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산은 낙태, 전성적 존재는 동성애 유도” 혐오에 굴복한 교육과정

김나연 기자

기독교계 “재생산·생식은 낙태 종용”

국제사회, ‘재생산 권리’ 인권으로 인정

기독교계 반발에 쟁점과 무관한 표현까지 삭제

이배용 국가교육위원회 위원장이 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가교육위원회 제4차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회의가 시작되었으나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자리가 비어 있다. 연합뉴스

이배용 국가교육위원회 위원장이 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가교육위원회 제4차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회의가 시작되었으나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자리가 비어 있다. 연합뉴스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가 지난 6일부터 심의에 들어간 2022 개정 교육과정 심의안에서 ‘재생산 권리’ ‘생식권’ 등 성교육의 중요 개념들이 상당수 삭제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완전한 성인’을 뜻하는 ‘전성적 존재’라는 표현까지 사라지면서 일부 보수 기독교계의 무차별적 혐오 공세에 교육부가 굴복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교육부가 지난 6일 공개한 2022 개정 교육과정 심의안을 보면 고등 보건 교과의 ‘성·생식 건강과 권리’가 ‘성 건강 및 권리’로 수정됐다. 앞서 지난달 9일 발표한 행정예고안에서는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성·생식 건강과 권리’로 바꿨는데 이를 다시 수정한 것이다. 교육과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재생산’과 ‘생식’ 표현이 모두 빠졌다.

‘재생산 권리’는 ‘차별, 강압,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로운 상태에서 임신과 출산을 결정하고 존중받을 권리’ ‘임신과 출산에 대한 정보를 받을 권리’ ‘평등하고 안전한 관계를 맺을 권리’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유엔 국제인구개발회의에서 인권으로 인정됐으며 국제인권규범, WHO 지침 등에 명시돼있다. 영어로는 ‘reproductive rights’라고 표기해서 ‘생식권’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재생산은 낙태, 전성적 존재는 동성애 유도” 혐오에 굴복한 교육과정

기독교 단체들은 재생산 권리와 생식권이 임신중지를 정당화한다며 반대했다. 이들은 “성적 자기 결정권을 지나치게 강조해 낙태를 자유롭게 하도록 만드는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해당 표현들이 임신중지를 조장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됐다”고 했다.

교육과정 개정에 참여한 정책연구진은 재생산 권리와 생식권을 명시할 필요성을 인지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A연구원은 “재생산 권리를 통해 임신·출산, 미혼 부모 등에 대한 사회적 권리가 마련된 맥락을 학생들과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서도 “‘재생산’이라는 표현이 낯설다는 의견과 기독교계의 반발을 고려해 행정예고 전에 ‘생식’으로 수정했다”고 했다. 이후에도 기독교 단체들은 영어로 번역하면 같은 의미라며 ‘생식’마저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A연구원은 “근본적으로는 표현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압력이 거세지면 성교육 자체가 원활히 진행되기 어렵겠다는 우려가 커져 삭제하게 됐다”고 했다.

교육부가 기독교계의 요구를 무분별하게 수용하면서 동성애와 상관없는 표현도 삭제됐다. 실과 과목에서는 ‘전성(全性)적 존재’라는 용어가 삭제됐다. 기독교계는 “성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돼있다”며 삭제를 요구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원래는 ‘완전한 성인’이라는 뜻인데 오해의 소지가 있고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내용이라 삭제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시대착오적인 개정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낙인과 배제 없이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로 변화하고 있는데 이에 역행하는 것”이라며 “교과서에 관련 단어조차 등장하면 안 된다는 것은 편협하고 보수적인 세계관”이라고 했다. 허민숙 여성학자(국회 입법조사관)도 “재생산 권리는 선택의 자유에 해당하는 기본적 권리”라며 “교육과정에서 지우는 것은 이런 권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무책임한 선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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