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질 것’ 서약서 쓰고 수능 감독…인권위 ‘폐지권고’에 ‘확인서’로 시늉만

강현석 기자
2021학년도 대입 수학능력시험날인 지난해 12월 3일 경기도의 한 시험장에서 감독관이 입실 시간이 지나자  정문을 닫고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최근 수능 감독관들에게 ‘서약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이준헌 기자

2021학년도 대입 수학능력시험날인 지난해 12월 3일 경기도의 한 시험장에서 감독관이 입실 시간이 지나자 정문을 닫고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최근 수능 감독관들에게 ‘서약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이준헌 기자

“본인은 대학수학능력시험 감독관으로 위촉됨을 승낙하고 임무에 충실함은 물론 시행과정상 지켜야 할 모든 사항을 엄수하며, 만일 그러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서약합니다.”

매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감독관으로 배치되는 교사들은 이런 내용의 ‘서약서’를 사실상 의무적으로 작성해 제출해 왔다. 일부 교사들은 “서약서 작성을 강요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구제를 신청했다.

인권위가 최근 수능 감독관들에게 서약서를 받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단하고 교육부장관에게 개선을 권고했다. 하지만 교육당국은 내용은 거의 그대로 둔 채 ‘확인서’로 이름만 바꿔 올해 수능 감독관들에게도 이를 제출하도록 할 예정이다.

학벌없는 사회를 위한 시민모임은 23일 “인권위가 수능 감독관에게 작성하도록 하는 서약서가 양심의 자유를 제약한다고 판단했는데도 당국이 2022학년도 수능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위촉확인서’를 제출받을 계획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수능 감독관들에게 배치된 교사들에게 서약서를 제출하지 않도록 관련 지침을 개선하도록  권고하는 지난 7월23일 국가인권위원회 결정문. 학벌없는 사회를 위한 시민모임 제공.

수능 감독관들에게 배치된 교사들에게 서약서를 제출하지 않도록 관련 지침을 개선하도록 권고하는 지난 7월23일 국가인권위원회 결정문. 학벌없는 사회를 위한 시민모임 제공.

경향신문 취재결과 지난해 경기와 서울지역에서 수능 감독관으로 투입된 교사 2명은 “서약서 제출이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인권위에 구제를 신청했다. 조사를 진행한 인권위는 지난 7월23일 교육부장관에게 관련 지침을 개선해 서약서 제출을 폐지하도록 권고했다.

인권위 조사에서 교육부는 “서약서 작성은 성실히 감독 업무를 수행할 것을 요구하고 감독관은 이에 동의하는 일종의 ‘주의환기 절차’로 행정절차에 불과하다”면서 “다른 국가 주관 시험 등에서도 작성하고 있고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법·부당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강제하는 수단도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권위는 수능 감독관들의 성실성과 책임감을 서약서로 작성하도록 해 강제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로 판단했다. 인권위는 ‘대학수학능력시험 업무처리지침’을 마련할 때 수능 감독관에게 서약서를 제출하도록 하는 내용을 포함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수능시험에 감독관으로 배치된 교사들이 그동안 작성했던 서약서(왼쪽). 교육당국은 지난달 국가인권위원회과 서약서 제출이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단한 이후 이를 위촉확인서(오른쪽)로 대체하기로 했다. 하지만 확인서 내용은 기존 서약서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학벌없는 사회를 위한 시민모임 제공.

수능시험에 감독관으로 배치된 교사들이 그동안 작성했던 서약서(왼쪽). 교육당국은 지난달 국가인권위원회과 서약서 제출이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단한 이후 이를 위촉확인서(오른쪽)로 대체하기로 했다. 하지만 확인서 내용은 기존 서약서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학벌없는 사회를 위한 시민모임 제공.

인권위 권고이후 교육당국은 올해 수능부터 감독관들에게 서약서 대신 위촉확인서를 제출받는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임무에 충실함은 물론 시행과정상 지켜야 할 모든 사항을 엄수할 것을 확인합니다”라는 내용의 확인서는 “책임을 질 것을 서약한다”는 내용만 빠졌을 뿐 사실상 기존 서약서와 내용이 같다.

박고형준 학벌없는 사회를 위한 시민모임 상임활동가는 “교육당국의 이런 조치는 인권위 결정의 근본 취지를 헤아리지 못한 것”이라면서 “인권위 결정에 따라 수능 감독관의 서약서 등 불필요한 행정업무를 폐지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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