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백남기’ 생명 앗아간 정권, 사과커녕 병원에 ‘공권력’

고영득 기자

농민 백남기씨(70)는 서울에 올라오기 직전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 일군 8000여㎡(약 2500평)의 밭에 밀씨를 뿌렸다. 그날 ‘사건’만 없었다면 백씨는 지난 여름 정성스레 키운 밀을 수확하며 함박웃음을 지었을지 모른다.

오랜 세월 우리밀 살리기 운동에 앞장서온 백씨는 지난해 11월14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제1차 민중총궐기 대회에 참가했다. 쌀값이 폭락해 농민들 삶이 피폐해지자 “박근혜 대통령은 쌀 수매가 현실화 공약을 지키라”고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경찰은 그에게 직사 물대포로 응대했다. 백씨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가까스로 집회 참가자들의 도움으로 병원에 옮겨졌지만 백씨는 그날 이후 눈을 뜨지 못했다. 백씨는 외롭게 자란 밀알을 만져보지도 못한 채 결국 317일 만에 병원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했다.

[속보]경찰 물대포에 ‘중태’ 농민 백남기씨 317일만에 사망

하루 두 번 면회가 허용되는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을 드나드는 가족들은 매일매일이 고통의 나날이었다. 가족은 국가폭력에 희생된 만큼 국가가 사과하고 관련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나 경찰로부터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다. 경찰은 불법 폭력시위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었다는 이유를 댔다. 백씨가 병상에 누운 지 300일이 지나서야 국회에서 청문회가 열렸지만 진상은 규명되지 않았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처벌받지도 않았다.

지난 1월 한국을 방문한 바 있는 마이나 키아이 유엔 ‘평화적 집회 및 결사의 자유 특별보고관’은 6월 유엔 인권이사회 회의에서 백씨 사례를 언급하며 “물대포 사용이 무차별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특정인을 겨냥해 물대포를 사용하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부는 “평화롭고 합법적인 시위대에 물대포를 사용한 적이 없고 불법폭력 시위자를 막는 데 사용됐을 뿐”이라며 책임을 외면했다.

백씨의 딸과 부인은 청와대 앞에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1인시위까지 벌였지만 청와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12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 3당 대표 간 회동 때는 물론, 앞서 지난 5월 열린 3당 원내대표 회동에서도 백씨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야당 측 요구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현장을 총지휘한 경찰총수 역시 백씨 병문안은커녕 공개 사과마저 거부했다. 지난 12일 국회 안전행정위원회가 개최한 청문회에서 강신명 전 경찰청장은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공식 사과를 거부했다. 강 전 청장은 “원인과 법률적 책임을 명확히 한 후에 할 수 있다. 결과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 대단히 적절치 않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은 진상 규명을 위해선 경찰이 사건 초기 작성한 청문감사보고서를 확인해야 한다며 보고서 제출을 요구했지만, 경찰은 검찰 수사와 재판이 진행 중인 사항이어서 제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끝까지 고수했다.

그러나 경찰이 언급한 검찰 수사는 한 박짝도 나가지 못했다. 백씨 가족은 국가를 상대로 2억4000만원 규모의 국가배상청구 및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고, 강 전 청장 등 7명을 살인미수 혐의로 고발했다. 이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가 맡았다. 하지만 검찰 수사는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2일 “사건의 복잡성을 감안하더라도 수사가 지금과 같이 더디게 진행된다면 진상규명은 더 어려워질 수 있다”며 “시위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에 대해 신속하게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백남기씨와 같은 불행한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검찰총장에게 신속한 수사를 촉구했다. 앞서 인권위는 2008년과 2012년 경찰이 시위 진압을 위해 살수차를 사용할 경우 인체에 대한 심각한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 판단해 물대포의 최고 압력이나 최소 거리 등 구체적 사용기준을 법령에 명시하도록 경찰에 권고했다. 그러나 경찰은 살수차 운용지침에 따라 안전하게 사용하고 있다며 인권위 권고를 수용하지 않았다.

백씨를 치료해온 서울대병원 의료진은 토요일인 지난 24일 약물 치료도 어려울 만큼 백씨가 위독한 상황이어서 주말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고 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병원 앞에 마련된 천막 농성장에 하나둘 모였다. 경찰은 장례식장 입구 등 서울대병원 주변에 병력을 배치해 시민들의 반발을 샀다. 이날은 백씨가 칠순이 되는 날이었다.

백남기씨 딸인 민주화씨는 지난 24일 페이스북에 “오늘이 저희 아버지 칠순 생신입니다”라고 전했다. 이어 “아빠, 아직 살아있어줘서 정말 고마워. 예쁜 손자 2년밖에 못봐서… 참 미안하다. 사랑해, 아빠”라는 글과 함께 백씨가 손자를 안고 있는 사진을 올렸다.  백민주화씨 페이스북

백남기씨 딸인 민주화씨는 지난 24일 페이스북에 “오늘이 저희 아버지 칠순 생신입니다”라고 전했다. 이어 “아빠, 아직 살아있어줘서 정말 고마워. 예쁜 손자 2년밖에 못봐서… 참 미안하다. 사랑해, 아빠”라는 글과 함께 백씨가 손자를 안고 있는 사진을 올렸다.  백민주화씨 페이스북


Today`s HOT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불타는 해리포터 성 해리슨 튤립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