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첫 퍼스트레이디’ 김정숙··· 올해도 ‘우상화’ 계속 왜?

최미랑 기자
북한의 조선중앙TV가 2009년 김정일 국방위원장 생모 김정숙의 60주기를 맞아 방영한 기록 영화 ‘위대한 공산주의 혁명투사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 동지’에서 공개한 사진. 김일성 주석(뒷줄 왼쪽), 김정숙(뒷줄 오른쪽), 유년시절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앞줄 왼쪽)과 여동생 김경희 전 노동당 비서.|북한 조선중앙TV 촬영·연합뉴스

북한의 조선중앙TV가 2009년 김정일 국방위원장 생모 김정숙의 60주기를 맞아 방영한 기록 영화 ‘위대한 공산주의 혁명투사 백두의 여장군 김정숙 동지’에서 공개한 사진. 김일성 주석(뒷줄 왼쪽), 김정숙(뒷줄 오른쪽), 유년시절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앞줄 왼쪽)과 여동생 김경희 전 노동당 비서.|북한 조선중앙TV 촬영·연합뉴스

북한에는 ‘김정숙 휴양소’가 있습니다. 금강산 밑에 있는 관광 명소입니다. 지명도 있습니다. 북한 양강도 해산시의 이름을 바꿔 단 김정숙시입니다. 함경남도 함흥시에는 김정숙해군대학이 있고, 평양에는 김정숙평양방직공장도 있습니다.

이름이 익숙하지요?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金正淑) 여사와 한자까지 똑같이 씁니다.

북한에서 ‘항일영웅’으로 떠받드는 이 인물은 바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할머니입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모이자, 김일성 주석의 부인입니다. 1917년 태어나 194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정숙의 서거 69주기를 맞은 지난 22일 그를 기리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평양조선중앙통신은 지난 22일 대성산혁명열사릉 동상에 화환을 진정했다고 26일 보도했습니다.

북한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 서거 69주기를 맞아 지난 22일 대성산혁명열사릉 동상에 화환을 진정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6일 보도했다.|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 서거 69주기를 맞아 지난 22일 대성산혁명열사릉 동상에 화환을 진정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6일 보도했다.|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김정숙 서거일인 9월22일마다 큰 행사가 열리곤 했습니다. 특히 김정일 위원장이 2011년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음악회가 열리고, 조선중앙TV는 관련 프로그램을 내보냈습니다

2005년 조선중앙TV가 공개한 김정숙 사진. 김정숙은 김일성 주석 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 생모이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할머니다.|북한 조선중앙TV 촬영·연합뉴스

2005년 조선중앙TV가 공개한 김정숙 사진. 김정숙은 김일성 주석 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 생모이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할머니다.|북한 조선중앙TV 촬영·연합뉴스

금강산 삼일포 유원지 암벽에 쓰인 김정숙 찬양 문구. 1991년 촬영됐다.|경향신문 자료사진

금강산 삼일포 유원지 암벽에 쓰인 김정숙 찬양 문구. 1991년 촬영됐다.|경향신문 자료사진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북한 권력자와 그 주변 인물 대다수는 삶의 면면이 매우 불투명합니다. 출생연도부터 사망 원인까지 정치적 목적에서 윤색돼 그대로 믿을 수 없는 경우가 많고 학자와 전문가마다 분석도 제각각입니다. 진실을 드러내겠다며 언론이 던진 억측이 사실인 양 둔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숙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과 만주 지역에서 생활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91년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부부는 이 기간동안 소련의 러시아공화국 하바로프스크 근처 와츠고예라는 농촌의 통나무집에 살았습니다. 김일성은 당시 중국 공산당의 동북 항일연군 제2군 2로군 6사장으로 일본 관동군의 토벌에 쫓겨 이 지역에 흘러들어와 소련군에 재배속돼 사상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김정숙은 이 시절 김정일을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백두산의 초가집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김일성과 같이 항일 빨치산투쟁에 참여했다고 선전하지만 이는 ‘가짜’라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한국전쟁 때 북한군 작전군장을 했던 유성철씨는 1990년 한국일보 연재기사 ‘나의 증언’에서 하바로프스크 88여단에서 김일성 부부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기억하는 김정숙의 모습입니다. “김일성과 같은 빨치산 출신인 김정숙은 88여단에서는 김일성의 뒷바라지만 했는데 음식솜씨가 좋았고 인심도 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에는 아이가 셋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첫째는 김정일, 둘째는 김경희 전 노동당 비서, 그리고 셋째로는 아들이 있었는데 사고로 어릴 때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집니다.

김일성과 김정숙은 1945년 광복을 맞자 평양으로 돌아옵니다. 김일성은 권력다툼에서 승승장구했고 소련군정 지원 아래 1946년부터 북한 최고 지도자로 등극합니다.

김일성 권력이 정점에 오른 1949년 김정숙은 서른 둘의 젊은 나이로 세 아이를 남겨 놓고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아이를 낳다 사망했다고 발표됐는데, 진짜 사유가 무엇인지를 두고 현재까지 온갖 추측이 난무합니다. 1991년 한 일본 언론은 소련 언론을 인용해 ‘김정숙이 김일성의 당시 비서였던 김성애와의 불륜관계에 대한 충격으로 자살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김정숙이 임신 중 김일성에게 배를 걷어차여 끝내 유산을 하고 사망했다’고 북한 내부 관계자를 인용한 보도도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원래 김정숙의 외모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는 근거도 덧붙었습니다.

이런 추측이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김일성이 김성애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한 것은 사실입니다. 김성애는 1954년 아들 김평일을 낳았고, 1959년부터는 공식 석상에 김일성의 부인으로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새어머니’ 김성애를 미워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 자리를 확고히 하자 김성애와 아들 김평일은 세력 다툼에서 밀려 역사에서 흐릿한 인물로 남고 말았습니다.

김정숙이 낳은 딸이자 김정은의 고모인 김경희는 지금 생사가 불투명합니다. 남편 장성택은 2013년 말 처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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