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억 쏟은 기상관측장비 놀리고…‘복붙’ 재난문자만 남발

김현수 기자

전국 지자체에 4323대 설치…누적강수량 등 확인 가능해

예천 군민 “70통 왔지만 형식적”…지역별 상황 정보 안 담겨

전문가 “촌락 특성상 이장들과 연락망 가동, 선제적 대피를”

전국적으로 1000억원을 들여 설치한 기상관측장비가 주민 대피를 알리는 재난문자 발송에 전혀 활용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자체마다 내부 시스템을 통해 누적강수량 등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도 대부분의 지자체는 ‘복사 후 붙이기’ 방식의 스팸성 재난문자만 주민들에게 수십통 발송했다.

18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경북 예천군은 집중호우가 내린 지난 14일 오전 1시47분쯤 ‘우리 지역 호우주의보 발효 중’이라는 내용의 재난문자 1건을 발송했다. 이후 15일 새벽 예천읍·용문·효자·감천·은풍면 등 5개 읍·면에서 산사태 등으로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예천군은 재난문자 17건을 발송했다. 이날 폭우로 예천군에서만 12명이 숨지고 5명이 실종됐다.

이 문자들은 대부분 ‘예천군 전 지역 산사태 경보’ ‘호우로 침수 위험 발생’ ‘위험지역 접근금지’ 등 행정안전부와 산림청 등이 보낸 문자와 같은 내용이었다. 산사태 특성상 가장 중요한 누적강수량에 대한 정보는 아예 없었다.

강수량 정보는 지자체 내부망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자체는 자동기상관측장비(AWS) 또는 강우량계를 구비하고 있다. 이 장비는 1~10분 간격으로 설치된 지역의 강수량을 측정한다. 원하는 시간대 해당 지역에 어느 정도 비가 내렸는지, 최대 강수량은 얼마인지 클릭만 하면 알 수 있다. 성능에 따라 풍속과 풍향까지 실시간으로 제공된다. 하지만 이번 폭우로 인명피해가 발생한 예천·영주·봉화·문경에서 이 같은 정보를 포함해 재난문자를 발송한 지자체는 없었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 1월1일 기준 AWS·강우량계는 전국에 4323대가 설치돼 있다. 1대 가격이 600만~8000만원인 점을 고려하면 전체 설치 비용만 1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농촌의 경우 수도권과 대비해 넓은 면적에 적은 인구가 흩어져 살고 있다”며 “천편일률적인 재난문자를 받고 어르신들이 위기감을 느껴 대피하길 바라는 것은 탁상공론”이라고 지적했다.

예천군의 면적(661.5㎢)도 서울(605.25㎢)보다 넓다. 인구수는 5만5672명(지난달 기준)이다. 서울 인구(841만8885명)의 0.66%가 서울보다 큰 면적에 사는 셈이다. 실제 지난 15일 예천읍에서는 102㎜의 비가 내렸지만, 지보면에는 절반 정도인 59㎜에 그쳤다.

산사태 현장에서 만난 주민 원순남씨(56·영주시 풍기읍)는 “군청이나 행정안전부 등 온갖 기관에서 온 문자가 70통이 넘는다”면서 “이제껏 비가 많이 와도 산사태가 난 적은 없어서 사고를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70대 주민 김모씨(예천군 효자면)도 “지금도 문자가 계속 들어오지만 형식적이어서 잘 안 본다”고 말했다.

지자체의 재난문자가 일종의 ‘면피성’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재난·재해 상황이 발생하면 각 기관이 하루에도 수십건씩 무차별적으로 재난문자를 발송하는데 정작 중요한 정보는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재난문자를 많이 보낸다는 것 자체가 놀지 않고 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단이 됐다”며 “중복되는 재난문자를 보내지 말라는 민원도 있지만, 자치단체장 입장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지자체가 재난문자 송출 권한을 받은 것은 2016년 경북 경주 지진 발생 이후다. 당시 정부가 지진 이후 10분이나 늦게 재난문자를 발송하면서 논란이 됐다. 이후 정부는 광역지자체와 기초지자체에 재난문자 송출 권한을 줬다.

정영훈 경북대 건설방재공학과 교수는 “촌락의 특징을 고려해 마을 이장들과 비상연락망을 항시 가동하면서 많은 비가 올 것으로 예상될 때는 반강제적으로라도 대피시키는 등 더욱 현실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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