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영장엔 버젓이 ‘암호 푼 상태로’…내 정보, 풀라면 풀어야 하나

이범준·전현진 기자

첨단 과학수사의 위협적 실태

그래픽 | 현재호 기자 hyun@kyunghyang.com

그래픽 | 현재호 기자 hyun@kyunghyang.com

사회가 디지털화되면서 수사기관의 전자정보 압수수색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기존 압수수색과 차원을 달리한다. 디지털 데이터는 나도 미처 모르는 나에 관한 정보로 가득하다. 나의 삶과 의도를 재구성할 수 있는 데이터다. 검찰을 비롯한 수사기관은 무차별로 이런 정보를 수색·압수·축적·재생하고 있다. 인권의 보루인 법원도 통제장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휴대전화 잠금을 해제하라는 등의 위헌적인 영장을 발부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른바 실체적 진실 발견이라는 수사기관의 명분과 처벌주의 여론에 편승하고 있는 것이다. 최첨단 전자정보 압수수색이 최악의 인권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공공기관에서 프리랜서로 전산 업무를 하던 A씨에게 2018년 겨울 서울중앙지검 수사관들이 찾아왔다. 압수 장소도 맞지 않는 영장을 보여주며 노트북을 내놓으라고 했다.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이라면서도 협조하지 않으면 피의자로 전환해 구속할 수 있다고 했다. 과거 일하던 회사의 임원이 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수사를 받는 것 때문이었다. 노트북에 별다른 것은 없었지만 수사관의 압박을 견디기 힘들었다. 자신에게 일을 맡겨온 회사들에 일일이 전화해, 뭐라도 뒤져서 문을 닫게 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결국 A씨는 자신의 노트북을 검찰에 넘겼다.

수사관은 임의제출 확인서에도 서명하라고 했고, A씨는 압박에 못 이겨 노트북을 내면서도 자의로 낸다고 서명했다. 수사관은 반말과 고성으로 노트북 암호를 입력하라고 했고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노트북에 연결된 모든 e메일과 클라우드에 저장된 파일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스스로도 잊었던 과거의 모든 기록이 생생히 드러났다. 다음날에는 제출한 노트북을 돌려받았다는 종이에도 이름을 적었다. 하지만 실제로 노트북을 되찾은 때는 거의 1년이 지나서다. 노트북 속 데이터는 이미징이라는 기술로 그대로 복사돼 검찰청에 있다. 지웠다는 연락은 받지 못했다.

수사관 압박에 ‘자의 제출’ 서명
검찰로 간 노트북 ‘이미징’ 복사
1년이 지나서야 돌려줬지만
지웠다는 연락은 받지 못했다

A씨는 휴대전화를 형식적인 임의제출 확인서조차 쓰지 않고 검사에게 암호를 풀어 보여주어야 했다. “내 눈을 쳐다봐라. 네 눈을 보니 거짓말 하는 눈이다. 내가 우리나라 10대 그룹 회장을 다 조사한 사람이야. 그 사람들도 내 앞에서 벌벌 기면서 자료 다 내놓고 갔다. 똑바로 안 하면 평생 살게 해줄 수도 있어.” 이런 협박에 암호패턴을 풀어 휴대전화를 넘겨줬다. 카카오톡, 문자메시지를 시작으로 통화기록, 검색기록까지 하나하나 뒤지기 시작했다. 무작정 수사를 확장하는 단서로 삼았다. 지금도 A씨는 서울중앙지검과 비슷한 국번인 02-5XX에서 전화만 와도 심장이 쿵쾅거린다.

대기업 임원인 B씨는 국회의원 등 유력인 자녀를 직원으로 뽑아준 혐의로 2019년 기소됐다. 그런데 부정 채용은 2012년과 2013년에 있었다. 이렇게 오래된 사건을 뒤져 검찰이 기소한 배경에는 휴대전화와 아이패드 등에 들어있는 7년이나 지난 문자메시지 등 데이터를 검찰이 확보한 게 있었다. B씨는 2013년 다른 일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가 전부 무죄를 받았는데, 당시 압수된 아이폰, 아이패드2, 아이패드미니 데이터가 검찰에 모두 남아 있었다.

2013년 수사 당시 B씨에 대한 법원의 압수수색 영장을 보면 혐의에 관한 자료만 출력하거나 복사하라고 돼 있다. 특히 “증거물 수집이 완료되고 복제한 저장매체를 보전할 필요성이 소멸된 후에는 혐의 사실과 관련 없는 전자정보를 지체없이 삭제·폐기하여야 함”이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검찰은 영장을 무시하고 데이터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가, 채용비리 수사를 개시하면서 다시 뒤졌다. 2013년 서울중앙지검이 압수해 보관하던 자료를 2019년 서울남부지검이 법원에서 영장을 발부받아 새롭게 압수했다. 검찰이 영장을 받은 이유는 법원에 유죄 증거로 내기 위해서다.

법조계 관계자는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검찰의 불법적인 데이터 보관을 법원이 통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간접적으로 돕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사건에서도 서울남부지법 영장판사가 서울남부지검 검사에게 아무런 이의 없이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해줬다. 이후 재판 과정에서 B씨 변호인이 검찰의 위법한 증거수집이라고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면서 해당 증거는 무효가 됐다. 하지만 검찰은 이들 무효화된 증거를 발판으로 수사를 벌였고 다른 증거들로 유죄를 받아냈다.

검찰이 부당하게 전자정보를 압수하고 법원이 이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쉽게 발부하는 것에 대해 수사 대상자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에는 압수수색 영장의 발부 여부나 범위가 적절한지를 다투는 제도가 없다. 재판이 시작되어서야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라고 주장할 수 있다. 검찰의 수사나 법원의 영장 발부를 시비해서 좋을 게 없다고 조언하는 변호사들이 대부분이다. 그 말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당한 영장 발부와 위법한 수사가 반복된다. 검찰 손에 들어간 디지털 정보는 언제 어떻게 쓰이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가 된다.

암호 입력 요구는 위헌적 수사
영장 발부 여부·범위 적절한지
다투는 제도가 한국엔 없어
외국선 광범위한 증거분석 금지

요즘 법원이 발부하는 전자정보 압수수색 영장의 또 다른 문제는 수사 대상자에게 휴대전화의 암호 입력 등 행위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조세 문제로 수사를 받은 C기업 압수수색 영장에는 “e메일과 전사적자원관리시스템(ERP)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외국 서버에 저장된 전자정보에 접근토록 요청하여 포렌식 기법으로 관련 자료를 발췌하는 방법으로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라)”고 적혀 있다. 휴대전화와 노트북도 마찬가지다. “전자정보가 암호화되어 있는 경우, 암호 해제된 상태의 전자정보”를 압수하라고 적힌 영장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법원이 피의자에게 행위를 요구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검사 출신으로 서울대 형사소송법 박사인 조성훈 변호사는 “피압수자는 수사기관의 수색·압수를 소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어떠한 적극적인 행위 의무도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이러한 영장이 헌법 위반이란 지적도 있다. 암호 제공은 형사상 불리한 진술에 해당해 헌법 제12조 제2항이 보장하는 진술거부권에 반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피압수자에게 암호를 입력하라는 등의 전자정보 접근권한 제출명령(subpoena)이 묵비권을 보장하는 수정헌법 제5조 위반이라는 판결이 다수다. 다만 아직은 하급심 판결 수준이지 연방대법원 판결은 없다.

전자정보 압수수색 현장에서는 변호사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201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전자정보 압수수색 과정에 당사자나 변호인 참여권을 보장하지 않는 것은 중대한 흠결이라고 처음으로 판결했다. 그렇지만 변호사가 압수수색 현장에 있어도 검찰이 적법하게 집행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압수수색에 참여한 경험이 많은 대형 로펌 변호사 설명이다. “검찰에서는 검사와 포렌식 전문 수사관이 압수수색을 집행한다. 일부 로펌에 포렌식 전문가가 있지만, 검사가 현장에 들여 보내주지 않는다. 변호사들이 압수수색 과정을 지켜보다가 의문이 생기면 전화로 상의하는 정도다.”

2015년 전원합의체 판결이 늦게나마 불법적인 전자정보 압수수색에 제동을 걸었지만 책상 서랍, 종이장부를 압수하던 시절 판결을 답습했다는 비판도 있다. 대표적으로 ‘우연한 발견’을 인정한 것이 있다. 대법원은 “별도의 범죄 혐의와 관련된 전자정보를 우연히 발견한 경우라면 (중략)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압수수색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강수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수사기관으로서는 우연히 발견한 수많은 별도 정보를 토대로 원하는 수사의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있다”며 “별건 구속 등 금지된 별건 수사의 폐해와 유사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2019년 검찰은 사법농단 수사를 빌미로 유해용 전 판사 컴퓨터에서 공문서를 발견해 유출 혐의로 기소했는데, 찾으려던 청와대 관련 파일이 없자 검색어를 뒤틀어 발견한 ‘우연’이었다. 법원은 압수수색도 불법이고 문서도 공문서가 아니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처럼 전자정보 압수수색이 불법적인 수사로 이어지자 외국에서는 제한이 시작됐다. 2009년 미국 제9연방항소법원은 디지털 압수수색 지침을 제시했다. 판결을 통해 한국의 ‘우연한 발견’ 이론의 원조 격인 ‘맨눈 발견(plain view)’ 이론을 폐기했다. 수사기관의 광범위한 증거분석 시도를 금지한다는 선언이다.

이 법원은 미국에서 연방대법원 다음으로 영향력이 크다. 관할인 캘리포니아에는 구글, 페이스북 등 글로벌 정보통신 기업들이 있어 전자정보 압수수색과 관련성도 크다. 제9연방항소법원은 특히 압수수색과 수사과정을 분리하라고 했다. “수사 담당자는 증거분석 과정에 일절 개입하지 못하고, 디지털 포렌식 요원이 분리한 증거에만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압수수색과 수사는 물론, 기소까지 한 기관에서 해야 효율적이란 주장이 검찰에서 나오고, 이를 지지하는 여론도 적지 않다. 인권보다는 처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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