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 | 소설가

성직자도 아닌데 왜 참죠, ‘잔욕망’ 해소시켜 나를 가볍게 해야

사진작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윤광준씨가 25일 경기도 일산의 작업실에서 소설가 백영옥씨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윤 작가는 “먹고사는 문제 외에 또 다른 꿈을 꾸라”고 강조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사진작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윤광준씨가 25일 경기도 일산의 작업실에서 소설가 백영옥씨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윤 작가는 “먹고사는 문제 외에 또 다른 꿈을 꾸라”고 강조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 세상 모든 물건들의 애호가·감각주의자·오디오 칼럼니스트…
“먹어보고 짜면 안 먹을 테니, 즉각적인 감각이 주는 명확함에 더 끌려요”

사진 찍는 남자들은 당혹스럽다. 이 편견에 가득 찬 문장이 적어도 내겐 반쯤의 진실이다. 2005년 사진가 배병우를 헤이리 스튜디오에서 인터뷰했을 때, 그는 내게 “사진에 언제부터 관심이 있었나?”라는 질문을 던졌었다. 첫 번째 질문은 곧 두 번째 질문으로 이어졌고, 여수 남자인 이 사진가는 어부 같은 손으로 고등어 스파게티를 만들더니, 아예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가 내게 물어본 질문이 내가 그에 관해 묻고 싶었던 질문지보다 더 길 것이란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순식간에 바뀌는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경기 일산의 작업실 ‘B1’에서 사진가 윤광준이 대뜸 내게 “왜 나이 든 남자들을 인터뷰합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8년 전 그 기억이 떠올라 문득 말문이 막혔다. “남자 말고 수컷을 보고 싶은 겁니까?” 그가 되물었을 땐, 그제야 안경 너머 날카로운 눈과 그의 콧수염이 보였다. “여성화돼서 남녀 구분 안 되니까 이 시대를 사는 수컷의 느낌을 다루고 싶다, 뭐 그런 건가요?” 그가 피식 웃자, 비로소 이 남자가 갈아온 드립 커피의 향기가 맡아졌다. 마루가 깔린 작업실 소파 옆에는 쓰리세븐 777 손톱깎이와 브라이틀링 내비타이머, 올림푸스 카메라가 섞여 있었다. 윤광준이란 이름을 오독하면 몇몇 사람들은 그를 명품주의자라 부를 것이다. 하지만 그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면 커피를 드립하는 과정에서도 ‘감각의 연마법’을 수행 중인 한 남자의 고집스러운 태도가 보일 것이다. 오디오 칼럼니스트, 커피와 와인애호가, 세상 물건들을 탐하는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 나는 그에게 감각적으로 체험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말을 간신히 꺼냈다.

윤광준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월간마당과 객석 기자를 거쳐 웅진출판에 입사해 사진부장으로 ‘한국의 자연탐험’이라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8년간 진행했다. 인생의 절정기를 무당벌레와 거미와 공룡의 화석들을 좇으며 탕진한 남자가 고백하듯 ‘자연 자체가 내게 감동을 주는 부분이 없다’란 말을 할 땐, 어떤 깨달음이 있었을 것이다. 센베이를 들고 있던 그가 과자를 베어 물더니 “이걸 참 좋아하는데, 나는 이걸 어디서 파는지 몰라서 누가 사오지 않는 이상 못 먹어요!”라며 낄낄 웃었다. “사람들이 이 과자를 만들기 위해 수없이 밀어도 봤을 거고, 푸석하게, 쫀득하게도 만들었겠죠. 그러다 동그랗게 말린 최적의 형태를 찾아낸 거고요. 자연은 즉각적으로 오는 거잖아요? 하지만 물건은 그 다음을 들여다봐야 알 수 있는 세계가 있어요. 기계를 예로 들면 저 안에 부품 하나 바꾸면 소리가 놀랄 만큼 아름다워져요. 그 비밀을 알아내고 밝혀내는 게 재밌어요. 궁극적으로 사람의 욕망과 감각을 찾아가는 과정인 거예요.”

■ 물건에 스민 사람의 욕망과 감각을 찾아가는 매력

2002년 <윤광준의 생활명품 산책>을 처음 읽었다. 명품하면 프라다, 샤넬부터 떠오르던 시절에 메주몽고간장이나 빅토리아 녹스 칼에 대한 그의 글은 참신해 보였다. 인용 없이 직선적인 글에선 직접 써보지 않은 사람은 느낄 수 없는 감수성과 우리가 ‘생활 기스’라 부르는 자잘한 시간의 흉터가 포착됐다. 카메라 렌즈나 오디오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어김없이 이어지는 박식한 흥분들도 좋았다. 나는 맨발로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과자와 커피를 마시는 덩치 큰 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먹는 시간도 아까워 17년 전부터 하루 한 끼만 먹는 ‘일일일식’(一日一食)을 실천한다는 그의 납작한 배도 보았다. 사진가로 세계를 떠돌던 그가 자연 속에서 본 사자 얘기를 하다가 “폼 나는 동물의 왕국? 순 뻥이지!”라는 혼잣말을 중얼댔을 땐, 이 남자의 콧수염이 빳빳한 바늘처럼 느껴졌다.

“사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사냥에 성공을 해요. 운이 좋으면 잡아먹고, 아니면 3, 4일은 쫄쫄 굶는 게 동물의 세계란 겁니다. 그게 자연적인 거예요. 풍족함을 누리면서 사는 동물은 하나도 없는데, 인간만이 예외적인 존재예요. 그것도 문명을 일구다보니 생긴 시스템 때문이지 내 신체적 필요에 의한 건 아니란 거지. 과잉 상태가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겁니다.”

나는 작업실 여기저기에 산더미처럼 쌓이다 못해, 바닥을 뒹구는 물건들을 보다가 크게 웃었다. 하지만 곧 ‘나이 먹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필요할 때 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하나둘씩 깨달아 가는 일이다’라고 쓴 그의 문장이 떠올라 쓸쓸했다. 한 인간이 소유한 물건들의 역사는 외로움과 결핍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사고 싶은 걸 안 사면 내 돈이 외로워할까봐 지갑을 열 수밖에 없다고 말한 누군가의 뒷모습도 떠올랐다. B1은 윤광준의 자연사 박물관이다. 이 공간 안에서 물건에 얽힌 천일야화 같은 하나하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면, 누구든 그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제야 내 눈앞에는 고독했을 어떤 시간에 분명 그의 친구가 되어주었을 집채만한 탄호이저 스피커 두 개가 또렷이 보였다.

-윤광준 하면 세상 모든 물건들의 애호가란 말이 떠오릅니다.

“전 관념으로 세상을 조립하기 전에 행동이 먼저 앞섰고, 체험한 후에야 그게 도대체 뭐였는지 나중에 정리하는 삶을 살았어요. 즉각적 감각이 주는 명확함이 더 쉽게 와 닿아요. 먹어보고 짜면 안 먹을 거고, 아프면 손을 놓을 거란 거죠. 책을 몇 권 쓰긴 했지만 남들이 말하는 독서가도 아니에요. 사람이 모두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말에도 절대 동의할 수가 없어요. 고전은 이데올로기를 공감시키려는 편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인간의 경험과 지혜가 꼭 책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인간의 기본이나 관계를 얘기하는 또 다른 가능성이 있을 텐데, 하는 기대가 아직 제게 있어요.”

-사진가라는 직업의 정체성과 감각적인 삶은 관련이 있나요?

“사진은 관념이 통하질 않아요. 어떤 경우에도 현장을 떠나서는 있을 수가 없어요. 처음에는 상상할 수도 없고, 새로운 걸 연결시킬 수도 없는 사진의 특성이 불편하고 어려웠어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한 장의 프레임에 세상을 다 담을 수는 없으니까요. 전 사진의 한계 때문에 글을 쓰게 된 경우예요. 근데 이쪽은 하이브리드고, 나쁜 의미로 말하면 한쪽에 몰입이 잘 안 되는 성격이에요, 내가.”

-첫 직장이 출판사였는데….

“웅진이 생긴 게 1982년인데, 내가 1983년부터 그곳에서 알바를 했어요. 윤석금 회장하고 같이 짜장면 시켜먹고 일할 때예요. 대한민국 출판 역사를 보면 일본과 한국의 공통점이 있어요. 1970년대 갈 곳 없던 일본의 전공투 세대가 우리나라 1980년대 상황과 비슷했던 거죠. 데모하다 전과자 된 학생들을 받아준 곳이 출판계밖에 없었던 거예요. 내가 출판 쪽에 있을 당시에는 서울대 출신이 90%였어요. 나는 대학 때 날라리처럼 보내서 엄청나게 공부한 그 사람들하고 말이 안 통했어요. 처음 내 한심함을 깨달았어요. 나는 직장을 다니면서부터 사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글을 쓰게 된 계기도 잡지사의 사세가 기울어서 기자 뽑을 돈이 없었기 때문이고. 내가 사진도 찍고, 기사도 쓰고, 잡지 나르고, 그야말로 일당백이었죠.”

■ 카메라는 내 삶을 내 식으로 바라보는 도구

-<잘 찍은 사진 한 장> 같은 책은 대중적이고 정서적으로 잘 쓰여진 사진 입문기 같은 느낌이에요.

“그 책이 세 번째 쓴 책인데 13만 부나 팔렸어요. 직장 때려치우고 백수로 지내면서 집 팔아먹고 하다가, 마누라한테 큰소리 쳤던 유일한 때였어요. 지금 같으면 어림없는 소리지. 사실 일반인들이 명작 찍어서 뭐하게요? 전시를 할 겁니까, 갖다 팔 겁니까. 사진에 대한 책을 쓰고 강연을 하는 이유는 카메라의 기능을 너의 삶에 재현시키라는 거예요. 카메라는 세상의 새로움을 발견하게 해주는 도구라는 거죠.”

-‘우리’라는 주어가 익숙한 세대가 ‘내’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건가요?

“자기 이야기가 없는 거죠. 내 또래 남자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면, 그럴 때가 제일 힘들어요. 민주당은 이랬다, 새누리당은 이랬다, 흥분하며 떠드는 이야기의 내용도 실은 남의 대변이니까. 내 삶을 내 식으로 보고 살아내는 훈련이 안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 맥락으로 볼 때 카메라는 내 삶을 바라보는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스갯소리로 외국여행 가서 겉모습만으로 한국인을 구별하는 방법이 커다란 DSLR 카메라를 들고 빨리빨리 사진 찍는 사람을 찾으면 된다는 말도 있는데, 유독 우리가 도구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요?

“한풀이예요. 과거의 습성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돈을 쓰는 주체가 되니까, 옛날에 가난했을 때 못 샀던 것들을 배터질 때까지 먹고 쓰는 거예요. 북한산 가는데도 고어텍스에, 스파이크 다섯 개 박힌 신발을 신어요.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한풀이인 거죠. 장비도 마찬가지예요. 근데 난 그게 하나도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갖고 싶은 장비를 가져보는 게 중요하거든요. 경쟁적으로 큰 차 사려는 심리랑 다를 게 없죠.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압축 성장을 한 나라예요. 30년의 시간을 우리 스스로 메모리하지 못해요. 유럽처럼 내가 살아온 이력을 단계적으로 정리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시간과 세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내가 후지게 노는 덴 다 이유가 있는 건데, 좀 참아주면 안 되겠느냐는 거죠. 하하. 우리가 파리처럼 되고 싶다고 해서 서울이 단번에 파리가 되진 않아요. 난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풍요를 누렸으면 좋겠어요. 그럼 제 풀에 지치는 순간이 올 거고, 진짜 좋은 것을 선택하고 찾아가는 시점이 오게 되는 거죠.”

-서양의 ‘에피큐리언’에 대한 사람들의 가장 일반적인 오해가 흥청망청 소비하는 것이 쾌락주의라고 보는 관점이기도 해요

“그 말에 공감하는 게, 배가 고파야 음식이 정말 맛있는 거거든요. 내가 비워지는 상태가 되어야만 나의 선택이 도드라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한 끼만 드시는 거예요? ‘감각주의자 윤광준은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라고 쓸까요?

“그러세요! 하하하. 우리는 풍족의 역사를 누려본 적이 없어서 펼쳐 놓아야 잘산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결핍 때문에 생긴 병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은 지금까지 번 돈을 다 쓰게 되는 삶이에요.”

-소비하는 삶 말인가요?

“욕망은 해소시켜서 가볍게 해야 되는 겁니다. 성직자도 아닌데 왜 다들 참으라고 하는지. 참을 수 있으면 참지, 참아지지 않으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잔욕망을 터는 연습을 해야 돼요. 돈이 모인다는 건 쓰고 남은 돈이 넘쳐야 되는 거잖아요? 전 이 사회에서 가장 나쁜 짓을 하는 게 보험회사라고 봐요. 불안을 담보로 돈을 버는 거잖아요. 인간이 보험이 없었을 땐 인생에 불행이 닥치면 그걸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정리를 하는 지혜가 있었어요. 근데 이젠 언제 해약할지 모를 그것에 기대 살아야 한다고. 인간이 욕망을 해소하는 데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에요.”

-이곳에 있는 물건들은 그럼 잔욕망을 턴 흔적들인가요?

“내 얘길 잘 들어봐요. 절실함이 사라지게 되면 물건들은 하등 소용없어요. 세상이 재밌는 게 끊임없이 후학들이 생긴다는 겁니다. 내 관심은 끝났는데 새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생기는 거죠. 음악을 많이 들었는데 이 나이가 되니까 어떤 분야를 내가 다 알 수 있나란 생각이 들어요. 알아서 얻는 깨달음은 이만한 범위에서 난 이만큼만 아는구나의 한계를 아는 게 앎이더라고. 나이가 들수록 확신이 잘 안 생겨요. 물건은 그냥 다 필요한 사람 줘버리고.”

-감각의 세계를 줄곧 얘기했는데, 고백하면 전 와인 맛을 잘 모르겠어요.

“이 보르도 와인이 내가 태어난 해에 나온 것인데 280만원이에요. 55년이 된 와인인데 내가 얼마나 맛을 기대했겠어요. 근데 딱 따니까 첫 느낌이 뭐냐하면. ‘이 와인 썩었네!’였어요. 와인색이 거의 죽은피 색깔이에요. 근데 한 시간쯤 지나니까 여기서 향이 올라오는데 또 맛이 완전히 달라요. 다른 와인은 시거나 달거든요. 근데 얘는 주장을 하지 않아. 내가 100년 된 간장을 먹어봤어요. 조선간장이 100년이 되면 결정화돼서 찐득찐득해요. 간장에서 향기가 나는 게 상상이 돼요? 조선간장은 원래 짜고 격한 냄새가 나는데 걘 짜질 않아요. 달고 묵직하게 짜고, 결국 통합의 맛이라는 겁니다. 그런 감각은 결국 희소성의 감각이에요. 그게 필요 없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미친 짓이지만 그게 필요한 사람에게는 평생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거죠.”

-송로버섯 같은 것 말인가요?

“내 돈 주고 못 먹는 그 요릴 사람들과 먹은 적이 있어요. 송로는 언제 주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웨이터가 엄숙하게 흰 장갑을 끼고 오더니, 가늘게 채 써는 슬라이스 칼을 갖고 착착 채를 썰어서 제 스테이크 위에 몇 점 얹어주는 거예요. 내가 허리 딱 펴고 엄숙하게 있으니까 ‘에라~ 너니까 한 점 더 준다’ 딱 그런 얼굴이더란 말이지. 송로버섯의 핵심은 결국 꼬리꼬리한 발가락 냄새였어요. 식물성인데 동물성 맛이 나는 것도 그렇고. 아까도 말했지만 그런 건 모두에게 드러나는 게 아니고 그걸 감각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느껴지는 궁극의 세련된 감각인 거예요.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건 이런 경험들을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얘기해주는 거예요.”

■ 죽음을 수긍하고 인정할 때 또 다른 가능성 생겨

-시간이 부족해서 누울 시간도 없다고 했는데.

“난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늘 시간이 부족해요. 에너자이너 선전 알아요? 백만돌이? 그게 내 꿈이라고. 요즘은 유일하게 시간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은 뒤에 있는 시간을 앞으로 가져오는 거란 생각이 들어요. 나는 평생을 돌아다녔던 사람이라 항상 죽음의 현장 가까이에 있었어요. 차에 깔려 죽은 사람, 떨어져 죽은 사람, 다양한 죽음들을 코앞에서 봤어요. 초등학생 때 외삼촌이 돌아가셨는데 사람이 썩으면 물이 흥건해져요. 죽으면 이렇게 되는구나를 그때부터 느꼈어요. 그러니까 난 죽음이 저쪽의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30대에 히말라야에 올라갔는데, 5000 미터 위에 올라서면 바닥의 끝이 보이지 않는 크레바스 지역이 있어요. 그곳에 햇빛이 비추는데 정말 아름다운 보석처럼 빛났어요. 여기서 죽으면 아무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딱 거기였어요.”

-그 순간 죽고 싶단 생각이 드셨어요?

“그랬어요. 내 의지로 이곳을 넘어가지 못하면 죽는 거예요. 내 존재가 낫싱이 되는 공간을 발견한 거죠. 코끼리도 죽을 땐 지 무덤 찾아가고, 거북이도 그래요. 훼손되지 않은 생명에겐 알아서 자기 삶을 정리하고 마치는 지혜들이 있는 거지. 지금도 그런 유혹이 있어요. 좀 더 나이가 들면 나는 죽음을 준비하는 클럽을 만들려고 해요. 내 의지가 작동되는 순간만큼 살고 싶은 겁니다. 죽음은 닥치기 마련이에요. 피해야 될 게 아니라 수긍하고 인정할 때 또 다른 가능성이 생기는 겁니다.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전제로 좀 더 잘살고 싶다는 문제죠.”

-죽음이 결국 시간에 관련된 가장 중요한 문제란 건가요?

“나이 먹어서 좋은 거 하나는 해야 될 짓과 하지 말아야 될 짓을 분간하는 능력이 생긴다는 거예요. 이제 난 내가 해야 되는 일만 하기에도 시간이 짧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까 280만원짜리 와인도 먹어야 하는 거예요. 다 먹어보고 해본 사람이 인생 별거 아니더라 하는 거랑, 꿈만 꾼 거랑 다르잖아요. 대한민국 남자의 불행은 꿈만 꾸는 데 익숙하다는 거예요. 능력이 없거나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이미 다 갖고 있는데도 스스로 그런 걸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가공의 삶을 사는 거죠. 인생을 두 번 산다면 당연히 연습하고 다음에 더 잘하겠죠. 좋은 것만 누리고 살기에도 삶은 짧아요.”

맥주를 마시며 인터뷰하는 동안 그는 와인을 두 병이나 땄다. 오디오 애호가의 탄호이저 스피커에선 베르디의 오페라와 경기민요, 탐 웨이츠의 ‘미니애폴리스의 창녀로부터 온 편지’까지 다양한 음악이 흘러 나왔다. 수컷은 뒤돌아보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가 얘기한 것은 먹잇감을 향해 전력질주하는 사자의 속성이었다. 사자는 먹이를 잡다가 죽거나 심하게 다친다. 하다못해 아름다운 나비를 봐도 날개가 멀쩡한 건 거의 없다. 자연 상태에서 멀쩡한 개체와 종족은 생존을 위해 우아한 자태를 보여줄 수가 없고 폼을 잡을 수 있는 틈이 없는 셈이다. 열정이 없을수록 삶은 언뜻 순해진다. 사랑 없는 삶은 살지 않겠다는 건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선포일 수 있겠다 싶었다. 화창한 봄날은 이제 나의 풍경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성찰 뒤에야 비로소 “보잘것없는 행적과 허비한 시간만이 내 몫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감각주의자 윤광준의 문장이 단단해진 건, 오직 아는 것만을 쓰겠다는 그 결벽 가득한 고집 때문이라는 걸 이제야 나는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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