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 시대 ‘흔들리는 경제’…대출로 대출 막는 가계·기업 ‘경제 시한폭탄’

이윤주 기자

곳곳서 ‘돈맥경화’ 위험 신호

서울 서초구의 한 시중은행 지점 입구에 전세자금대출과 직장인신용대출 안내문구가 붙어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2일(현지시간) 자이언트스텝(한 번에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올리는 것)을 단행할 경우 대출금리는 또 큰 폭으로 오를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

서울 서초구의 한 시중은행 지점 입구에 전세자금대출과 직장인신용대출 안내문구가 붙어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2일(현지시간) 자이언트스텝(한 번에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올리는 것)을 단행할 경우 대출금리는 또 큰 폭으로 오를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

변동금리대출 비중 높은 한국
금리 인상은 부채 부담 가중시키고
소비 감소로 이어지며 경제 위축

고금리와 과도하게 팽창한 부채는 공존하기 어렵다. 금융위기를 거치면서도 디레버리징(부채축소)을 경험해본 경험이 없는 한국의 민간 부채가 고금리 시기를 맞아 위기감을 키우고 있다.

금리가 급격하게 오르는 과정에서는 전체 차주(대출받은 사람)의 이자 상환부담이 늘어나고, 특히 변동금리대출 비중이 높은 한국은 금리 인상에 더 취약한 구조다. 부채가 부실화할 가능성이 우려되는데 다중채무 청년층, 저소득 자영업자, 한계기업 등이 가장 먼저 벼랑 끝에 내몰릴 수 있는 대상으로 거론된다. 빚부담이 늘면서 소비가 줄고, 이어 실물경제가 위축되는 연쇄효과도 불가피하다.

최근 채권시장 경색에서 나타나는 단기 유동성 위기, 신용 위기에 대한 우려도 고금리의 충격에서 비롯되는 문제다. 시중에 과도하게 풀린 유동성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채무불이행에 빠지는 기업이 나타날 수 있다. 심지어 건실한 기업인데도 당장 현금을 마련하지 못해 유동성 위기에 빠지는 ‘흑자도산’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고물가 상황이 지속되면서 금리 인상 기조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취약계층에 대한 선별적 지원 대책을 마련해둬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올 2분기 가계빚 1869조4000억원
GDP 대비 가계부채율 ‘세계 1위’
30대 다중채무자 5년 새 30% 늘어

자영업자·청년층이 불안하다

최근 가계빚 증가세는 주춤해진 상태지만, 절대 규모가 너무 크다. 올 2분기 기준 가계신용 잔액은 1869조4000억원,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신용 비율은 104.6%로 1분기 105.5%보다 소폭 하락했다. 여전히 나라 경제 규모를 웃도는 수준의 가계빚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국제금융협회(IIF)의 세계 부채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세계 35개국의 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한국이 102.2%로 가장 높았다. 지난해 2분기 말 ‘가계빚 세계 1위’ 타이틀을 얻은 뒤 1년째 1위를 유지했다. 특히 조사 대상 국가 가운데 가계 부채가 경제 규모(GDP)를 웃도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다.

문제는 이자가 빠르게 오르면서 상환부담이 큰 취약차주와 청년층 과다차입자 등의 부실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한은 통계에 따르면 지난 9월 예금은행의 가계대출 금리가 10년2개월 만에 연 5%를 돌파했다.

한국의 가계대출이 변동금리형에 치우쳐 있다는 점도 다른 국가와 비교해 취약한 지점이다. 올 8월 기준 전체 가계대출의 변동금리 비중은 75.6%, 전세대출을 제외한 주택담보대출의 변동금리 비중은 45.7%로 기준금리 인상이 시작된 이후에도 변동금리를 택하는 비중은 오히려 늘었다.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았던 자영업자는 그중에서도 취약차주로 꼽히고 있다. 올 2분기 말 기준 자영업자 대출 규모는 994조2000억원에 달한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만기연장이나 이자상환 유예 등의 금융지원조치가 계속 연장되고, 자금 수요는 여전히 높아 자영업 대출 증가세가 꺾이지 않는 상황이다. 올 2분기 자영업자 대출은 1년 전보다 15.8% 늘어 코로나19 사태가 본격화한 2020년 1분기 이후 계속해서 두 자릿수 증가하고 있다.

고금리에 따른 이자부담과 함께 급등한 원자재값과 공공요금 등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각종 비용까지 자영업자를 압박하고 있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코로나 방역에 협조하다 빚을 지게 된 분들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면서 “필요할 경우 재정을 통해서라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이후 저금리와 자산시장 호황을 틈타 금융기관 여러 곳에서 빚을 진 청년층도 위험이 커지고 있다. ‘영끌’ ‘빚투’에 나서 주식과 가상통화 시장에 뛰어들고, 일찌감치 주택매입에 나선 청년층이 적지 않아서다. 특히 이들은 소득 기반이 불안정한 경우가 많아 급격한 금리 인상에 더 취약할 수 있다. 한은은 “청년층은 코로나19 이후 과도한 주택관련대출 차입으로 부채비율이 높아져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도 빠르게 상승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한국금융연구원의 보고서를 보면 올해 4월 말 현재 다중채무자 1인당 채무액은 1억3300만원으로 2017년 말 1억1800만원에서 12.8% 늘었는데, 연령별로 봤을 때 30대 이하 청년층 다중채무자의 빚이 같은 기간 29.4%나 급증한 1억1400만원으로 나타났다. 신용상 금융연구원 금융리스크연구센터장은 “고금리 다중채무는 차주의 상황부담을 높여 소비여력을 위축시키고, 감내 수준을 넘어갈 경우 부실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과도하게 자산시장에 유입된 채무자금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대출금리가 오르는 상황에서 주식이나 집 등의 자산 가격이 조정을 받고 있는 점도 차주의 채무 상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갚아야 할 빚은 늘어나는데 담보에 해당하는 자산가치는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 10월12일 금융통화위원회 후 간담회에서 “(빠른 금리 인상으로) 다중채무자·저소득자·저신용자 등 취약계층과 1~2%대 금리가 10년 갈 줄 알고 많은 빚을 내 부동산을 산 젊은 신혼가구들에게는, 고통이 크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면서 “다만 안타깝게도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물가 상승률이 5%를 넘으면 기대 인플레이션도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금리 시대 ‘흔들리는 경제’…대출로 대출 막는 가계·기업 ‘경제 시한폭탄’
고금리 시대 ‘흔들리는 경제’…대출로 대출 막는 가계·기업 ‘경제 시한폭탄’

기업신용 증가율 두 자릿수 확대
중소·벤처기업 상황은 더욱 나빠
당장 현금 마련 못해 ‘흑자도산’도
“취약층 위한 지원 대책 마련해야”

경기침체에 기업 ‘돈맥경화’ 경고등

올 들어 가계부채 증가세가 주춤한 동안 기업대출 증가세는 오히려 확대됐다. 올 2분기 말 기준 기업신용 규모는 2476조3000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0.8% 증가했다. 지난해 1~3분기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했던 가계신용 증가율이 지난해 4분기부터 한 자릿수로 내려와 점점 둔화하는 동안, 기업신용 증가율은 반대로 올해 들어 두 자릿수로 확대됐다. 올 2분기 기준 명목GDP 대비 기업신용 비율은 116.6%로 1분기(115.3%)보다 상승했다.

채권시장 자금 경색으로 채권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기업들이 은행 대출로 쏠리는 현상은 최근 더 가속화하고 있다. 5대 은행(KB·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의 기업대출은 10월 들어 지난달 27일까지 8조8522억원 늘었는데, 2021년 9월(23조9264억원) 이후 1년1개월 만에 가장 많이 늘었다.

특히 대출금리가 오르고 환율 상승과 원자재 가격 상승까지 겹쳐 기업의 경영 여건이 나빠지고 있다는 점이 대외 불확실성을 키운다. 3년 연속 벌어들인 이익으로 이자도 못 갚은 한계기업이 다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한계기업이 코로나19 기간을 감내하면서 비은행권에서 대출을 많이 받았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한은에 따르면 한계기업에서 조달한 차입금 규모는 2019년 42조2000억원에서 지난해 53조3000억원으로 상당폭 늘었다. 한계기업의 비은행 차입 비중은 지난해 전체 차입금의 43.6%까지 높아져 2019년보다 7.0%포인트 증가했다. 국제금융협회는 “싸게 돈을 빌릴 수 있는 시대가 끝나가면서, 많은 기업이 이미 빚을 갚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낮은 금리 덕에 많은 기업이 싼값의 대출로 연명해왔으나, 앞으로는 대출 비용(금리)이 오르면서 부도가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한은은 “한계기업의 비은행권 자금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 상황에서 대내외 충격 발생 등으로 부실이 현재화될 경우 상대적으로 자본이 취약한 비은행권을 중심으로 관련 부실이 금융시스템 전체로 파급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아울러 “정상화 가능성이 낮은 한계기업에 과도한 자금이 공급되지 않도록 기업 여신 심사를 강화해야 한다”며 “또 기업 신용을 빠르게 늘린 비은행금융기관이 자체 부실 대응 여력을 확충하도록 관리·감독해야 한다”고 밝혔다.

새로 대출을 받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것도 기업들엔 큰 부담이다. 은행들이 건전성 관리에 나설 수밖에 없는 환경인 데다 경기 침체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기업 대출 문턱을 높일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 한국은행이 발표한 금융기관 대출행태 설문 결과에 따르면 은행들은 올 4분기 기업 대출은 조이고, 가계 대출은 완화하겠다고 답했다.

채권 발행을 통한 투자 유치는 더 힘들다. 2050억원짜리 레고랜드 사태로 채권시장 전체가 크게 요동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다. 투자 위험이 상대적으로 큰 스타트업에서부터 돈맥경화가 심각해졌다는 우려가 들려오고 있다. 국내 스타트업 민관협력 네트워크인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 따르면 지난 9월 국내 스타트업의 투자유치 금액은 3816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2469억원(39%) 감소했다.

고금리로 빚부담이 커지면 소비 여력이 줄어 내수 경기가 위축될 수 있다. 하반기 소비가 상반기 수준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른다.

김한진 이코노미스트는 “2008년 같은 거창한 금융위기는 아니더라도 영세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의 자금줄이 꼬이고, 흑자인데도 돈을 못 구해서 부실에 빠지는 기업들이 나타나면서 내년도 내수 경기를 상당히 위축시킬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긴축의 전이효과가 경제 전반에 극대화되는 시점이 내년 2·3분기쯤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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