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답지 않다’며 성추행 가해자에 무죄…대법 “잘못된 통념 따른 판결, 다시 판단해야”

김희진 기자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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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피해자의 태도가 ‘피해자답지 않다’며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강제추행 사건을 대법원이 다시 판단하라며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원심이 잘못된 통념에 따라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했다고 지적하면서, 피해자가 처한 구체적 상황을 토대로 진술의 합리성을 따져야 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A씨(70)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의정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8일 밝혔다.

A씨는 2019년 1월 경기 구리시에서 채팅앱을 통해 만난 30대 여성 B씨를 모텔로 데려가 강제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씨는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는데 추우니 모텔에 들어가자”면서 “국가대표 감독을 한 적 있는 나를 믿어라.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겠다”며 B씨를 모텔로 데려간 것으로 조사됐다.

재판에선 유일한 직접증거인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여부가 쟁점이 됐다. 1심은 B씨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A씨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반면 2심은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사건 발생 전후 피해자의 태도가 강제추행을 당한 피해자라고 하기에는 수긍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이유였다.

2심은 B씨가 A씨를 채팅앱에서 처음 만났는데 별다른 거부 없이 모텔에 들어간 점, 모텔에서 나올 때 A씨 차를 탄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2심 재판부는 “강제추행 피해를 당했다고 하면서도 즉시 도움을 요청하거나 모텔을 빠져나오려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며 “피해자가 다른 사유에 의해 고소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대법원은 “(원심은) 잘못된 통념에 따라 통상의 성폭력 피해자라면 마땅히 보여야 할 반응을 상정해 두고 이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피해자 진술의 합리성을 부정했다”며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여러 정황을 따져보면 피해자의 진술은 주요 부분이 일관되고 구체적이며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B씨가 ‘나이가 많은 A씨가 춥다며 모텔에 들어가자고 했다’고 진술한 데 대해 대법원은 “나이 차이, 피해자의 심리 상태 등에 비춰 피해자의 행동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고, 피해자가 모텔에 들어가는 데 동의하고 안아보는 걸 허락했다 해도 그 이상의 성적 접촉은 원하지 않았다는 피해자 진술을 의심할 만한 사정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했다.

B씨가 모텔에서 나와 A씨 차에 탄 행위에 대해서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컸던 A씨로부터 갑작스럽게 심한 추행을 당해 극도로 당황하고 두려움과 수치심을 느끼게 된 상황이었다면, 피해자가 홀로 모텔을 빠져나오지 않은 채 피고인의 차를 탄 점이 매우 이례적이라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B씨 지능지수(IQ)가 낮고 사기 피해를 당해 힘들어하는 등 심리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던 점, 고소하기 전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는 점 등도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사정으로 고려됐다.

대법원은 성폭력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나이, 성격, 가해자와의 관계 등 구체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점도 구체적으로 판시했다. 대법원은 “피해자는 본격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기 전까지 피해사실이 알려지길 원하지 않고, 가해자와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가해자에 대해 이중적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고 했다. 또 피해자가 일정 수준의 신체접촉을 용인했더라도 자신이 동의한 범위를 넘어선 신체접촉을 거부할 수 있으며, 피해 상황에서 명확한 판단이나 즉각적 대응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고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성폭력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 기존의 잘못된 통념을 극복하고 피해자가 처한 상황에 기초해 판단해야 한다’는 법리를 보다 구체화한 판결”이라며 “향후 유사한 사건 판단에서 하급심에 대한 지침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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