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거치며 순우리말 지명 점차 사라져” 일본 연구 결과 나와

백철 기자

일제시대를 거치며 순우리말 지명이 점차 사라졌다는 일본 내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지난해 3월 미즈노 페이(水野俊平·47) 홋카이도상과대학 교수는 일본 학술진흥회의 지원을 받아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에 의한 한국지명·한국어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1898년·1908년·1917년 제작된 일본의 고지도 3점(이하 1·2·3차 지도)을 비교해 현재 광주광역시 일대의 지명 변화를 연구했다.

연구결과 1898년의 경우 순우리말 지명이 17.5%였으나, 1917년에는 6.2%로 비율이 현저히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 순우리말 지명 어떻게 없어졌나.

미즈노 교수는 1차 지도(1898년)에서 순우리말로 읽힌(훈독) 지명 38개를 찾아내 그 변화과정을 살폈다.

현재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동에 위치한 ‘꽃뫼’는 2차 지도(1908년)에서 ‘화산’(花山, 꽃산)으로 표기가 바뀌었다. 현재 광주 남구 월성동에 있는 ‘소스’(소스라기)는 2차 지도에서 ‘학촌’(鶴村, 학마을)으로 바뀌었다.

3차 지도에서도 한자어로 바뀐 고유어 지명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산포면에 위치한 ‘똘뚝’은 3차 지도에선 ‘구등’(溝嶝, 언덕에 있는 도랑)으로 바뀌었다. 이 외에도 ‘널다리’는 ‘판교’(板橋), ‘오리뫼’는 ‘압촌리’(鴨村里), ‘옷돌’은 칠석리(漆石里)로 변한 것으로 나타났다. 순한글 지명이 같은 뜻의 한자어 지명으로 바뀐 것이다.

드물지만 한자어 표기가 고유어로 바뀐 경우도 있다. 1차 지도에서 ‘주곡’(酒谷, 술 언덕)으로 표기된 지명이 2차 지도엔 ‘술곡’으로 표기가 변했다. 1차 지도에선 음 표기 없이 한자로 ‘泥橋’(니교, 진흙 다리)라고 나온 곳이 2차 지도에선 표기가 ‘申橋’(신교)로 바뀌고 음은 ‘진다리’로 적혀 있다. 미즈노 교수는 “1차 지도에선 지명 채집이 불충분했을 수 있다. 이후 지도에서 누락된 음이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뒷시대로 갈수록 지도에 나타난 지명의 전체 숫자는 많아졌지만, 고유어 지명의 비율은 점점 줄어들었다. 미즈노 교수가 1차 지도에서 확보한 지명은 총 217개다. 이중 17.5%인 38개가 고유어 지명이었다. 하지만 2차 지도에선 전체 297개 지명 중 8.7%인 26개, 3차 지도에선 전체 485개 지명 중 6.2%인 28개만이 순우리말 지명으로 나타났다.

미즈노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1914년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 이후 공식적으로는 한자어 지명만 남았다. 3차 지도에서는 순한글 지명의 비율도 현저히 줄어들었고, 훈독인 경우엔 괄호 안에만 표기하는 등 토지조사사업의 결과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미즈노 교수의 연구에 쓰인 ‘1차 지도’의 실제 모습/ 미즈노 슌페이 제공

미즈노 교수의 연구에 쓰인 ‘1차 지도’의 실제 모습/ 미즈노 슌페이 제공

■ 일제 침략자료가 ‘일제의 순한글 지명 죽이기’ 실증 사료로 쓰여

미즈노 교수는 일본어로 된 지도였기에 오히려 순한글 지명의 변화를 찾아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미즈노 교수가 확보한 3개의 지도는 모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지배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1차 지도는 일본 육군이 대한제국에 측량반을 보내 제작한 것으로, 그 분량은 총 484장에 달한다. 미즈노 교수는 484장 중 일본 국회도서관 등에 소장된 457장을 확보했다. 2차 지도는 1차 지도를 보완하는 자료로, 1909년~1911년 사이에 측량에 1913~1916년 동안 총 376장이 발행됐다. 3차 지도는 1914~1918년 사이에 제작됐다.

1차 지도를 보면 한자로 표기된 지명에 가타가나로 된 음(주음)이 달려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미즈노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차 지도 전체에 나타난 4만4181개의 지명 중 주음이 달리지 않은 경우는 9.2%인 4068곳에 불과했다.

한국 한자음을 그대로 가타가나로 표시한 경우(음독)도 있지만, 한자의 한국어 ‘뜻’을 가타가나로 표시한 경우(훈독)도 있다. 훈독된 지명의 경우 고유어 지명, 음독된 지명은 한자어 지명으로 볼 수 있다.

위에 언급된 ‘꽃뫼’가 좋은 예시다. ‘꽃뫼’는 1·2차 지도에 모두 ‘花山’으로 표기된다. 1차 지도에서 ‘花山’의 주음은 ‘코루메’(コルメ-)였다가 2차 지도에선 ‘하산’(ハ-サン)으로 바뀌었다. 미즈노 교수는 花山의 주음과 ‘한국지명총람’ 등을 비교한 결과 ‘코루메’의 실제 음이 ‘꽃(골)뫼’라고 봤다.

1차 지도 중 광주광역시 일대가 나온 부분을 분석해본 결과, 음독 지명은 65.9%였고, 훈독 지명은 17.5%였다. 다만 미즈노 교수는 실제 고유어 지명 비율은 17.5%보단 높았을 것으로 본다.

미즈노 교수는 “고유어와 한자어 지명이 함께 쓰였더라도 일본인들이 지명을 채집하는 과정에서 한자어 지명만 적은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또한 음독 지명 중에도 실제로는 순한글 지명인데 한자 표기의 음을 그대로 가타가나 주음으로 적은 것도 상당수 있다”고 말했다.

■ 국내 학계 “고지도로 지명 변화 추적 의의 있어”

미즈노 교수는 “한국에서도 1차, 3차 지도에 나온 지명을 데이터베이스화한 연구는 있지만 가타가나 주음에 주목한 선행 연구가 없어서 연구 진행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말했다.

국내 학계에서도 일본 고지도에 나온 가타가나 음을 통해 순한글 지명의 변화를 추적한 이번 연구에 상당한 의의가 있다고 보고 있다.

한국지명학회장인 손희하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일본이 침략을 목적으로 만든 자료를 토대로 한 것이지만 고지도를 가지고 특정 지역 전체의 지명 변화과정을 추적한 연구 결과는 매울 드물다. 일제가 권력을 이용해 지명을 바꾼 양상을 실증한 중요한 연구로 보인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다만 구한말에 이미 한자어 지명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한국 고지도를 가지고 비슷한 연구를 진행한 뒤, 한·일 양쪽의 연구를 합쳐보면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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