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환 기자

“복지 없인 성장 없다는 사회적 합의 틀 2년 내 안 다지면 20년 까먹어”

“사회환원 차원서 재벌회장들이 전향적으로 노동문제 해결 나서야”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50)는 경향신문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복지 없인 성장이 없다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장기적으로 한국 경제를 어떻게 바꿀지 합의해야 한다”며 “1~2년 사이에 (사회적 합의 도출을 위한) 틀을 다지지 않으면 20년을 까먹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등 재벌 오너들을 향해 “재벌이 크는 데 국민들의 피땀이 들어간 거 사실 아니냐. 사회에서 받은 게 있으면 갚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며 “(현대차 사내하청·쌍용차 정리해고 등의 문제로) 매일 사람이 죽어나가고 몇 달씩 하늘로 올라가서 고공농성하는 상황이 있으면 되겠나. 재벌 회장들이 전향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해결이 안된다”고 말했다. 장 교수와의 인터뷰는 지난달 28일 저녁 국제전화를 통해 1시간 넘게 진행됐다.

도서출판 부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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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수준의 복지 하려면 복지 지출 비중 2배 늘어
증세 없는 실현은 거짓말… 세금과 복지 개념 바꿔
부자들한테만 아니라 중산층에게도 증세 필요

-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경제 공약을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의 개혁적 경제학자들은 박 당선인의 공약이 재벌을 사후적으로 제재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비판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박 당선인이 과거에 언급한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바로 세운다)와 비교했을 때 많이 ‘좌클릭’이 된 것 같다. 약속을 지키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좌클릭을 한 것은 긍정적이다. 한국 사회의 논쟁 지형 자체가 많이 바뀌었다. 이명박 정부 초기만 해도 ‘부자되면 될 것 아니냐, 억울하면 부자돼라’는 분위기지 않았나. 하지만 최근엔 중소기업, 중소상인, 농민 등 경제적 약자를 돕는 것과 복지, 노동 등이 우선적인 과제가 됐다. 이런 그림 속에서 보면 재벌 지배구조는 부차적인 문제다. 지배구조를 개혁한다 해도 어떤 식으로 할 건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질 수 있다. 저는 ‘왜 5%의 주식을 가지고 50% 이상의 권리를 휘두르냐’며 재벌 총수체제를 비판하는 분들하고 다르게 가자는 것이다. ‘왜 그런 기업을 운영하는 데 노동자, 하청기업, 지역사회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느냐’는 게 제 생각이다. 또 ‘재벌의 부가 왜 국민경제의 이익으로 반영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오해를 해서 제가 재벌개혁에 반대한다고 하는데 그런 게 아니라 출자총액제한제, 순환출자 금지 등은 기본적으로 주주권을 더 확실하게 행사하게 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인데 이 방향이 틀렸다는 것이다. ‘1주 1표’를 철저히 관철하기 위해 순환출자를 통해 많은 주식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가진 것 이상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걸 막자는 건데 저는 이것이 주주들끼리의 싸움이지 국민들 생활하고는 한발 떨어진 이야기라고 본다.”

- 한국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킨 신자유주의는 ‘1원 1표’의 원칙을 강화하려는 초국적 금융자본과 국내 재벌의 ‘합작품’이기 때문에 양극화 해소를 위해선 재벌을 개혁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처음에는 제가 재벌과의 사회적 대타협 이야기를 꺼냈다. (초국적 금융자본 때문에) 재벌들이 옛날 식으로 하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때 바로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대타협을 하자고 한 것이다. 그런데 많은 수의 재벌들이 국제 금융자본에 영합해서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재벌들이 불쌍한 희생자’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계속 제가 금융자본을 겨냥하는 것은 ‘둘 중 뭐가 더 무서운 적이냐’라는 측면에서 보자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재벌은 역사적으로 무슨 죄를 지었는지 국민들이 다 안다. 총수가 누군지, 어디 사는지 대강 알고 있지 않나. 이들이 압박을 받는 것은 한국에 뿌리가 있고 과거의 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국적 금융자본으로 넘어가버리면 어디 가서 싸우고 데모하나. 원래 돈 갖고 있는 사람들은 미국, 러시아 등의 산 속에 숨어 사는 엄청난 부자들이고 이들의 돈을 운용하는 사람도 얼굴 없는 국제 펀드 매니저다. 국민들을 위해 어떤 자본을 상대로 타협을 하는 게 도움이 되느냐를 따져봐야 한다. 이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초국적 금융자본을 겨냥하는 것이다.”

- 예전에 주장한 재벌과의 사회적 대타협은 현재 어려워졌다고 보나.

“사회적 대타협을 이야기한 게 2003~2004년쯤이다. 당시하고는 지형이 변했다. 하지만 문제가 뭐냐 하면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타협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완전히 시장주의로 다 해버리자고 해서 출총제·순환출자 금지 등을 도입해 재벌 깨고 재벌을 초국적 금융자본이 접수하면 그 다음엔 한국 경제가 어떻게 되겠느냐. 어떻게 보면 제가 영국에 살면서 영미권 영향 속에서 그런 걸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에…. 미워도 한국에 뿌리가 있고 사람들이 그 죄를 아는 재벌과 타협하는 게 낫지, 금융자본이 잡기 시작하면 인정사정 보지 않는다. 사회적 대타협은 예전과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복지를 축으로 접근해야 한다. 복지국가를 만드는 데 합의가 있으니 복지를 늘릴 때 재벌이 세금을 얼마나 더 낼지, 재벌이 의료 민영화를 어떻게 포기하도록 할지 등을 논의해야 한다. ‘재벌이 한국 땅에서 발 붙이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정치의 영역에서 풀어나가야 한다.”

- 어떤 식으로든 타협을 해야 하는 게 당위라 해도 재벌은 때로는 국가보다도 우위에 있고 노동자 계급은 취약하다는 현실적 한계가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국가와 노동자 계급이 힘을 키워 사회적 대타협을 할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세력과 힘을 규합하느냐는 정치인들이 할 일이다. 하지만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발언은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 중 가장 잘못됐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정부는 왜 존재하나. 시장으로 다 넘겨버리지. 자본주의의 역사를 보면 시장의 영역이 축소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초기엔 노예를 사고팔았고, 아동 노동도 존재했다. 모든 것이 다 시장에 맡겨져 있었다. 하지만 일정 부분 국영화가 이뤄지고 노예 매매·아동 노동을 금지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왔다. 정부가 규제할 능력이 없으면 왜 아까운 국민세금으로 (공무원들은) 월급을 받고 있나. 복지를 중심으로 담론 구조가 완전히 바뀌고 있으니 이걸 지렛대로 해서 새로운 사회구도를 짜야 한다. 국제적으로 볼 때 지난 30년 동안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면서 각국에서 불평등이 증가했지만 스위스, 브라질 등은 불평등이 되레 줄어들었다. 그냥 앉아서 ‘재벌은 밉고 노동자 계급은 약하고 국민은 보수적이고 초국적 자본은 상대가 안된다’고 해선 안된다. 초국적 자본의 경우 자본 통제를 하면 된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제한적이긴 하지만 최근 필요할 땐 규제를 해야 한다고 태도를 바꾸었다.”

-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건희 회장이나 정몽구 회장 같은 이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나.

“이건희·정몽구 회장은 세습을 받긴 했지만 기업을 업그레이드한 점은 인정해줘야 한다. 다만 한국의 재계를 이끌어가는 분들이 재계에 대한 국민들의 증오를 키우고 있다. 이들의 자식 세대만 해도 지금 하는 방식으론 경영을 할 수가 없다. 21세기인데 삼성이 노조 없이 경영하는 게 말이 되나. 노조가 파괴적이라고 생각되면 이런 부분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대화를 해야 하지 않나. 매일 사람이 죽어나가고 몇 달씩 하늘로 올라가서 고공농성하는 상황이 있으면 되겠나. 재벌 회장들이 전향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해결이 안된다. 이들의 공헌을 인정할 부분이 없지 않지만 재벌들이 크는 데 국민들의 피땀이 들어간 거 사실 아니냐. 재벌이 ‘거지 같은 물건’을 만들던 시절 정부가 국민들이 나쁜 물건을 쓰도록 했고, 세금으로 재벌을 보조해줬다. 자기들이 사회에서 받은 게 있으면 갚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한쪽을 완전히 부정하기 시작하면 진전이 없다. 한쪽에선 ‘노조는 다 없애야 한다’, 다른 한쪽에선 ‘재벌 총수들은 악마다’라는 식으로 가면 무슨 대화가 되겠나.”

- 영국에서 한국의 대선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게 빠졌다’라고 생각한 부분이 있나.

“무상급식 이후 활발해진 복지국가 논의가 상대적으로 희미해진 것도 문제였지만 제일 부족한 건 한국 경제의 장기적 전망에 대한 논의였다. 국내총생산 대비 복지지출 비중을 보면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 다음으로 낮은데 사실상 꼴찌라고 봐야 한다. 복지지출 비중이 10%에도 못 미친다. 복지가 취약하다고 하는 미국이 20% 수준이고, 덴마크·프랑스 등은 30%를 넘는다. 하다 못해 미국 수준으로만 가려고 해도 지금보다 2배 이상 늘려야 하는데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또 장기적인 먹을거리가 없다는 우려가 나오는데 1970~1980년대에 짜여진 산업구조에 머물러 있는 한국 경제를 어떻게 업그레이드할 건지에 대한 이야기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첨단산업과 정복하지 못한 기계, 부품소재 분야를 어떻게 개발할 것인지 등이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 기계, 부품소재 분야가 발전한 독일, 일본, 스위스 등을 보면 이들 분야는 중소기업이 담당하는 업종이다. ‘중소기업이 불쌍하니까 봐주자’는 차원의 이야기 말고 중소기업을 어떻게 ‘고급 중소기업’으로 키울지, 복지하고 경제를 어떻게 연결할지에 대한 사회적인 토론이 필요하다. 이제는 복지를 제대로 안 하면 경제성장을 못하는 시대가 왔다. 예전에는 산업이 단순했다. 예를 들어 봉제 공장 다니다 이 산업이 기울어져 전자산업 공장에 다니려면 4~6주 정도 훈련을 받으면 됐다. 하지만 최근의 산업환경에선 교육훈련에 최소 6개월, 길면 2년도 걸린다. 한국은 실업급여가 취약하고 교육훈련 시스템도 잘돼 있지 않아 사람들이 실업에 대한 두려움을 크게 느낀다. 이 때문에 젊은이들이 진취적으로 진로를 찾기보다 의사, 공무원 등 안정된 직장만 찾는다. 새로운 산업 분야를 개척하려면 그 나라의 복지가 취약하면 안되는 시대가 왔다.”

장하준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재벌이 성장하는 데 국민들도 희생한 만큼 재벌 회장들이 현대차 사내하청 등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직접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25일 저녁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서울 덕수궁 대한문 옆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장하준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재벌이 성장하는 데 국민들도 희생한 만큼 재벌 회장들이 현대차 사내하청 등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직접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25일 저녁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서울 덕수궁 대한문 옆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 출자총액제한제 등 재벌 개혁 논리는
국민과 한 발 떨어진 얘기

▲ 재벌과 초국적 금융자본,
둘 중 누구와 타협하는 게 옳은 일인지 잘 따져봐야

- 다시 박근혜 당선인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박 당선인은 대선 후보 TV토론에서 줄푸세와 경제민주화가 양립 가능하다고 했다.

“경제민주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텐데 제가 정의하는 경제민주화는 ‘1원 1표’라는 시장원리를 ‘1인 1표’로 견제하는 것이다. 이런 정의에 입각해서 보자면 법질서 세우기는 몰라도 규제 풀고 세금 줄이는 건 경제민주화와 잘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에 잘못 생각했다’라고 솔직히 이야기했으면 좋았을 텐데 정치인들이 예전에 한 말을 뒤집으면 자기에게 흠집이 생길까봐 그런 것 같다. 양립하든 안 하든 경제민주화를 제대로 하면 되는데 예전의 레토릭에 미련을 두면 새롭게 하려는 게 왜곡될 수 있다.”

-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경제적인 의미로 해석해보자면 어떤가. 베이비부머 세대인 50대가 박 후보를 전폭적으로 지지한 것도 눈여겨볼 부분인 것 같은데.

“물론 민주통합당이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경제정책만 놓고 보면 좌파가 이긴 것이다. 경제정책의 승부는 이미 선거 전에 갈렸다고 본다. 새누리당의 일부 사안은 민주당보다 더 좌파적인 경우도 있었다.”

- 박근혜 후보가 대선 기간 약속한 정책을 어느 정도 실천에 옮길 것이라고 보나.

“여러 가지 핑계를 대서 실천을 안 하려는 세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언제는 쉬워서 했나.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쉬워서 포항제철 짓고, 조선소 지었나. 박 당선인이 아버지의 정신을 잇는다고 한다면 경제위기 때문에 못한다는 건 하기 싫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국민들이 견제를 해야 한다. 한번 딱 뽑고 5년 뒤에 심판하면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약속하고 틀리지 않으냐’며 계속 감시를 해야 최소한의 약속이라도 지키도록 할 수 있다.”

- 장 교수는 국가 주도의 산업정책으로 경제발전을 이뤄낸 박정희 시대의 성장 전략에 대해 점수를 주고 있다. 박정희식 경제 모델이 한국 경제에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지.

“박정희 정책이 무엇인가에 대해 한마디로 규정하긴 어렵지만 기본적으로 세 가지가 주요 요소다. 하나는 정부가 산업정책을 통해 강력히 개입해 신산업을 육성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외국자본을 규제해서 한국 기업들이 성장하기도 전에 먹히는 걸 막는 것이다. 당시 한국이 외국인 투자에 완전히 개방됐다면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가 있겠나. 미국이나 일본의 자회사가 됐거나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방법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방식으로 빈부격차가 지나치게 벌어지는 걸 제약하고 부자들이 너무 눈에 띄게 잘사는 걸 막았다. 이런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독재정권이라는 논란 등이 있었지만 통치가 유지됐던 측면이 있다. 지금은 예전처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한테 전화해서 ‘조선소 안 지으면 죽인다’고 할 순 없으니 산업정책을 관철시키는 방식이 더 민주화돼야 한다. 또 빈부격차를 줄이는 방식도 분야별 대응보다는 포괄적인 복지국가라는 형태로 접근해야 한다. 또 예전처럼 문을 걸어잠그고 살 순 없으니 개방에 따른 해악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이렇게 당시와 방법은 달라져야 하지만 일정 부분 배워야 할 부분은 있다고 본다. 박정희 때 했던 게 다 잘한 건 아니다. 불필요한 노동탄압, 인권침해, 잔혹행위 등은 심각한 문제다.”

- 박정희 정권 당시 노동계급에 대한 억압이 강력했는데 빈부격차가 제약됐다는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단 고성장을 하면서 일자리가 만들어졌다. 아주 가난한 시기에는 일자리가 없는 게 문제다. 노동자 계급이 굉장히 탄압받긴 했지만 일자리가 없어 굶는 것보단 ‘평등’하다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본주의의 초창기부터 노동자한테 관용적이었던 나라는 드물다. 미국 같은 경우는 파업하면 사설 탐정단을 고용해서 쏴죽이기까지 했다. 현재 노동자들의 힘이 가장 강한 나라로 분류되는 스웨덴도 1920년대까지만 해도 파업률이 세계 최고였고 파업을 진압하는 데 경찰의 과잉 대응, 폭력이 많았다. 싸우면서 쟁취가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단순히 ‘박정희가 다 노동계급을 탄압해서 그랬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물론 반공주의, 냉전구도 속에서 노동운동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보고 폭력적으로 탄압할 이유는 없었다.”

- 장 교수는 한국 사회가 좇아야 할 현존 모델로 스웨덴식 사민주의를 꼽는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지금과 같이 ‘노동 없는 민주주의’가 된 것은 박정희 정권이 과도하게 노동계급을 억압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기원이 박정희 정권이 아니냐는 것이다.

“글쎄요. 그런 영향이 없다곤 할 수 없지만…. 불행한 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이 노동계급은 약하지만 시민사회는 센 측면이 있다. 이 부분을 활용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 ‘조상 탓만 하지 말고 지금 노동운동이 잘 안되고 있으면 과연 어떻게 해야 국민들에게 어필할 건가’를 고민해야 한다. 대기업 노조 위주로 조직된 노동운동에도 문제가 있다. 물론 노조라는 게 조합원의 이익을 최우선하긴 하지만 크게 봐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좀 더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국민들에게 인기를 더 얻을 것이다. 재벌들이 세습한다고 비판하면서 자기 애들 채용 때 특혜를 달라고 하기 시작하면 그런 노동운동을 누가 믿겠나. 노동운동도 반성할 부분이 있다. 역사는 이미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된다’고 하기보다 그렇다면 이런 조건에서 어떻게 할까를 능동적으로 고민했으면 좋겠다.”

- 올해 한국 사회에선 경제위기론이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문제는 이 위기론이 한국 경제를 개혁하려는 흐름을 막는 도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 같다.

“개혁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경제위기론을 걸림돌로 만들려고 하겠죠. 아까도 이야기를 했지만 복지를 제대로 안 하면 성장이 안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둘 중 하나 고르는 차원이 아니다. 복지가 취약하니 출산율이 세계 최저인데 이런 부분을 어떻게 할 거냐. 여성들을 고급 인력으로 키워놓고 보육, 육아 등이 해결 안되니 투자한 자원들이 다 없어진다. 신산업을 키우려면 복지가 잘 받쳐줘서 여기서 실패하더라도 재기의 기회가 있다는 인식이 자리잡아야 한다. 그래야 성장을 할 수 있다. 이른바 진보세력이 담론 지형을 이렇게 만들어야 하는데 ‘성장이 안되더라도 복지는 해야 한다’고 했다. 이게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경제위기론에 밀릴 수밖에 없다. 프레임을 잘못 잡은 것이다. 시장주의 경제학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사용하는 전가의 보도가 ‘성장과 분배는 상충관계에 있다’는 논리다. 이걸 받아들이면서 ‘아니 그래도 분배가 중요해’라고 이야기를 하면 위기론에 말려든다. 앞으로 계속 경제가 어려울 텐데….”

- 박근혜 당선인은 복지공약을 실현하는 데 연간 소요재정을 26조3000억원이라고 제시했다. 재정지출 개혁, 조세감면 축소 등을 통해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며 증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증세 없이 복지공약이 실현 가능하다고 보나. 만약 증세가 필요하다면 부자증세로 가야 하나, 아니면 중산층까지 참여하는 보편 증세로 가야 하나.

“박 당선인의 공약에 정확히 얼마의 돈이 드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실현하려는 복지의 사이즈가 작다면 증세를 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건 그 정도의 복지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복지라는 개념을 온 국민이 다 같이 사회보험에 들어 비용을 낮추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지금은 다 개인별로 AIG, 삼성생명 같은 곳에서 민간보험을 들고 있다. 하지만 유럽을 보면 의료가 국유화돼 있어 3000만명분을 구매하기 위해 제약회사와 협상을 하니 안 깎아줄 수가 있나. 이처럼 비용을 절감해서 빠지는 부분 없이 보편적 복지를 해야 한다. 미국 수준으로 가려면 지금보다 복지지출 비중이 2배는 돼야 하는데 세금 안 걷고 하겠다는 건 거짓말이다. 부자들한테만 돈 받아선 안되고 월급쟁이 등 중산층으로부터도 걷어야 한다. 더 중요한 건 세금과 복지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점이다. 왜 자꾸 세금을 내기 싫어하느냐 하면 정부가 어디 가서 돈을 태워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금이 곧 학교요, 병원이요, 연금보험이라는 인식을 해야 한다. 세금은 보험을 공동 구매하는 데 쓰이는 것이지 국가한테 뜯기는 게 아니다. 다 같이 내고 많이 받는 것이다. ”

- 미국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을 통해 아시아 귀환 전략을 짜고 있고, 중국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한·중·일 FTA 등으로 대응하고 있다. 한국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이런 식으로 복잡한 걸 하지 말자고 세계무역기구(WTO)를 만든 건데…. 미국이나 EU처럼 센 나라들은 WTO에서 자기들 맘대로 안되니 각개격파로 들어가서 만만한 나라를 불러 FTA를 체결했다. 한국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나서서 다자무역 질서를 흩트리고 다녔다. 이걸 주도한 분들은 국익을 위해 했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엔 되지도 않는 통합을 하려고 한 것이다. 한국이 잘살게 됐다고 자랑하지만 아직도 왜 국민소득이 2만달러냐. 미국, 스위스 등은 5만달러다. 그만큼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세계 수준에 도달한 것은 몇 개 분야 정도다. 한국이 겁 없이 나선 것이다. EU하고 FTA 하면 부품소재 산업을 어떻게 발전시킬 건가. 무역장벽을 쓸 수도 없고. 정부에서 특혜를 주려고 하면 협정 위반이라고 상대방이 걸고넘어질 것이다. 길게 보면 나라 망할 일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서명된 것을 되돌릴 수도 없고…. 한국이고 미국이고 중국이고 WTO나 잘하는 게 좋은 일 같다.”

- 2013년 한국 경제의 가장 큰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나. 아울러 2013년 세계 경제 전망을 듣고 싶다.

“세계 경제는 불확실성에 휩싸여 있고 산 넘어 산이다. 미국 재정절벽 문제도 있고, 유로화도 일단 최악은 진정이 됐지만 올해 어떻게 될지 모른다. 12월에 그리스에 갔었는데 25%가 실업자에다 직장 갖고 있는 사람들도 급여가 40~50% 깎였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유로권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중국, 인도도 경제가 감속 중이고 여러 가지 불확실한 요소들이 많다. 다만 이처럼 어려운 상황을 핑계로 쓰면 안된다. 국제적인 기준으로 보면 한국은 그래도 어느 정도 성장을 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어떤 식으로든 사회통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박근혜 당선인이 대통합이라는 제스처를 취한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서 장기적으로 한국 경제를 어떻게 바꿀지 합의를 도출하지 않으면 저는 정말 늦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15년간 혼돈의 시대였다.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고 다른 한편에선 그걸 막아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국민들 사이에 합의도 없었고 반목이 지속됐다. 1~2년 사이에 틀을 다지지 않으면 또 5년이 흐지부지 지나가고 20년을 까먹게 된다. 다 같이 조금씩 양보하며 잘살 수 있는 장기적인 틀을 짜야 한다. 지금처럼 반목하면 결국은 힘 있는 사람들만 챙기고 나갈 수밖에 없다.”

▲ 장하준 교수는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어려운 내용을 충분히 소화하지도 못한 채 말하는 사람, 어려운 내용을 어렵게 말하는 사람, 어려운 내용을 쉽게 말하는 사람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50)는 마지막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다. 일반인들에겐 어렵게만 느껴지는 경제를 평이한 말로 풀어 설명하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다. 장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0년 이래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03년 신고전파 경제학의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주는 뮈르달 상을, 2005년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경제학자에게 주는 레온티예프 상을 최연소로 수상함으로써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재벌 옹호론자’ ‘박정희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그는 지난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공저)를 출간한 뒤 개혁진보 성향의 경제학자들과 재벌개혁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나쁜 사마리아인들> <사다리 걷어차기> <쾌도난마 한국경제>(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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