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② 과부하 걸린 한국의 가족

유정인·박은하 기자 사진 김영민·강윤중 기자

연애·결혼·출산 포기 ‘삼포세대’… 버거운 삶의 비용, 가족도 사치다

국가가 떠민 복지를 가족이 해결하는 방식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 부담이 임계점을 넘어설 때 ‘가족’은 더 이상 꾸려지지 않고, 저출산은 사회적 위험이 된다.

오늘날 우리의 청년층이 그렇다. 불안정한 일자리, 학자금 대출상환, 기약 없는 취업준비, 치솟은 집값 등 과도한 삶의 비용으로 인해 이들은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거나 기약 없이 미룬다. 가족 구성에 필요한 통상적인 세 단계를 포기한 이른바 ‘삼포(三抛)세대’의 출현은 복지 부재의 사회에서 전통적인 가족 형성의 공식이 와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의 저자 엄기호씨는 이를 두고 ‘가족의 종말’이라고 지적한다. “일본에서 하층 남성들은 아예 결혼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한국도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계층과 없는 계층으로 나누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불안 때문에 인생 예측이 안되니 동반자적 사랑으로 인생을 기획한다는 것도 쇠퇴하고 있죠.”

[복지국가를 말한다](1부)② 과부하 걸린 한국의 가족

■ 학자금·생활비 벌기 위해 알바 뛰어도 신용불량 낙인
정부 “부양자 있다” 나몰라라

비정규직 김상진씨(가명·27)는 지난해 여름 여자친구와 헤어질 때,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식당에서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다 1년을 사귄 그녀는 김씨가 전화를 먼저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별을 통보해왔다. 애정이 있다면서 남녀관계의 기본인 전화조차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씨는 그때 전화를 하려야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휴대전화요금 납부기한을 두 달 넘겨 발신정지가 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정을 여자친구에게 차마 얘기할 수 없었다고 김씨는 말한다.

김씨는 각종 ‘납부기한’에 쫓기며 살고 있다. 2003년에 입학한 대학에서도 3학기째 등록금을 납부기한 내에 내지 못해 제적됐다. 2007년 1월 제대했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원금 300만원에 연체이자가 붙어 500만원이 된 학자금 대출과 신용불량자 딱지, 그리고 어머니의 교통사고였다. 그는 ‘알바’로 어머니를 부양하며 생계를 꾸렸다. 케이크 공장 종업원, 이탈리안 레스토랑과 쌀국수 식당 주방보조 등으로 전전했다. 하루 12시간씩 일했지만 은행빚 갚는 데 월 40만~50만원 쓰고 월세 내고 나면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한 번은 동사무소를 찾아가 저소득층에게 주는 생활비 지원을 어머니가 받을 수 없는지 문의했다. 하지만 부양책임이 있는 가족, 즉 김씨가 있기 때문에 지원 대상자가 될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지난 3월에는 고용노동부의 취업성공 패키지를 신청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직업교육을 받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안된다고 했다. 교육에 참여하면서 받는 수당은 20만원에 불과해 월세도 낼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하소연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김씨는 “복지제도와 현실의 괴리가 크더라”며 한숨지었다.

비정규직의 불안한 삶은 젊은층에게 심리적 불안을 드리운다. 청년유니온 김영경 위원장은 “유니온에서 진행하는 심리상담을 찾는 ‘워킹푸어’ 청년들이 많다. 반복적으로 취업과 실업을 겪으면서 청년 비정규직들은 대인관계에도 영향을 받고 있다”며 “주거, 결혼, 노후 모두 불확실하다보니 자신감을 잃어 친구도 못 만나고 연애도 못하겠다는 얘기를 한다”고 말했다. 광주의 한 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한 청년은 “일터에 노총각이 상당히 많다. 잔업까지 해도 월 170만원 정도 벌이인데, 아침 7시에 나와 잔업하면 저녁 9시에 퇴근하는 생활 탓”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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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해도 비정규직 전전… 자신감 잃고 대인관계 기피
“대물림 하느니 차라리 포기”

대학 학자금도 젊은층의 허리를 휘게 한다. 한국의 고등교육 공교육비의 민간부담비율은 2007년 기준 79.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30.9%)의 2배를 웃돈다. 정부가 내지 않는 돈을 가족이 내고 있는 것이다. 학자금을 빌린 젊은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담보잡힌다.

공기업에서 비정규직 사무보조로 일하는 한지혜씨(27)는 주변에서 결혼소식을 들을 때면 “나란 여자, 빚 있는 여자”라고 속으로 자조섞인 농담을 한다. 학자금 대출 2800만원을 6년째 갚고 있는데도 700만원이 남아 있다. 대학 신입생 때 짝사랑하던 선배가 있었지만 등록금을 벌기 위해 휴학하고 ‘알바전선’에 뛰어들면서 이내 잊혀졌다. 그 후 10년 동안 로맨스에 마음을 줄 여유는 없었다. 전셋값 폭등이나 자녀 한 명을 키우는 데 2억6000만원(한국보건사회연구소, 2009년 기준)이 든다는 기사도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린다.

“결혼하는 친구들은 주로 경제력 있는 친구들이에요. 예식비, 전셋값 얘길 듣다보면 ‘연애든 결혼이든 출산이든, 내 인생에는 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복지국가를 말한다](1부)② 과부하 걸린 한국의 가족

한씨처럼 학자금 대출을 받은 사람은 지난해 모두 112만8341명이다. 그 중 2만5366명의 젊은이가 제때 대출금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됐다. 정규직의 반토막인 비정규직 임금으로 학자금 대출을 상환하기는 더욱 어렵다. 지난 4월 한국청년연대가 청년 1007명을 대상으로 한 ‘청년의 삶 실태조사’에서는 응답자의 거의 절반(48.2%)이 학자금, 주거비, 생활비 등으로 빚을 진 경험이 있고, 100명 중 6명은 이로 인해 연애와 결혼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규직의 좁은 입사문을 통과하기 위한 청년층의 경쟁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취업준비생 김윤진씨(29)는 “백수는 연애할 수 없다”고 말했다. 취업준비 기간에 두 번의 연애가 모두 깨졌다. 그는 “불안한 백수가 연애하면 불안한 상황이 증폭된다. 드라마 <연애시대>에는 연애는 어른들의 장래희망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나는 그 희망이 끊임없이 유보되고 있다”고 말했다. 혹여 연애를 하게 돼도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김씨는 단언했다. 국가에서 저출산 대책으로 내놓고 있는 현금지원을 더 늘려도 마음은 바뀔 것 같지 않다.

“학교 때부터 내가 겪는 무한경쟁과 그에 따른 불안을 사랑하는 존재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가 불행해지는 건 단순히 돈이 없어서뿐만은 아니잖아요.”

사람의 당연한 연애감정마저 격렬한 경쟁체제의 압박 속에 포기하고 유보하는 것이 사회적 신드롬이 되면서 우리 사회가 일본의 ‘무연(無緣)사회’처럼 변모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는 “자기의 마음을 진정으로 읽어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 사회적 관계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지면서 마음속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게 된다”며 “돈 벌기 위한 경쟁으로만 치닫는 사회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여백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복지국가를 말한다](1부)② 과부하 걸린 한국의 가족

‘삼포 젊은이’들은 복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김상진씨는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을 만큼 노력해봤느냐’는 말을 들을 때 가장 슬프다”고 했다. “산에서 굴러떨어지고 있는데 잡아줄 생각은 않고 죽을힘을 다해 혼자 살아남아보라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는 그걸 계속 주입하는 나라 같다. 죽을 만큼 발버둥치지 않아도 최소한 사람같이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복지 아닌가”라고 말했다.

한지혜씨는 정치권을 비판했다. 한씨는 “개인에게 모든 비용을 지게 한 뒤 순식간에 빚쟁이로 만들어버리는 곳이 지금의 우리나라”라며 “요즘 정치싸움 하는 사람들이 유권자를 의식해 복지란 단어를 종종 입에 올리고 있지만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주거·등록금·노동 정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대체 얼마나 노력하고 경쟁해야 미래를 꿈꾸고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청춘들은 지금 국가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 한국사회의 ‘미래 포기’
삼포로 저출산 심화… 성장잠재력 떨어져


[복지국가를 말한다](1부)② 과부하 걸린 한국의 가족

‘삼포(三抛)세대’는 미래 한국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물음표다. 젊은층이 가족을 꾸리지 않으면 저출산·고령화는 심화된다.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 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자녀수는 1.22명으로 인구대체 수준(2.1명)에 크게 못미친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여개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 반면 혼자 사는 가구의 비중은 23.3%로 커졌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저출산 여파로 2029년부터 한국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들어설 것으로 예상한 바 있다. 일할 수 있는 인구는 적어지고 고령화로 인해 성장잠재력은 떨어진다는 것이다. 반면 65세 이상 노인인구 부양비는 크게 늘어나면서 2010년 현재 생산가능인구 6.7명이 부양하고 있는 노인 1명을 2050년에는 1.4명이 부양해야 할 것으로 OECD는 추산했다. 2050년에는 일본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고령국가’가 될 것으로도 전망된다. 저임금의 노동시장과 척박한 국가복지에 짓눌린 청년층의 환경이 개선되지 않는 한 한국은 위기를 피하기 어려운 구조다.


■ 특별취재팀 최민영·송윤경·유정인·김지환·박은하 기자
■ 블로그 welfarekorea.khan.kr
■ 이메일 min@khan.kr

<사진 김영민·강윤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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