년 동안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보고서의 예고 시한이 절반가량 남은 현재, 세계 경제는 거대한 저성장 늪에 빠져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다만 최근 유럽을 중심으로 50년 전 경고 메시지를 환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성장, 효과 없고 가능하지 않아”

유럽의회는 지난달 15~17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성장을 넘어(Beyond Growth) 2023 콘퍼런스’를 열었다. 20명의 유럽의회 의원이 주도해 개최한 콘퍼런스에서는 150명이 넘는 전문가들이 열띤 토의를 벌였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 팀 잭슨 서리대 교수 등 주요 학계 인사와 반다나 시바 등 환경활동가, 유럽 각국의 기업인과 정책 입안자들이 참석했다.

콘퍼런스에서는 인류가 계속 번영하려면 성장 이외의 방식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로 제시됐다. 특히 인류 존속을 위한 ‘탈성장’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거론됐다. 50년 전 <성장의 한계>가 지속 가능한 성장을 얘기했다면,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간 논의였다. 참석자들은 50년 전에 비해 그만큼 상황이 훨씬 더 악화됐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지속 가능한 성장 방식으로 여겼던 ‘녹색성장’ 역시 지구 환경을 해칠 수 있어 미래의 대안이 되기는 역부족이라고 지적했다.

프랑스의 사회과학자 티머시 패리크는 콘퍼런스에서 “몇십년 동안 우리는 녹색성장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성장하면서도 동시에 환경을 덜 오염시킬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났다”며 “인류가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한 상태”라고 말했다.

유럽의회 의원이자 환경운동가인 마리 투생도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며 “(성장 추구는) 인류와 다른 많은 종들의 생존을 위험에 빠뜨리고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 높아지는 ‘성장 넘어’ 목소리

주요 국제기구나 비영리 민간단체들도 결은 조금씩 달라도 성장의 대안과 관련된 논의를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다보스포럼’으로 유명한 국제 민간 협력기구인 세계경제포럼(WEF)은 지난달 2~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성장 서밋(The Growth Summit) 2023’을 열었다. 세계화 과정에서의 지속 가능성과 경제적 형평성, 기술 발전과 노동의 미래, 공정한 녹색 전환 방안 등을 논의했다. 유럽의회가 개최한 콘퍼런스와는 달리 탈성장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다.

국제 학술·시민단체 ‘디그로스(Degrowth)’는 ‘제9회 국제 탈성장 콘퍼런스’를 오는 8월29일부터 4일간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개최한다. 디그로스는 생산과 소비를 줄여 인간의 복지를 높이고, 지구상의 생태적 환경과 형평성을 향상시키는 지속 가능한 탈성장을 지향하는 단체다.

2008년 파리에서 개최된 제1차 탈성장 콘퍼런스에서 탈성장 용어를 처음 등장시켰다. 올해 콘퍼런스는 탈성장의 구체적 실천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로 사이토 고헤이 도쿄대 교수, 칼린 둘란 자다르대 교수 등이 참석한다.

성장의 한계를 지적하는 다양한 학술 연구도 최근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20년 <성장을 넘어 새로운 경제적 접근을 향해(Beyond Growth Toward a New Economic Approach)> 보고서를 내고 ‘경제와 사회 발전에 대한 새로운 개념(A new conception of economic and social progress)’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오늘날 세계가 맞이한 경제위기는 단순히 기존 정책의 점진적인 변화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로마클럽은 지난해 <성장의 한계>의 후속작 <모두를 위한 지구: 인류를 위한 생존 가이드>를 발간하고 21세기에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탈탄소화’와 ‘탈물질화’라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래에 지구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친환경 기술을 확대하는 것 외에 소비 자체를 줄여야 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한국, ‘성장지향’ 정책 주력
저성장 환경에 대응책 필요

■ 한국은 아직도 ‘성장 시계’ 속

성장 너머 다양한 대안을 찾기 위한 움직임이 세계 곳곳에서 부각되고 있지만 국내에서의 논의는 아직 미진한 상태다. 국책 연구기관이나 학계의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시민사회단체와 종교계 주최 포럼 등을 중심으로 탈성장론 등이 일부 제시되고 있다.

정부는 민간기업 투자와 기술 개발을 장려해 국내총생산(GDP)으로 대변되는 경제성장률을 더 높이겠다는 목표에만 주력하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발표한 ‘신성장 4.0’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연내 20건이 넘는 법안을 제·개정하겠다고 밝혔다. 신성장 4.0은 농업·제조업·정보기술 산업 중심으로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성장지향적 경제정책이다.

한국은 2021년 선진국에 편입됐는데, 지금까지 고성장세를 지속해온 점이 오히려 탈성장론 논의에서 보수적인 태도를 갖게 한 측면이 있다.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은 주류, 비주류 경제학 모두 탈성장 담론을 공상적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며 “유럽 국가들은 (성장이 정점에 이른 뒤) 상당히 긴 시간 저성장 기조를 유지해온 것에 반해 한국은 비교적 높은 성장률을 보여왔기 때문에 저성장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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