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특별하지 않기에 누구나 존중받아야 한다

이유진 기자

자만 말고 겸손하라 ­ 얀테의 법칙

누구도 특별하지 않기에 누구나 존중받아야 한다

“왕의 DNA를 가진 아이라 왕자에게 말하듯 듣기 좋게 돌려 말해도 알아듣는다.” 자신의 아이가 ‘왕의 DNA’를 가졌다며 초등학교 담임교사에게 갑질했다는 의혹을 받는 학부모가 결국 경찰에 고발됐다. 세종시교육청은 지난해 ‘왕의 DNA’를 언급하며 자녀의 담임교사에게 e메일을 보낸 교육부 5급 사무관 A씨에 대한 고발장을 세종남부경찰서에 접수했다고 지난 17일 밝혔다. 지난해 이 갑질 논란이 알려지자 한 시민단체는 직권남용, 강요, 협박, 무고,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A씨를 서울경찰청에 고발하기도 했다.

‘갑질’ 논란이 분야를 막론하고 끊이지 않는다. 당사자는 보통 “내가 누군지 알아?”로 갑질의 시동을 건다. ‘나’를 드러내고 인정을 받아야 하는 시대, 인스타그램은 일상 공유가 아닌 과시가 된 지 오래다. ‘시대정신’에 발맞춘 교육의 방향성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높아도 너무 높다, 한국 사회의 권리의식

왜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에게 나를 주지시키려 하고 또 대접받아야 직성이 풀릴까? 박진영 심리학자(미국 듀크대)는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한국 사회의 높은 권리의식(Entitlement)을 지목했다.

“한국 사회는 다른 나라에 비해 학벌, 직업, 소득 그리고 사는 곳까지 계급으로 나눠 집착하는 경향이 큽니다. ‘다 같이 평등하게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자’가 아니라 개천에서 용이 나와야 하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나만 성공하라는 교육을 암묵적으로 받고 자랐어요. 이런 조건에 따라 내가 당연히 남과 다른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권리의식이에요.”

학벌·직업·소득·사는 곳까지
계급으로 나눠 집착하는 한국
배타적 권리의식에 행복도 ‘뚝’

부 과시 금지·겸손 강조하는
북유럽 삶의 규범 ‘얀테의 법칙’
이타적 상호배려로 유대감 ‘쑥’

권리의식이 높은 사람은 자신이 어떤 이유로든 집단에서 우월하므로 그에 합당한 대우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여긴다. 백인으로 태어나서, 공부를 잘해서, 부자라서…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한다. 극도로 강화된 권리의식은 결국 갑질이나 혐오범죄 같은 공격성으로 표출되기에 이른다.

“사람은 단순한 지표 몇 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존재예요. 공부를 잘해서 의사가 됐거나, 돈이 많아서 강남구에 산다고 특별한 존재인가요? 대중의 근본적인 의식 전환이 필요하지만 어려운 문제죠.”

행복을 연구하는 해외 심리학자들은 그동안 한국 사회를 주목해왔다. OECD 국가 삶의 만족도(2020~2022년 평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5.95점(10점 만점·유엔 산하 SDNS 조사)으로 OECD 평균(6.69)에 크게 못 미친다. 국민 소득 수준은 높지만, 국민의 행복도는 절대 빈곤 국가와 비슷하거나 심지어 낮다. “그간 ‘왜 한국인은 불행한가’에 대한 연구는 매우 많았어요. ‘한국의 지나친 집단주의 탓’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억압하는 문화 때문’ 혹은 ‘과시하고 비교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서’ 같은 다양한 분석이 나왔죠. 저는 보이지 않는 계급에서 비롯된 근거 없는 권리의식 때문이라 생각해요. 남을 짓밟으려다 보면 내가 짓밟힐 확률도 높아지니까 모두가 불행할 수밖에 없어요.”

Z세대 사이에서 밈으로 퍼진 ‘사이다 발언’

권리의식이 높아지는 풍조를 비꼬는 유행어가 Z세대 사이에서 ‘밈(MEME)’이 되기도 했다. ‘너 혹시 뭐 돼?’는 유튜버 레오제이의 여행 브이로그 영상 중 “난 방바닥에서 못 자고 침대에서 자야 한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일침을 놓는 장면에서 처음 나왔다. ‘너 대단한 사람이야?’ ‘왜 그렇게 대접받아야 해?’라는 의미를 담아 과한 대우를 원하는 이들의 말이나 상황을 되받아칠 때 ‘사이다 발언’으로 자주 쓰인다.

북유럽 사람들 행동의 바탕이 되는 얀테라겐(Jantelagen·얀테의 법칙)도 주목받고 있다. 얀테는 덴마크계 노르웨이인 작가인 악셀 산데모세가 1933년 출간한 풍자소설 <도망자는 자신의 자취를 가로지른다>(En flyktning krysser sitt spor)에 나오는 허구의 마을이다. 이 마을 주민들이 지켜야 할 10가지 행동규범인 얀테라겐은 ‘당신은 남들보다 특별하다고 생각하거나 더 낫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공동체 의식과 겸손을 강조한다.

북유럽에서는 높은 소득이나 부를 과시하는 것이 금기로 통한다. 불필요한 과시가 집단 내 스트레스를 유발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개인을 통제하고 개성을 억압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북유럽의 행복도를 높여준 뿌리 깊은 가치관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서울의 한 대안학교에서 근무하는 홍정인 교사는 ‘누구도 특별하지 않아서 누구나 소중한’ 얀테라겐을 교육에 적용하기 위해 연구 중이다. 그는 오는 8월 노르웨이 시민학교 ‘폴케호이스콜레’에 입학한다.

“우리는 아이를 향한 사랑과 관심을 ‘너는 특별한 아이야’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제가 만약 교육 일선에서 ‘특별한 사람은 없어. 너도 마찬가지야’라고 한다면 상당한 민원이 쏟아지겠죠. 하지만 ‘특별하다’라는 메시지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꽤 많은 아이가 자의식 과잉으로 괴로워합니다.”

홍 교사는 실체 없는 높은 이상을 기준으로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자기 존재감을 확인할 수 없어 우울해하는 아이들을 자주 본다고 말한다.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 ‘넌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메시지가 아니에요. 남과 비교하지 말고 각자의 고유성이 있다는 걸 인정하자는 거예요. 이는 사소한 실패에 굴하지 않는 단단한 정서를 형성하는 바탕이 됩니다.”

가정은 아이들이 가장 먼저 접하는 작은 사회다. 홍 교사는 가족 안에서 아이에게 ‘너만 특별한 존재’라는 걸 강조할 게 아니라, 가족 구성원 모두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제안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절절매는 것이 존중이 아니에요. 상대적으로 성숙한 존재인 부모가 아이를 돌보고 도와줘야 하지만, 때로는 부모도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고 아이와 평등하게 이야기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주변을 살피지 않고 아기처럼 울어버리는 청소년들이 많다는 것도 교육 현장에서 종종 목격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홍 교사는 얀테라겐을 활용한 가정교육을 몇 가지 제안했다. 타인의 감정이 되어보는 역지사지의 습관을 들이는 것부터 출발한다. 청소년기는 자기 상황이나 감정이 중요한 시기다. ‘이 순간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타인의 감정이나 상황을 추측해보도록 유도하는 것도 방법이다.

홍 교사는 “요즘 아이들은 하숙생도 아닌 호텔 투숙객”이라는 말이 있다고 했다. 어엿한 가족 구성원이라기보다는 일방향적인 관리만 받는 대상이 됐다는 의미다. 전지적인 부모의 ‘풀서비스’가 중·고교를 넘어 대학은 물론 직장 생활, 이후 결혼 생활까지 이어지고 있는 세태에 대한 한탄도 나온다. 그는 아이가 팔을 걷어붙이고 설거지나 방 청소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좋은 훈련이라고 제안한다.

“아이가 가족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은 가정교육의 기본입니다. 우리 학교에서는 자기가 사용한 그릇은 스스로 씻도록 합니다. 한 졸업생이 ‘군대를 가보니 설거지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아 혼나는 이들이 많다’라고 했어요. 아들이 설거지를 못해 좌절을 겪게 해서는 안 되잖아요? 이런 사소한 교육이 큰 결과를 만들어냅니다.”홍 교사는 조화롭게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는 삶의 자세야말로 일상에서 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성공보다 필요한 능력치라고 강조했다.

얀테의 법칙

1 당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2 당신이 남들보다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말아라.
3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4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자만하지 말아라.
5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6 당신이 다른 이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7 당신이 모든 것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8 다른 사람을 비웃지 말아라.
9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관심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10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이든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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