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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에게 한 발 나아간 법…5대 3 쪼개진 대법관, ‘강제추행’ 논쟁은 계속

김희진 기자
김명수 대법원장의 마지막 전원합의체 선고일인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 등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자리에 앉아 있다. 한수빈 기자

김명수 대법원장의 마지막 전원합의체 선고일인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 등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자리에 앉아 있다. 한수빈 기자

1953년 9월 제정된 최초의 형법은 강간과 강제추행죄를 ‘정조에 관한 죄’로 묶었다.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던 법은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했다. ‘순결’하고 ‘흠결 없는’ 피해자가 ‘충분히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을 때’만 강제추행죄를 인정했다. 좁디좁은 범위에서만 강제추행죄를 인정한 탓에 다수 피해자는 법의 울타리 밖에 놓였다.

몇 차례 전환점을 거쳐 강제추행죄의 처벌 범위는 확대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21일 변한 시대상과 판례를 반영해 또 다른 전환점이 될 판결을 내놓았다. 강제추행죄 성립 요건인 ‘폭행 또는 협박’이 인정되려면 ‘피해자의 항거가 곤란할 정도’여야 한다는 기존 판례를 폐기하고 기준을 완화해 처벌 범위를 넓힌 것이다.

여성계는 대법원 판결을 환영했다. 그러나 강제추행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대법관들은 판례를 변경하는 다수의견을 내면서도, 바뀐 판례에 따라 강제추행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두고 첨예한 논박을 벌였다. 상대방의 동의 여부를 헤아려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첫 전환점, 1983년 대법원 판결 “기습추행도 강제추행죄 성립”

강제추행죄의 첫 번째 전환점은 기습적인 방식의 추행을 강제추행죄로 처음 인정한 1983년 대법원 판결이다. 대법원은 당시 “강제추행죄에 있어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해 추행을 한다는 것은 ①먼저 상대방에 대해 폭행 또는 협박을 가해 항거를 곤란하게 한 뒤 추행행위를 하는 경우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②폭행행위 자체가 추행행위라고 인정되는 경우도 포함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 판결은 이른바 ‘폭행·협박 선행형’(①) 뿐 아니라 ‘기습추행형’(②)까지 강제추행죄로 인정해 범죄 성립범위를 대폭 확대했다고 평가받는다. 당시 대법원은 폭행·협박선행형의 경우 폭행 또는 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고 했다. 폭행과 협박을 가장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최협의설’이다. 반면 기습추행형의 경우 상대방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 행사가 있다면 힘의 대소강약을 불문한다고 봤다.

강제추행죄를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각각이 요하는 ‘폭행 또는 협박’ 기준을 별개로 정의한 이 판례는 그 후 40년간 법 해석의 뼈대가 됐다. 이 뼈대를 토대로 강제추행죄 성립 범위를 넓히는 판례들이 쌓여왔다. ‘폭행·협박의 내용과 정도는 유형력을 행사하게 된 경위, 피해자와의 관계, 당시와 그 후 정황 등 모든 사정을 종합해 피해자가 당시 처했던 구체적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신체접촉 없이도 성적 자유를 침해한 경우 강제추행죄가 성립할 수 있다’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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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40년 만에 판례 변경…‘항거곤란’ 폐기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폭행·협박선행형에 한해 1983년 대법원 판례를 변경했다. 폭행 또는 협박이 시간상으로 앞서 추행의 수단이 됐을 때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하는 정도’여야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는 기존 판례를 폐기했다. 대신 ‘가해자가 유형력을 행사(폭행)하거나 공포심을 일으킬 정도의 해악을 고지(협박)’했다면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는 새 기준을 제시했다.

강제추행죄 판단 기준의 초점을 피해자의 상태 대신 가해자의 행위로 옮긴 것이다. 대법원은 강제추행죄의 보호법익은 과거처럼 ‘정조’가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이란 점을 재확인했다. 그러면서 피해자에게 ‘정조’ 수호 태도를 요구하는 입장을 전제로 한 기존 판례는 더는 타당하지 않다고 했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항거곤란’이라는 피해자의 내심 의사를 추가로 요구하는 종래 판례는 결국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거나 2차 피해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며 이번 판결을 환영했다. 1983년 대법원 판결이 기습추행형을 강제추행죄 처벌 범위로 끌어들였다면, 이번 판결은 폭행·협박선행형의 판단 기준을 변한 시대상에 맞게 재정의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40년 만에 피해자를 보호하는 쪽으로 처벌 범위를 넓힐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대법관 5명 “과잉처벌 우려, ‘추행’ 엄격하게 해석해야”

이동원 대법관을 제외한 대법관 12명은 모두 다수의견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보충의견에선 5대 3 등으로 쪼개져 치열한 논박을 벌였다. 주된 쟁점은 바뀐 판례가 강제추행죄 성립 범위를 지나치게 확대할 우려가 있는지 여부였다.

안철상·노태악·천대엽·오석준·서경환 대법관은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 의미를 엄격하게 제한한 해석론을 바꾸는 이상 앞으로 강제추행죄의 ‘추행’에 대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정도에 이르는 경우’로 엄격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추행의 정도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한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까지 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면, 처벌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체접촉 부위’ ‘추행 정도’ 등 구체적 행위 태양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앞선 판례는 신체접촉이 없더라도 피해자의 성적 자유가 침해된 사실이 인정되면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고 보는 데까지 나아갔는데, 이는 ‘폭행 또는 협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기존 법리를 보완하기 위한 대안적 해석의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 대법관은 또 ‘폭행 또는 협박’ 기준을 별도로 설정한 기습추행형도 앞으로는 폭행·협박선행형과 일원화해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두 유형에서 폭행의 정도를 달리 볼 근거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이전부터 있었던 데다 바뀐 판례로 둘을 구분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바뀐 판례에 따라) 과잉 처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재판 실무상 주의를 기울여 적절히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마지막 전원합의체 선고일인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 등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자리에 앉아 있다. 한수빈 기자

김명수 대법원장의 마지막 전원합의체 선고일인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 등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자리에 앉아 있다. 한수빈 기자

“처벌범위 부당하게 넓혀지지 않아” 대법관 3명 반박

반면 민유숙·김선수·오경미 대법관은 앞선 대법관 5명의 보충의견을 반박했다. 이들은 “원치 않는 성적 행위를 거부할 권리(소극적 성적 자기결정권)의 경우 상대방 의사에 반하는 성적 접촉이 발생한 이상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됐고, 이미 침해된 권리에 대해 본질적 침해인지 비본질적 침해인지 구분할 여지가 없다”고 맞섰다.

본질적 침해 여부를 구분하는 것은 기존에 확립된 대법원 판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법원은 최근에도 피해자의 손목을 잡아끌거나 어깨를 주무른 행위, 이른바 ‘헤드락’을 한 행위 등에 대해 모두 추행성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5명 대법관이 언급한 ‘신체접촉 부위’ ‘추행 정도’는 그동안 대법원이 단 한 번도 고려요소로 언급한 적 없다고도 했다.

기습추행형 유형에 대해서도 폭행·협박선행형과 범행 구조상 분명한 차이가 있어 개별적으로 취급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폭행·협박선행형인 이번 사건에서 기습추행형 법리의 일원화 여부를 논의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도 했다.

이들은 “다수의견은 강제추행죄의 폭행·협박 의미를 명확하게 다시 정의함으로써 사실상 변화된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현재 재판 현실과 종래 판례 법리 사이 불일치를 해소하려는 것”이라며 “처벌범위를 부당하게 넓히려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노정희 대법관 “세계 국가들, 피해자 ‘저항→동의 부재’ 기준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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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희 대법관은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의 의미를 해석할 때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의 본질이 ‘동의 부재’에 있다는 점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계 주요 국가의 법률 등이 피해자의 ‘저항’을 요구하던 데서 피해자의 ‘동의 부재’를 본질적 기준으로 파악하는 쪽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했다.

노 대법관에 따르면 독일은 2016년 개정 형법에서 폭행·협박을 구성요건으로 하던 종전 ‘성적강요죄’ 외에 ‘성적침해죄’를 신설했다. 피해자 동의를 받지 않은 추행행위를 포함한 비동의 성범죄를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폭행·협박이 동반된 경우는 가중처벌한다. 미국은 2022년 연방형법을 개정해 폭행·협박 등을 수반하지 않더라도 타인의 동의 없이 성적 행위나 접촉을 하면 강간죄·강제추행죄가 성립하고, 폭행 또는 협박을 동반하는 경우 가중처벌하도록 했다.

노 대법관은 “입법적으로 비동의 성범죄를 도입할 것인지와 별개로 현행 형법 등이 정한 ‘폭행 또는 협박’ 의미를 법 문언보다 협소하게 해석해 피해자의 항거곤란성을 요구하는 종래 판례는 전체 법질서 내에서 더 이상 정당성과 합리성을 인정받기 어렵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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