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식물 구조해 돌본 뒤 새 가족에 분양? '공덕동 식물유치원'에서 합니다

장회정 기자
재개발 지역에 버려진 식물을 구조해 살린 뒤 식물인들에게 분양하는 백수혜씨가 서울 ‘공덕동 식물유치원’에서 포즈를 취했다. 강윤중 기자

재개발 지역에 버려진 식물을 구조해 살린 뒤 식물인들에게 분양하는 백수혜씨가 서울 ‘공덕동 식물유치원’에서 포즈를 취했다. 강윤중 기자

‘버려진 생물을 구조해 소생시킨 뒤 나누는 곳.’

최근 접한 가장 아름다운 단어의 조합이다. 펫숍에서 구입하기보다 유기동물보호소에서 함께 살 동물을 입양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요즘, 반려식물에 제2의 생을 열어주고 있는 ‘공덕동 식물유치원’의 존재는 생태 감수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구조 당시의 알로카시아(왼쪽 사진). 뿌리를 잘라 수경재배를 시작했더니 파릇한 싹이 돋아났다(오른쪽 사진). 알로카시아는 10명에게 반려식물로 입양됐다. 공덕동 식물유치원 제공

구조 당시의 알로카시아(왼쪽 사진). 뿌리를 잘라 수경재배를 시작했더니 파릇한 싹이 돋아났다(오른쪽 사진). 알로카시아는 10명에게 반려식물로 입양됐다. 공덕동 식물유치원 제공

머지않아 1100가구가 넘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공덕1구역과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둔 오래된 골목 끝집의 대문을 열자 신록이 뿜어내는 생명력이 가득한 “한 뼘의 섬 같은” 마당이 펼쳐졌다. 지난해 6월 지금의 청기와집으로 세를 얻어 들어온 백수혜씨(35)는 주민들이 떠난 재개발 단지로 동네 산책을 나섰다가 버려진 알로카시아를 발견했다. 알로카시아는 헌집을 주고 새집을 받는 재개발을 앞두고 꾸리는 이삿짐에서 화분은 가장 후순위로 밀렸을 살림일지도 모른다. 아열대 지역에서 자라는 관엽식물 알로카시아는 남국의 정취를 뿜어내는 외양으로 미니멀한 분위기의 카페에 가면 꼭 하나씩은 있는 인기 식물이었다. 깨진 화분 속에서 빗물로 겨우 연명하던 알로카시아 뿌리를 집으로 가져온 백씨는 여러 등분으로 자른 뒤 물꽂이를 했다. 오래지 않아 뿌리가 나고 새싹이 돋아났다. 그렇게 어엿한 알로카시아 개체로 성장한 가지는 이후 10명의 새 가족을 찾았다.

이주민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더미 속에서 발견한 장미허브(왼쪽 사진). 식물유치원에 ‘입학’한 장미허브는 놀라울 정도의 번식력을 자랑하며 쑥쑥 자라고 있다(오른쪽 사진). 공덕동 식물유치원 제공

이주민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더미 속에서 발견한 장미허브(왼쪽 사진). 식물유치원에 ‘입학’한 장미허브는 놀라울 정도의 번식력을 자랑하며 쑥쑥 자라고 있다(오른쪽 사진). 공덕동 식물유치원 제공

“재개발 지역에 가면 고양이나 모기가 가장 많아요. 사실 식물은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오히려 신나게 자라고 있어요. 하지만 얼마 뒤면 없어질 거라 생각하면 여러 가지 감정이 들죠.”

‘고아원’은 어쩐지 슬프고 ‘식물원’은 부담스럽던 차에 친구의 추천으로 ‘공덕동 식물유치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구조된 ‘원생’들이 늘어나자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열고 분양 공고를 냈다. 꽃집에서 판매하는 화분에 비하면 영 볼품없지만, 반응은 뜨겁다. 화분은 무료 나눔 혹은 흙값 정도에 저가 분양한다. 신청자는 20~30대 여성이 대부분이다. 코로나19로 고립된 생활을 하던 차에 식물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는 호응도 많다. SNS를 통해 분양된 식물들의 안부를 주고받기도 한다.

주민들이 모두 떠난 재개발 단지의 모습. 백수혜씨에 따르면, 사람이 떠난 공간에서 식물들은 신나게 자라고 있다. 다만 개발과 함께 곧 사라질 풍경이라는 점이 아쉽다고 했다. 공덕동 식물유치원 제공

주민들이 모두 떠난 재개발 단지의 모습. 백수혜씨에 따르면, 사람이 떠난 공간에서 식물들은 신나게 자라고 있다. 다만 개발과 함께 곧 사라질 풍경이라는 점이 아쉽다고 했다. 공덕동 식물유치원 제공

백씨는 자칭 식물 초보다. 온라인을 통해 집단지성의 힘을 빌려 흙을 배합하고 약도 주면서 식물을 돌본다. 식물을 매개로 마음을 같이하는 활동가 9명을 만나 연희동 재개발 예정지 등지로 구조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화분이 쓰러진 채로 햇빛을 보기 위해 회오리 모양으로 자라고 있던 국화는 진드기를 제거하고 돌본 끝에 꽃도 봤다. 작은 화분 속에서 부대끼며 자라던 산세비에리아는 분갈이를 해 숨통을 틔워줬다. 버려졌던 비비추, 장미허브, 다육식물 외에도 어디서 날아왔는지, 길고양이가 옮겼는지 알 수 없는 방아와 애기똥풀, 봄을 맞아 파종한 공심채 등 40여종이 식물유치원에서 옹기종기 살아가고 있다.

틈나는 대로 재개발 지역을 둘러보고 있는 백씨는 “키우던 식물을 두고 가는 이들도 다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말한다. 어쩔 수 없이 나무나 식물을 두고 갈 수밖에 없는 이들을 위해 대규모 이주를 앞둔 재개발 지구에서 여는 플리마켓을 제안했다. 마치 서양에서 게러지세일(차고세일)을 통해 벼룩시장을 일상화 하듯, 아직 제 몫을 할 수 있는 세간이나 식물 등 생활용품을 거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꼭 식물이 아니더라도 뭔가를 소중히 다루는 인식을 가졌으면 해요. 재개발 단지 벼룩시장을 통해 조금 덜 귀찮은 방식으로 살림살이나 식물을 버리지 않고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한 뼘의 섬 같은” 마당이지만 버려졌던 식물들이 자라기에는 햇빛과 정성,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다. 강윤중 기자

“한 뼘의 섬 같은” 마당이지만 버려졌던 식물들이 자라기에는 햇빛과 정성,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다. 강윤중 기자

백씨는 미술을 전공한 아티스트다. 2호점을 낼 정도로 잘되던 여성전용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코로나19로 외국인 관광객이 줄어들어 직격탄을 맞자 예술가 대상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에서 활동을 벌였다. 낙동강변 할머니들과 프리저브드 플라워 워크클래스도 진행한 건 뿌듯한 기억이다. 백씨는 사화정원이라 부르는 테라리움과 소라껍데기를 활용한 화분이나 인센스홀더 등 식물을 오래 기억하고 보관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든다. 5월7일에는 이태원 빌라해밀톤에서 ‘순순히 물러나지 않겠다’는 타이틀로 작가 7명과 전시를 연다. 애초 ‘식용’이었으나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왕성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당근과 셀러리 화분을 출품했다. 오는 22일까지 허쉬드갤러리에서 열리는 ‘풍경’전에선 백씨가 재개발 단지에서 구조한 식물과 사진을 볼 수 있다.

식물을 매개로 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백수혜씨가 참가한 전시회 포스터.

식물을 매개로 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백수혜씨가 참가한 전시회 포스터.

이 활동을 통해 백씨는 “식물을 항상 죽이는 사람은 아니라는 자신감을 얻은 것” 외에도 “자신의 감정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꼭 예쁘게 자라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주문이기도 했다. 1호 구조 식물인 알로카시아의 여러 가지 중 백씨에게 남은 화분은 “잎사귀에 반점이 있어서 예쁘게 못 자란 아이”다.

옹색한 화분에 부대낀 상태로 버려졌던 산세비에리아는 무사히 구조되어 분갈이를 마치고, 어엿한 작품이 되어 갤러리에서 관람객을 맞고 있다. 오는 22일까지 서울 마포구 허쉬드 갤러리에서 열리는 ‘풍경’전 89번째 이야기에서 만날 수 있다. 공덕동 식물유치원 제공

옹색한 화분에 부대낀 상태로 버려졌던 산세비에리아는 무사히 구조되어 분갈이를 마치고, 어엿한 작품이 되어 갤러리에서 관람객을 맞고 있다. 오는 22일까지 서울 마포구 허쉬드 갤러리에서 열리는 ‘풍경’전 89번째 이야기에서 만날 수 있다. 공덕동 식물유치원 제공

“9년 외국 생활을 하는 동안 저는 동양인, 여자, 조그만 애…항상 메이저에 속하지 못하는 ‘디 아더’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잉여물이나 버림받은 소외된 것들을 보면 더 관심이 가는 듯해요. 여기 식물들은 그냥 잘 크기만 하면 돼요.”

죽어가던 식물이 살아나고 언제 이렇게 자랐나 싶게 커가는 잎사귀를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는 백씨는 요즘같이 날씨 좋을 때 야외에서 각자 키우던 식물을 부담 없이 나눌 수 있는 식물교환모임을 계획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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