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까지 메이크업 시키는 사회, “나는 아동 화장을 거부한다”

이영경 기자
아이들까지 메이크업 시키는 사회, “나는 아동 화장을 거부한다”

◆‘어른 아이’ 소비 문화 멈춰주세요

‘아동 메이크업 보이콧’ 선언한 메이크업 아티스트 서가람씨

“오래전부터 아동들에게 성인 여성과 같은 헤어 메이크업으로 스타일링을 하는 일, 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화장품 세트가 되어버린 사실을 몹시 괴이하다고 느껴왔습니다. 더 이상 아이들이 화장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진한 볼터치와 붉은 입술, 웨이브 진 헤어를 하고 포즈를 짓는 아이들의 이미지를 소비하지 말아주세요.”

아이들까지 메이크업 시키는 사회, “나는 아동 화장을 거부한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서가람씨(27·사진)는 지난달 말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아동 메이크업 보이콧’을 선언했다. SNS에서 10~20대 여성을 중심으로 화장과 꾸밈을 거부하는 ‘탈코르셋 운동’이 벌어지는 와중에서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화장은 중·고등학생을 넘어서 미취학 아동까지 연령대가 내려간다. 아동복 쇼핑몰에선 여아들이 성인과 같은 색조화장에 성인복 같은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화장’이 업인 서씨는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지난 5일 경기도 의정부의 한 커피숍에서 서씨를 만났다. 그는 “한국에선 키즈모델 대부분이 성인 여성과 같은 콘셉트의 촬영을 한다”고 말했다.

“키즈 모델 일이 들어올 경우 간간이 했어요. 저는 노골적인 성인 콘셉트의 화장은 하지 않았죠. 우연히 아동복 쇼핑몰의 모델 사진을 봤는데, 아이들에게 몸매 라인이 강조되는 옷을 입히고 성인과 같은 화장을 해놓은 사진을 보고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외국 아동복 쇼핑몰에서 아이들이 화장하지 않고 아이다운 모습의 사진을 게시한 것과는 대조적이었죠.”

“키즈모델 돈 된다는 에이전시
촬영장선 ‘성인처럼 연출해라’
짙은 화장에 몸매 드러난 의상
어른들의 소비 욕구에 이용돼
유럽과 대조…문제의식 가져야”

얼마 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한 사촌동생이 교회에서 선물을 받았다며 자랑을 했다. 풀어보니 거울·틴트·립스틱·헤어롤 같은 미용 도구였다. 장난감이 아닌, 사용 가능한 성인 브랜드 제품이었다. 서씨도 어릴 때 교회에서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자전거였다. 13년 만에 여자 아이에게 주는 선물은 자전거에서 ‘화장품 세트’로 바뀌어 있었다. 서씨는 “사촌동생은 꾸미는 데 별로 관심이 없는 애인데, 사회에서 꾸밈을 강요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 ‘성인의 미적 기준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거 아닌가’ 생각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서씨에게 실제 아동 모델 촬영 현장에 대해 물었다. 서씨는 “사진을 촬영하기 전 시안이 나오고, 성인 여배우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스타일로 화장과 머리를 연출해주세요’라고 한다”면서 “아이다운 모습이 아니라 예쁜 여성 이미지로 꾸미는 것”이라고 말했다. 색조나 볼터치는 반드시 들어가고, 웨이브 진 풍성한 머리로 연출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메이크업 시장에서 아동 모델을 대상으로 한 시장도 커지고 있다. 서씨는 “비교적 큰 규모의 에이전시와 계약을 했는데 일부러 포트폴리오에 키즈모델 사진은 넣지 않았다. 그런데 에이전시에서 ‘키즈모델 쪽이 돈이 된다’는 말을 듣고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왔다. 결국 해당 에이전시에 연락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 해당 에이전시에는 소속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홍보하며 ‘유아’ 부문을 별도로 표시하고 있었다.

서씨는 프리랜서다. 공개적으로 특정 일을 거부하는 것이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서씨는 “일을 받는 입장에서 업체의 일을 거부한다는 건 정말 쉽지 않다”고 말했다. 공개적으로 SNS에 글을 올린 후 동종업계 사람으로부터 항의성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혼자 결단하면 되지 굳이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냐’는 내용이었다. 알음알음 일을 소개받는 메이크업계 특성상 일이 줄어들 수도 있다. 서씨는 “꾸준히 불편함을 느끼던 부분이고, 더 이상 하기 싫다고 생각해 공개적으로 밝혔다. 우려도 되지만 프리랜서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서씨는 “동종업계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며 “다만 아동에게 성인처럼 화장하는 일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그런 시안 자체가 굳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한 것이고 나로 인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성공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씨는 어릴 때부터 멋 부리는 걸 좋아했다. “꾸미면 내가 알던 내가 아니라 다른 느낌의 내가 되는 것”이 좋았다. 진로도 메이크업 쪽으로 정했다. 서씨는 “예전과 달리 요즘은 유튜브나 미디어의 영향으로 화장하는 아이들이 늘면서 하지 않는 아이들이 이상하게 여겨지고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다”며 “아동을 대상으로 한 화장은 아이들의 욕구가 아니라 그 이미지를 보고 소비하는 성인들의 욕구인 것 같다”고 말했다.

서씨가 생각하는 좋은 화장이란 뭘까. “성인 메이크업도 요즘은 다 똑같아요. 눈은 크고, 입술은 도톰하게, 다들 비슷한 얼굴이 되어가죠. 제가 생각하는 좋은 화장은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만드는 거예요. 남녀 상관없이요. 제 남자친구도 기본적인 화장은 해요. 남들 기준에 맞추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모습대로 자신을 꾸미는 거예요.”

아이들까지 메이크업 시키는 사회, “나는 아동 화장을 거부한다”

◆키즈 카페엔 파우더룸·립스틱 사탕 품귀…“왜곡된 외모 관념, 유아로 확산”

실태 어느 정도인가

키즈 화장품 시장 급성장 추세
성인·영유야용으로만 구분 관리
어린이용 화장품 파악 안돼


새빨간 입술에 발그레한 볼터치, 굵은 웨이브가 들어간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한 아이가 화면을 보고 웃고 있다. 때론 멍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한 아동복 쇼핑몰 사이트에 올라온 아동 모델 사진이다. 이 아동의 키는 105㎝, 신장으로 봤을 때 5~6세 정도로 추정된다. 이보다 규모가 좀 더 큰 아동복 쇼핑몰. 색조 화장을 하고 굵은 웨이브 진 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귀고리를 하고 핸드백을 들고 있다. 활짝 웃는 얼굴에서 드러난 어린아이다운 유치를 보고서야 원래 나이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다. 키는 120㎝, 7~8세가량 된 아이다. 국내 아동복 쇼핑몰 상당수가 이처럼 미취학 아동을 모델로 내세워 성인과 같은 메이크업과 포즈를 취하게 한다.

모델·사진작가·메이크업 아티스트 등이 소속된 한 에이전시의 홈페이지. 소속 아티스트 소개란을 보면 전문분야에 ‘유아’라고 표시한 이들이 있다. 에이전시 관계자는 “일반 쇼핑몰과 기업 등에서 키즈 메이크업 수요가 많다”고 말했다.

■ 여아 놀이문화로 자리 잡은 화장

최근 여성에게 요구되는 화장과 꾸밈을 거부하는 ‘탈코르셋 운동’이 10~20대 여성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화장과 꾸밈 문화는 10대를 넘어서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옷뿐 아니라, 키즈카페, 장난감, 먹거리까지 광범위하게 화장과 꾸밈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립스틱·매니큐어 등 실제 화장품을 발라볼 수 있는 파우더룸을 갖춘 키즈카페가 생겨나고 있으며, 네일케어, 마스크팩 등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키즈 스파’도 호텔 상품으로 생겨날 정도다. 최근 강남에 개점한 화장품 편집숍 시코르는 아예 어린이용 메이크업 코너를 따로 마련했다. 지난해 8월 세븐일레븐에서 출시한 립스틱 모양의 사탕 ‘시크릿쥬쥬 립캔디’는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며 품귀 현상을 빚기도 했다.

키즈 화장품 시장도 급성장하고 있다. 인터넷 오픈마켓 11번가에 따르면 어린이용 화장품의 지난해 매출은 2016년보다 29% 증가했다. 유아 립스틱 매출은 전년보다 549%, 유아 매니큐어는 233% 등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아이들까지 메이크업 시키는 사회, “나는 아동 화장을 거부한다”

■ 우려되는 아동 성적 대상화

이를 바라보는 부모들의 시선은 우려스럽다. 6세와 2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강미정씨(36)는 “아동은 화장을 한다는 데 대한 의식이 없고 아직 자기판단능력이 없는데, 성인 여성에게 하는 화장법이나 스타일을 그대로 축소해 아이들에게 하는 것이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강씨는 “왜곡된 외모에 대한 관념이 초등학교에서 이제는 유아까지 내려가고 있으며, 하나의 또래문화가 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7세와 5세 아이를 키우는 백소현씨(39)는 1년 전 딸아이에게 입힐 한복을 검색하다 ‘로리타 한복’이라는 상품명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백씨는 “여아를 성적 대상화하는 로리타란 상품명을 쓴 것을 보고 해당 쇼핑몰에 항의를 했다”며 “여아를 성적 대상화한 시각의 사진들이 많이 쓰이고 있다”고 말했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미취학 여아를 성인과 비슷하게 화장하고 꾸미는 것은 아이들을 성적 대상으로 환원하는 효과를 만든다”고 말했다. 윤김 교수는 “성인 여성들은 강아지 눈매, 볼터치를 해 아이처럼 보이게 화장하는 반면, 아이들은 성인 여성처럼 보이게 화장을 한다”며 “화장법을 통해 남성의 욕망의 대상 속에 성인과 미취학 아동이 모두 들어가는 효과를 준다. 여아 화장은 성인의 아동화와 연결돼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외양 치장을 넘어서 우리 사회에서 어떤 몸을 남성들이 소비하기 좋은 몸으로 규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까지 이어진다는 면에서 강력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 어린이 화장품 시장규모 '몰라'

김주덕 성신여대 뷰티산업학과 교수가 작성한 ‘초등학생들의 화장품 사용 실태에 관한 연구’를 보면 초등학생 42.4%가 색조 화장품을 사용하고 있다고 답했다. 화장을 시작하는 연령대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처음 색조 화장품을 사용한 시기는 5학년이 43.4%로 가장 많았지만, 4학년 응답자의 52.2%가 3학년 때 색조 화장을 시작했다고 답했다.

김 교수는 “한국 아이들이 외국 아이들보다 화장을 더 많이 하고, 화장이 하나의 또래문화로 강력하게 자리 잡아 화장을 하지 않으면 따돌림당하는 경우도 있다”며 “하지만 올바른 화장법에 대한 지식 없이 화장을 하다보니 볼펜으로 아이라인을 그리는 영상이 70만~80만 조회수를 기록하는 등 안전성이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어린이 색조 화장품 시장이 급성장하고, 아이들의 화장 문화가 확산되고 있지만 어린이 화장품 시장규모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김 교수는 “국내 화장품은 성인용과 영·유아용으로 구분돼 있어 어린이용 화장품은 따로 관리되지 않는다”며 “어린이 화장품은 영세업체에서 생산하는 것이 많지만 전체 규모는 파악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식약처는 어린이 화장품을 별도로 분류해 관리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어린이 화장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하지 않기로 했다. 식약처 관계자는 “어린이 화장품 시장 규모는 별도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며 “어린이 화장품을 별도로 분류하기보다는 알레르기 유발 물질 등 유해성분 표시를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날씬한 몸매에 대한 강박’ 또한 여자 아이들을 옥죈다. 인천의 한 초등학교 교사 이모씨는 “화장보다 아이들이 더 관심 갖는 것은 다이어트”라면서 “급식을 다 먹지 않고 남기고, 밥을 다 먹는 게 ‘돼지 같아 보인다’고 생각한다”며 “성장기 아동의 건강을 망칠 수도 있고, 식이장애가 올 수도 있어서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 교사는 “남자 아이들은 비만이어도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지만, 여자 아이들은 조금 통통하기만 해도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놀림을 당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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