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역사 덕후, 한국史 도장을 깨라

김지윤 기자

한국사 공부에 빠진 사람들

도전! 역사 덕후, 한국史 도장을 깨라

“임영웅 콘서트 표 구하는 것만큼 (접수가) 어려웠다.”

올 초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원서 접수를 앞두고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주관하는 이 시험은 ‘우리 역사에 관한 관심을 제고하고 역사적 사고력을 평가하기 위한’ 인증 시험이다. 각종 공무원 임용과 일부 민간기업 입사에서 가산점이 부여되는 만큼 취업준비생들에게는 필수 자격증으로 꼽히는데 신청자가 몰리면서 남은 시험장을 찾아 제주도, 강원도로 원정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최근 이 여정에 비취업준비생인 초등학생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한 배경의 지원자들이 도전장을 내미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들 대다수는 한국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공인된 결과를 통해 성취감을 얻기 위해 시험을 치른다. 지난 1월, 가수 청하는 한 잡지 인터뷰를 통해 ‘한국사 자격증 1급’ 합격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는데 모르니 두렵더라. 말실수하거나 알아듣지 못할까 입을 다물게 되기 일쑤”였다며 “개인적으로는 외할아버지께서 5·18민주화운동에도 참여하시고,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유공자라 언젠가 그 기록을 제대로 알고 싶었다”고 말했다.

시나브로 한국사 공부 바람이 불고 있다. 엑스(옛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근현대사 관련 도서·영화 ‘도장 깨기(특정 분야에서 어려운 장벽이나 기록 따위를 넘는 일)’ 인증이 이어지고 역사 애호가들이 주를 이뤘던 오프라인 소모임에서도 평범한 이들의 행적이 목격되는 중이다. 무엇이 한국사를 이토록 ‘핫’하게 만들었을까.

달달 외울 땐 노잼
알면 알수록 꿀잼

K열풍이 쏘아 올린 애국심…근현대사 영화 도장깨기로 ‘역덕’ 입문

대학내일 20대 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MZ세대 절반 이상이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라고 답했다. 연구소 측은 “K컬처가 전 세계인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점이 이들의 자긍심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대학생 박유진씨도 마찬가지다. 방탄소년단(BTS)의 팬인 그는 곳곳에서 접두사 ‘K’를 발견할 때마다 “애틋한 짝사랑 대상을 마주하듯” 떨렸다고 했다. 그러나 한껏 차올랐던 자긍심은 “사도세자는 왜 뒤주에 갇혀 죽었느냐”고 묻는 외국인 친구의 한마디에 무너졌다. “영화에서 봤는데…”라고 말끝을 흐리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고, ‘요란한 빈 수레’가 되고 싶지 않았던 그는 한국사 공부를 시작했다.

“학창 시절엔 국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어요. 숫자에 약한 편인데 연대순으로 정리된 사건들을 암기하는 게 그렇게 괴롭더라고요(웃음). 자연히 역사란 따분한 것, 나와는 별개라는 생각을 해왔죠.”

<벌거벗은 한국사>는 우리 역사의 주요 장면들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들려주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벌거벗은 한국사>는 우리 역사의 주요 장면들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들려주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영상이 익숙한 세대인 그가 선택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영상 시청이었다. <벌거벗은 한국사> <역사 저널 그날> 등 스토리텔링 형식의 TV 프로그램으로 입문해 다큐멘터리, 시사 프로그램 등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어느 정도 지식이 쌓이니 더 알아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더라고요. 요즘엔 시간이 날 때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관련 책들을 찾아봐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역덕(역사덕후)’의 글을 읽거나 역사 전문가의 유튜브 영상을 통해 정보를 얻기도 하고요.”

최근 관심을 두게 된 시기는 근현대다. 영화 <서울의 봄> 개봉 당시엔 친구들과 ‘한국 근현대사 영화 도장 깨기’를 하기도 했다. SNS에 올라온 ‘근현대사 영화 타임라인’이라는 글에 따라 순서대로 영화를 관람하는 방식의 챌린지였다. <그때 그 사람들> <남산의 부장들> <화려한 휴가> 등이 타임라인에 포함된 대표적인 작품이다.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 수도 서울에서 일어난 신군부 세력의 반란과 이를 막기 위한 일촉즉발의 9시간을 그린 영화.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 수도 서울에서 일어난 신군부 세력의 반란과 이를 막기 위한 일촉즉발의 9시간을 그린 영화.

“MZ세대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제 생각은 달라요. 안팎으로 공격을 당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봉기를 일으키며 들불처럼 타오른 그 DNA가 어디 가겠어요? 표현 방식이 달라지고 온라인으로 공간이 변했을 뿐 우리에게도 ‘국뽕’은 있거든요.”

근현대사를 공부하며 정치, 경제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소소할지언정 자신의 작은 시도들이 쌓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책임감 역시 생겼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그는 “내가 현대사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며 웃었다.

“하물며 외국인들도 한국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현타’가 올 때가 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죠. 이 또한 K컬처의 일부다, 나는 우리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요(웃음).”

‘한국사능력검증’ 준비하며 부채의식…온라인서 ‘독립운동’

“제 취미는 국사 교과서 읽기입니다.”

대학생이자 취업준비생인 김은찬씨가 언제나 이력서 첫머리로 사용하는 문구다. 냉랭한 면접장 분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만의 필살기다.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한 다음 ‘이는 국사책 몇쪽에 기록된 내용이다. 역사 속 주인공 아무개처럼 나 역시 이 조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하면 십중팔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더라고요.”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실화를 주제로 재구성 한 영화 <택시운전사>.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실화를 주제로 재구성 한 영화 <택시운전사>.

김씨가 한국사에 빠진 것은 1년 전, 우연히 ‘내가 취미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를 하고 얻은 일곱 가지’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면서다. 해당 영상에서 화자는 ‘과거 사람들과의 만남이 바꾼 삶’ ‘우리나라 곳곳의 아름다운 여행지들’ 등 얻게 된 것들을 전했는데 김씨는 ‘당연한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는 대목에서 한참이나 먹먹함을 느꼈다고 했다.

“저에게 역사란 교과서 속 이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굳이 관심을 갖거나 애써 찾아보는 노력 같은 것도 하지 않았죠. 그런데 이상하게 ‘당연한 것들’이라는 말이 그렇게 마음을 무겁게 하더라고요. 검색만 하면 쏟아지는 정보, 시대별로 정리된 다양한 서적, 1000만 관객을 동원하는 시대물까지 과하다 싶을 만큼 역사 콘텐츠가 차고 넘치는 상황에서 애써 외면한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이 들기도 했어요.”

부채의식에서 시작된 공부, 처음엔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답답했다. 고등학생인 여동생의 국사책을 펼쳐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몇번을 정독하며 한국사의 ‘뼈대’를 세운 그는 이후 <실록>을 빌려 읽고 역사 속 인물들을 연구하며 정보를 쌓기 시작했다. 밀린 전시, 드라마와 영화도 살뜰하게 챙겨봤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구한말을 배경으로 이름 없는 영웅들의 항일투쟁사 등을 담았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구한말을 배경으로 이름 없는 영웅들의 항일투쟁사 등을 담았다.

“제 ‘인생 드라마’는 <미스터 션샤인>이에요. 그전까지는 어린 마음에 우리는 왜 이토록 끊임없이 주권을 빼앗기고 분열에 흔들려온 보잘것없는 나라였을까 하는 열등감이 컸는데 드라마를 보면서 ‘이토록 작은 땅에서 우리 민족이 이뤄낸 것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이 사람들의 죽음을 기억해야겠다’는 결심이 생기더라고요.”

현재 그는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해외 자료들을 번역해 자신의 SNS에 올리거나 해외 역사 마니아 커뮤니티를 찾아 진실을 알리는 나름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는 중이다. 최근에는 ‘1945’ 등의 자동차 번호, 독립운동가들에게서 따온 캐릭터 이름 등 영화 <파묘> 속에 감독이 숨겨둔 ‘항일’ 장치를 소개하기도 했다.

“뮤지컬 <영웅>에 ‘누가 죄인인가’라는 곡이 나오는데요. 극 중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으면서 거사를 실행한 이유와 일본의 만행을 밝히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이를 현재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누가 주인인가’가 아닐까 싶어요.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이기도 하고요.”

한국 영화 최다 관객 기록을 쓴 <명량>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 해전을 다뤘다.

한국 영화 최다 관객 기록을 쓴 <명량>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 해전을 다뤘다.

아는 건 ‘태정태세’뿐이었는데…스터디하며 그 시절 ‘숨은 이야기’에 풍덩

사회초년생 정윤진씨는 매주 금요일 저녁 ‘한국사 스터디’를 한다. 시대나 사건 등 주제를 정한 다음 자신이 조사해 온 내용을 발표, 질문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토론하는 스터디다. 때때로 역사 탐방을 떠나기도 하고 전시회, 박물관을 찾아 유물을 접하기도 한다.

“첫 스터디는 ‘한능검’ 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모임이었어요. 입사 시험에 필요한 자격증이었는데 저는 ‘태정태세문단세’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이과 출신이라(웃음) 조금 막막하더라고요. 지인 몇몇과 함께 스터디를 꾸렸고 무사히 시험을 봤죠. 그런데 계속 아련함이 남는 거예요. 이대로 끝내버리면 안 될 것만 같고요.”

의무감으로 시작한 공부였지만 과거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한국사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때마침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한국사 스터디원을 모집한다는 글을 보게 됐고 지원서를 냈다.

“어찌 보면 역사란 나보다 앞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잖아요. 시대가 조명하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만약 내가 그 시절을 지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고요.”

모임에는 초등학생 자녀를 둔 주부부터 외국인 교환학생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한다. 나이도, 직업도, 전공도 다르지만 6개월가량 이어진 모임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편이라고 했다.

“구성원 중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분이 있는데 참여 동기가 아이의 질문 공세를 받아내기 위해서였어요. 아이가 5학년이 되자 교과서에 한국사가 등장했는데 고조선부터 한국전쟁까지 배우는 한 학기 동안 숨 막히는 일정이었다고 해요. 관련 서적을 찾아 읽고 체험 수업에 동행하며 흥미를 북돋아주다가 결국 본인의 취미생활이 되신 거죠(웃음).”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시대는 개화기다. 지난 모임에서는 개화기 여성들의 흔적을 찾아 스터디 구성원들과 공유하며 소소한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또 다른 목표도 생겼다. 구술사 공부다. 정씨는 기회가 닿는다면 역사의 기록 과정에서 소외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인터뷰하고 분석하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역사를 공부하며 깨달은 진리가 있는데, 삶에 늦었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이 순간도 먼 미래에서 봤을 땐 과거라는 점에 불과하니까요.”

쏟아지는 정보 객관화 필요…단편적 사고 지양하고 열린 마음 가져야

문화콘텐츠 플랫폼 예스24는 “한국사를 다룬 영화들이 극장가를 강타하며 실제 역사를 궁금해하는 독자들의 발걸음이 서점으로 이어지는 추세”라고 발표했다. 특히 영화 <서울의 봄>과 <노량: 죽음의 바다> 개봉 직후엔 관련 도서 판매량이 각각 전주 대비 85.3%, 86.6%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역사 다큐멘터리 영화 <길위에 김대중> 관련 서적 판매량도 개봉 전주 대비 85.7%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영화 <남영동1985>는 김근태가 1985년 9월 민청련 사건으로 구속된 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영화 <남영동1985>는 김근태가 1985년 9월 민청련 사건으로 구속된 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박민석 역사학자는 이 같은 붐을 두고 “기성세대는 흔히 한국사 공부에 대해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와 같은 단순하면서도 당위적인 이유로 접근했다. 그러나 한국사를 공부할 수 있는 콘텐츠가 늘어나면서 요즘 세대들에게 역사란 재미있는 것,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더 강하다. 초등학생들도 소설책을 읽듯 한국사 전집을 섭렵하고 드라마를 보듯 과거를 인지한다”고 분석했다. 또한 그는 “글로벌 사회가 더 가까워지면서 국가에 대한 의미도 다르게 해석되는 분위기”라고 전한다. 특히 “팬데믹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MZ세대는 ‘생각보다 한국이 발전 가능성이 있는 나라’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 같다”며 “‘헬조선’으로 치부하던 한국에 애정을 갖게 됐고 세계에 한국의 장점을 알리고자 하는 기류가 형성됐다. 그러다 보니 공부의 필요성이 부각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역사 교육 전문가들은 이와 같은 현상을 고무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최태성 별별 한국사 연구소장은 한국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그는 “다만 지나치게 정보가 많고 자극적인 영상 위주의 콘텐츠가 더 끌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내가 알게 된 정보가 전부라는 착각을 버리고 그 또한 역사의 부분이라는 열린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사는 “객관화하고 차분하게 봐야 하는 과목”이라는 것이다.

허태용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특히 역사의 학문적 특수성을 유념한 공부 자세를 강조했다. 그는 “역사는 물리나 화학, 수학과 달리 언어를 통해 명확함을 밝혀내거나 증명이라는 방식을 통해 재현할 수 없는 학문”이라며 “단지 흐릿하게 볼 수 있을 뿐인 경우가 많으므로 ‘반드시’라는 단정적 사고를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그는 “대중의 입맛에 맞게 소비되는 ‘이야기로서의 역사’에 몰두하기보다는 학술적인 엄밀함을 바탕으로 한 ‘학문으로서의 역사’에 좀 더 진지하게 접근하기를 바란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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