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당신이 겪은 일을 성폭행으로 느끼면 안되는 거였다’

이은의 변호사
[그럼에도, #미투]②‘당신이 겪은 일을 성폭행으로 느끼면 안되는 거였다’

며칠 전 항소심을 앞둔 피고인 접견을 위해 서울구치소에 다녀왔다.

피고인 박모씨는 노래방도우미로 일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이십대 여성이었다. 또래의 남자 손님들이 “시간당수당을 준다”는 말에 인근 술집을 가는 줄 알고 따라나섰는데, 막상 따라가 보니 남자 손님 하나가 장기투숙 중인 호텔이었다. 고민이 됐지만 남자랑 단 둘이 있는 것도 아닌데 별일이야 있겠나 싶었다.

그런데 남자들은 호텔에서 대마 등을 흡입했다. 박씨에게도 권했다. 거절했지만, 남자들 중 한 명이 언성을 높이고 눈을 부라렸다. 머리를 때리기도 했다. 당황하기도 하고 겁도 난 박씨가 결국에는 대마를 흡입했다. 이후 대마를 권하며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때리기도 했던 이모씨가 성관계를 요구했다. 복층구조인 호텔 내부에서 다른 남성은 복층 공간으로 올라가 먼저 잠이 든 상황이었다. 박씨는 싫다고 했지만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하거나 크게 실랑이를 하지는 못했다. 모르는 남자들과 낯선 공간에 와있는 상태에서 심하게 저항했다간 다치거나 다른 한 명을 깨워 윤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잔뜩 움추린 채 싫다는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상민 기자

김상민 기자

다음 날 집으로 돌아온 후에야 박씨는 이씨 등에 연락해 “강제로 마약도 하고 강제로 성관계도 하게 됐다”고 원망하며 “약속했던 시간당수당이라도 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이씨는 거절했고, 사과도 하지 않았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마지못해 흡입했던 대마가 중독된 건 아닌가 겁도 났다. 고민 끝에 “대마를 강요 받았으며 강간도 당했다”고 신고를 했다. 남자들은 모두 체포됐고 대마 소지 및 흡입으로 기소됐다. 문제는 박씨였다. 검찰은 박씨를 대마 흡입과 무고의 혐의로 기소했다. 박씨의 입장에서는 원하지 않는 일들을 하게 만든 가해자들과 함께 재판을 받게 됐다. 박씨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후 이씨에는 집행유예가 내려졌지만, 박씨는 1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박씨의 부모님은 먼 지방에서 장사를 하는 분들이었다. 딸이 이런 일에 연루돼 재판을 받게 됐다는 것도, 노래방도우미 일을 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었다.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게 된 후에야 상황을 알게 된 어머니가 부랴부랴 찾아왔다. 어머니는 딸을 빨리 집으로 데리고 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대마를 자발적으로 흡입했고, 처음 만난 날 성관계를 요구한 남자와도 자발적으로 성관계를 했다고 자백하고 반성해서 풀려날 수 있다면, 딸이 거짓 자백과 반성이라도 하게 해달라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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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레드북>이라는 뮤지컬을 봤다. 여성들이 마음껏 야한 내용을 담은 글을 쓰는 것이 금기시 되었던 영국의 근대를 배경으로, 여성의 성적 욕망과 사랑을 담은 소설을 썼다가 감옥에 갇히고 재판을 받게 된 여성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뮤지컬에서는 주인공의 남편이 마침 변호사였는데, 주인공에게 “소설을 쓸 당시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용서를 구하자”며 설득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이를 거부한다. 법정은 그런 주인공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지만, 달라진 법정 밖 사회의 강한 외침으로 마침내 주인공은 풀려난다.

뮤지컬을 재미있게 볼 당시만 해도 결말에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변호하는 사건의 주인공인 박씨를 보러 가면서, 다른 소회가 밀려왔다. 그의 주장을 전부 신뢰하기는 어렵다 치더라도, 그가 손님으로 처음 만난 남성들을 ‘대마를 하려고’ 자발적으로 따라갔으며, 성관계도 ‘자발적으로’ 한 후에 신고를 했다는 남자들의 주장은 훨씬 믿기 어려웠다. 안타깝게도 검사도, 판사도, 노래방도우미인 박씨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뮤지컬이 아닌 현실의 변호인인 나는, 그에게 “당시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저항하진 못했으니 성폭력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고, 신고를 했으니 무고라고 말하고 반성을 하자”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음 시린 상황과 달리 봄볕이 따뜻한 날이었다. 박씨는 내 말을 조용히 듣더니 알겠다고 말했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어렵사리 붙이고는 잠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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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자료사진

경향신문 자료사진

성폭력 신고 사안에 있어서만 무고죄를 적용하면 안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신고나 고소를 한 사람의 입장에서, 일어난 일이 성폭력이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그 사람의 평소 폭력에 대한 가치관과 사건 발생 당시의 의사에 기초한다. 당사자들의 입장이 성폭력과 성관계로 극명하게 엇갈리는 상황에서, 법이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무고’라고 명명하기 앞서 법에서 인정하는 성폭력과 일반적인 피해자들이 느끼는 성폭력에는 거리가 있고, 그 거리가 상당하다는 것을 더욱 고민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성폭력 가해자에 대해서는 혹시 성폭력이 아니었으면 어떡하나, 피고인이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걸 몰랐으면 어떡하나 ‘함께’ 고민한다. 무죄추정의 원칙상 그 고민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해서 성폭력이었으면 어떡하나, 피고인이 정말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의사표현은 전달을 한 상황이었으면 어떡하나는 같은 정도의 무게로 고민하지 않는다. 실제 무고를 하는 경우도 없진 않겠지만, 이렇듯 다른 무게로 받아들여지는 고민 속에서 자기가 당한 일을 성폭행이라고 믿었던 어떤 누군가 역시도 무고로 명명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곧 박씨의 재판이다. 그에게 차마 ‘당신이 겪었던 일을 성폭행이라고 느끼면 안됐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정도는 성폭행이 아니기 때문에, 신고하면 무고가 된다는 간단한 설명과 함께 반성을 해야 풀려날 수 있다는 설득을 했다. 돌아오는 길, 성폭력 무고를 둘러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경계선에서, 지금 우리 사회의 ‘레드북’이 무엇일까 돌아본다. 성범죄로 성립하지 않을 것을 신고하는 피해자의 신고인가, 법조문인가, 아니면 평등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시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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