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건 없는데…” ‘세금 달라 떼쓴다’ 오해에 두 번 우는 피해자들

심윤지 기자

“정부가 경·공매 대행 서비스 수수료로 배정한 금액이 50억원이에요. 어차피 법무사나 변호사에게 나갈 돈, 당장 몇천만원이 없어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지원해달라는건데, 정부는 돈이 없다고만 하니….”

- 전세사기 피해자 A씨

‘전세사기 피해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안’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를 통과한 24일, A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A씨는 전세보증금이 3억원을 넘다는 이유로 저리대출을 비롯한 정부의 각종 피해지원을 받지 못했다.

전세사기 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소속 회원이 16일 국회 본청계단에서 ‘선구제 후회수’ 방안 반대하는 정부여당 규탄대회에서 ‘세입자는 살고싶다’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전세사기 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소속 회원이 16일 국회 본청계단에서 ‘선구제 후회수’ 방안 반대하는 정부여당 규탄대회에서 ‘세입자는 살고싶다’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A씨는 몇달 전부터 보증금이 3억원을 넘는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탄원서를 모았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 대책위원회’에도 참여해 국회와 정부 관계자들을 만났다. 그 결과 국회 문턱을 넘은 특별법에서는 보증금 지원 요건이 3억원에서 5억원으로 상향됐다.

하지만 A씨는 “보증금 요건은 상향됐지만 아직도 남은 요건이 있어 피해자로 인정받을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전세사기를 ‘사인간 계약’ 문제로 보는 정부 기조가 바뀌지 않는 한, 사각지대는 여전히 남아있다는 얘기다.

특별법을 보는 피해자들의 싸늘한 시선… 왜?

22일 여야가 합의한 ‘전세사기 피해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안’은 최초 정부안보다 지원 요건이 상당 부분 완화됐다. ‘보증금 상당액 손실’ 요건은 삭제됐고, 신탁사기 피해자도 금융지원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주로 언론에 보도된 사각지대 사례가 보완됐다.

하지만 특별법을 보는 피해자들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다. 대책위는 지난 23일 ‘제대로 된 특별법을 마련하라’는 시민 8900명의 서명을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 전달하려 했으나, 경찰에 가로막혀 국회 출입을 제지당했다.

경찰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 진입하려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23일 막아서고 있다. 이들은 시민 8000여명의 연서명을 국회 민원실에 전달할 계획이었다. 전지현 기자

경찰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 진입하려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23일 막아서고 있다. 이들은 시민 8000여명의 연서명을 국회 민원실에 전달할 계획이었다. 전지현 기자

피해자들이 특별법에 부정적인 이유는 당장 눈앞의 현실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천 미추홀구에 사는 피해자 B씨는 임차권등기까지 설정했으나, 현재 시점에서 피해 주택에서 전출했다는 이유로 정부의 피해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특별법에도 전출과 관련한 명시적인 언급은 없다.

B씨는 “여야가 합의했다는 기사를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은행에 대환대출 가능 여부를 문의해봤으나 역시나 ‘규정이 없어 곤란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며 “정부는 이번달부터 대환대출을 개시한다고 했지만, 일선에선 이런 저런 이유로 거절당하는 피해자들이 여전히 많다”고 전했다.

“더 큰 빚을 내서 임대인 세금 갚아주라는 법”

특별법이 통과된다 해도 피해자들이 보증금을 회수할 수 있는 방법은 경매에서 ‘우선매수권’을 행사해 거주 주택을 낙찰받는 것이 유일하다. 다만 경매낙찰대금이나 생계유지를 위해 필요한 돈은 장기간 저금리로 대출해주겠다는 것이 정부의 기본 기조다.

피해자들은 이러한 기조가 ‘이미 빚더미에 앉은 피해자에게 더 큰 빚을 지라’는 말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피해주택은 이미 매매가가 전세가에 육박하는 근접한 ‘깡통주택’인데, 이를 낙찰 받기 위해선 임대인 체납 세금까지 피해자가 대신 갚아야 한다. 그마저도 다가구나 근린생활시설 피해자들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부산 수영구 다세대 주택에 사는 피해자 C씨는 “현재 나이가 32살인데 대출을 갚아가려면 50살은 되어야 한다”며 “중개사가 말한 건물가액도, 선순위임차인 정보도 모두 사실과 달랐지만 ‘전세사기’가 아닌 ‘깡통전세’였다고만 하면 책임을 빠져나갈 수 있는 구조”라고 했다.

23일 국회 앞에서 열린 전세사기 특별법 국회 법안소위 합의안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장에 관련 특검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지가 담긴 박스가 놓여 있다. 성동훈 기자

23일 국회 앞에서 열린 전세사기 특별법 국회 법안소위 합의안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장에 관련 특검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지가 담긴 박스가 놓여 있다. 성동훈 기자

전세사기 ‘사회적 재난’으로 인정하지 않는 정부

피해자들은 정부가 ‘전세사기는 사인간 계약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전세사기 가담자에 대한 처벌엔 손을 놓고 있다고 비판한다.

상당수의 신축빌라 전세사기는 건축주가 임차인(세입자)과 전세계약과 맺은 뒤, 미리 섭외해 둔 바지 임대인(집주인)에게 명의를 이전해버리는 ‘동시진행’ 방식으로 이뤄진다. 건축주나 공인중개사는 바지임대인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바지임대인들이 은닉재산을 현금화해두면 피해자들이 보증금을 돌려받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서울 양천구에서 전세사기 피해자가 사망한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주최 전세사기 피해 특별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 피해자들이 손피켓과 국화를 들고 있다. 김창길기자

서울 양천구에서 전세사기 피해자가 사망한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주최 전세사기 피해 특별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 피해자들이 손피켓과 국화를 들고 있다. 김창길기자

피해자들이 ‘선보상 후회수’를 정부에 요구했던 것도 이때문이다. 정부가 우선 피해자들에게 전세보증금을 지급해주고, 전세사기꾼들에게 보증금을 회수하면 된다는 것이다. 정부는 개인과 달리 공권력을 이용할 수 있다.

다가구 피해자 D씨는 “임대인은 연락이 두절됐는데, 건설회사 대표인 남편은 아내가 사라졌는데도 실종신고도 하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 중”이라며 “‘안전한 주택’이라는 공인중개사의 설명과 달리 주택은 근린생활시설이라 보험 가입이 안됐고, 선순위보증금도 사실과 달랐다”고 했다.

D씨도 “피해자들이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세금으로 보증금을 물어달라’는 것이 아니다”며 “일반적이지 않은 주택을 중개한 중개인은 자격 박탈 후 거액의 벌금을 물리고, 임대인의 임대인 가족의 재산을 강제력을 행사해 몰수한 뒤 임차인들에게 돌려주라는 것”이라고 했다.

전세사기 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소속 회원들이 16일 국회 본청계단에서 ‘선구제 후회수’ 방안 반대 정부여당 규탄대회를 마친 후 본청 정문 의원 출입구앞에 앉아 시위를 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전세사기 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소속 회원들이 16일 국회 본청계단에서 ‘선구제 후회수’ 방안 반대 정부여당 규탄대회를 마친 후 본청 정문 의원 출입구앞에 앉아 시위를 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피해자들은 전세사기를 ‘개인의 잘못’으로 보는 시각이 가장 힘들다고도 했다. B씨는 “최근에 불거진 조직적인 전세사기는 피해자들이 노력으로 피할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며 “이런 피해자들이 전국적으로 수천명씩 나온다면, 다칠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놓은 제도의 책임도 크다”고 했다.

한편 이날 인천 미추홀구에서 전세사기를 당한 40대 세입자가 숨진채 발견됐다. 미추홀구 전세사기 관련 4번째 희생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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