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종전 키스’는 아름답지 않다

주영재 기자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태평양 전쟁이 끝난 1945년 8월14일. 축제 분위기로 가득한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서 해군과 간호사 복장을 한 남녀가 껴안고 키스를 하고 있다. 사진 ‘수병과 간호사의 키스’다. 미군 장교였던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가 촬영해 미국 잡지 ‘라이프’에 실린 이 사진은 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사진의 하나로 칭송받는다.

사진 속 여성인 그레타 짐머 프리드먼은 지난 8일(이하 현지시간) 92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별세와 함께 사진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사진이 찍힐 당시 상황은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으며 실상은 술 취한 남성이 동의 없이 여성에게 입맞춤을 한 성폭력의 한 장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의 기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진 ‘수병과 간호사의 키스‘(사진)의 여주인공 그레타 짐머 프리드먼이 지난 8일(현지시각) 버니지아주 리치몬드의 한 병원에서 숨졌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의 기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진 ‘수병과 간호사의 키스‘(사진)의 여주인공 그레타 짐머 프리드먼이 지난 8일(현지시각) 버니지아주 리치몬드의 한 병원에서 숨졌다.

사진 속 남성은 조지 멘도사다. 두 사람은 사진이 찍힐 당시 서로 전혀 모르던 사이였다. 두 사람은 타임스 스퀘어에서의 ‘불멸의 키스’ 이후 67년만인 지난 2012년 5월21일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의 재회를 보도한 ‘데일리 메일’에 따르면 당시 맨도사는 나중에 결혼하게 되는 여자친구 리타 페트리와 처음으로 데이트를 나왔을 때였다. 멘도사는 바에서 페트리와 술을 마시던 중 일본의 항복으로 종전이 선언되자 거리로 뛰어나왔다. 거리에서 간호사복을 입고 있는 여성을 발견한 그는 페트리를 남겨 둔 채 그녀에게 달려가 곧장 포옹을 했다.

조지는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기쁨에 더해 약간의 술기운이 더해졌다”며 “그래서 그 간호사를 보고 그녀를 붙잡은 뒤 키스를 했다”고 말했다. 프리드먼 역시 당시를 회상하며 “나는 그가 다가오는지 보지 못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지 알았을 땐 이 사람에게 붙잡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뉴욕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그레타는 또 “그는 매우 억셌고, 내가 그에게 입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 입을 맞췄다”고 말했다.

조지 멘도사(오른쪽)와 그레타 짐머 프리드먼이 사진이 찍힌 지 67년만인 2012년 5월21일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 다시 만났다.

조지 멘도사(오른쪽)와 그레타 짐머 프리드먼이 사진이 찍힌 지 67년만인 2012년 5월21일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 다시 만났다.

프리드먼은 2005년 ‘참전군인 기록물 작업’을 위해 진행된 인터뷰에서도 “내가 포옹하는 걸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며 “그가 다가와서 나를 껴안았을 뿐이다”고 말했다. 그는 “로맨틱한 순간은 아니었다”며 “단지 종전을 축하하는 하나의 행위였을 뿐이었다”고 회상했다. 프리드먼은 당시 21살로 치위생사로 일하고 있던 때였다. 프리드먼은 1960년대 아이젠슈타트의 사진집을 보기 전까지 이 사진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다.

리타 멘도사(왼쪽)은 ‘수병과 간호사의 키스’ 사진에서 조지의 어깨 건너편으로 웃고 있는 자신을 가리키면서 조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성과 입맞춤을 한 것에 화를 낸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올해로 66년째 결혼을 유지하고 있다.

리타 멘도사(왼쪽)은 ‘수병과 간호사의 키스’ 사진에서 조지의 어깨 건너편으로 웃고 있는 자신을 가리키면서 조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성과 입맞춤을 한 것에 화를 낸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올해로 66년째 결혼을 유지하고 있다.

양성평등을 지향하는 웹진 크레이츠앤리본스(Crates and Ribbons)는 2012년 9월30일자 기사에서 프리드먼의 이 인터뷰 내용으로 판단할 때 멘도사의 행동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성폭력의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사진을 다룬 대부분의 기사에서 이 키스가 강제로 이뤄진 것이며 성폭력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면서 성폭력에 대한 ‘선택적인 망각’을 지적했다. 남자의 행동은 로맨틱한 것으로 포장·미화되고 여성의 입장은 망각됐다는 것이다.

미국 역사가 이렇게 ‘선택적인 망각’에 빠진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크레이츠앤리본스는 이 사진이 2차대전 참전 군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그들이 행한 영웅적 행동과 그로 인해 찾아온 평화와 일상의 복원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가적 기념일을 상징하는 사진이 실은 성폭력의 현장을 찍은 사진이라는 것은 이들에게 인정하기 어려운 불편한 진실이다.

그레타의 아들 조슈아 프리드먼은 10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그런 논란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사진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그 사진을 그런 식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강제적인 입맞춤에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면 해당 행위가 정당화되고 심지어 이 사진처럼 칭송을 받는 역사적 기록물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수병과 간호사의 키스’를 찍은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와 이 사진이 실린 1945년 8월14일자 ‘라이프’의 표지.

‘수병과 간호사의 키스’를 찍은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와 이 사진이 실린 1945년 8월14일자 ‘라이프’의 표지.

크레이츠앤리본스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보였다. “수병이 종전의 기쁨에 열정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열정이 다른 사람의 신체적 자율성을 침범하는 행위로 확장된다면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 사진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남성의 열광과 열정일 뿐이다. 여성이 당시 어떤 느낌을 받았을 지에는 아무 것도 설명되지 않았고, 관심받지도 않았다. 크레이츠앤리본스는 기사 말미에서 “우리가 성폭행의 문화를 없애고 여성에 대한 만연한 폭력을 줄이는 데 진지한 태도를 갖고 있다면, 동의 없이 다른 누군가와 성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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