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들쳐업고 산을 넘어 들어온 한국”…우리 안의 탈북자들

류인하 기자

탈북민과 그의 아들이 굶주림에 내몰려 죽고 말았다. 장밋빛 인생을 꿈꾸며 한국에 오는 탈북민 중에는 잘 적응하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한국 사회에서 고립된 채 힘겹게 사는 ‘우리 안의 탈북민’을 조명했다.

중국 국경지대에서 장사하는 북한 여성들의 모습. Liberty in North Korea 홈페이지 캡처

중국 국경지대에서 장사하는 북한 여성들의 모습. Liberty in North Korea 홈페이지 캡처

서울 관악구 봉천동 한 임대아파트에서 죽은 지 두 달 만에 발견된 북한이탈주민(탈북민)의 이름은 한성옥이다. 올해 42세. 그의 곁에서 함께 숨진 채 발견된 아들은 6살이었다. 그는 20대 초반 먹고살기 위해 북한을 떠났다가 중국인 가정에 팔려갔다. 그곳에서 중국인 남성과 사이에서 한 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2009년 브로커 등을 통해 혼자 한국에 들어왔다. 중국인 남편은 인신매매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자신을 사들인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였다. 한국에 정착해 먹고살 만해졌을 때 남편을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그때 한국에서 낳은 아이가 한씨와 함께 세상을 떠난 둘째다. 명확한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경찰은 한씨 모자의 사망원인을 아사(餓死), 즉 굶어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그들의 시신은 아직 이 땅에 머물고 있다. 정식 장례는 치러지지 않았다. 부검을 통해 사인은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들이 이 땅에서 겪었을 좌절감, 외로움에 대한 부검은 하기 어렵다. 많은 탈북민들은 “한국사람들은 친절하고 말투도 상냥해서 좋은데 나는 너무 외롭습니다”라고 했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탈북민은 ‘기회의 땅에 온 행운아’다. 그러나 대부분 그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짧게는 10여년, 길게는 30여년간 북한체제 속에서 학습해온 것들을 한순간에 떨쳐내지 못한다. 장밋빛 인생을 꿈꾸고 오지만 그들이 대한민국의 ‘자유경제질서’에 적응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심지어 탈북민들은 건설 현장이나 제조업 현장에서 남한사람과 동일한 노동을 해도 그들보다 최저 50만원 이상 낮은 월급을 받는다. 최저임금법 어디에도 탈북민이 최저임금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문구는 없다. 출신지만 다를 뿐 우리와 같은 한국 국적인 그들은 여타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최저임금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고소득 꿈꾸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아

한 탈북민은 “하나원에 강의하러 나오는 탈북민들은 자신들의 성공사례를 이야기하면서 ‘당신들이 열심히만 일하면 한 달에 400만원, 500만원도 벌 수 있으니 열심히 일해보라’고 한다. 실패사례는 거기서 배우지 못한 채 나온다. 진짜 열심히 살면 그들이 말한 것처럼 400만원 이상도 벌겠지 하고 일자리를 찾아보면 생거짓말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힘들다. 열심히 하면 TV 속에 나오는 그네들(탈북민)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금세 좌절로 바뀐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범죄를 저질러 수감된 탈북민들도 많다. 정확한 수치는 없지만 법원 판결로 교도소에 수감된 탈북민은 4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탈북 모자 아사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충격을 줬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은 ‘언제든 또다시 벌어질 수 있는 일’로 본다.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별칭 ‘남북하나재단’)은 매년 탈북민 실태조사를 벌인다. 2019년 2월 발간된 ‘2018 북한이탈주민 정착실태조사’ 속에는 3000명의 탈북민이 조사 대상자로 등장한다.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탈북민 임금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2018년 기준 189만9000원이었다. 2017년에 비해 약 11만2000원 오른 액수였다. 전체 응답자의 64.8%가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62.7%가 하나원에서 배정받은 집 또는 임대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으며, 72.5%가 남한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남한생활에 만족하는 주된 이유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어서(33%)’였고, 23.7%가 ‘일한 만큼 소득을 얻을 수 있어서 만족한다’고 답했다. 탈북민의 과반수(52%)가 남한에서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중간층 이상으로 봤다. 상층이라고 생각하는 탈북민도 2.1% 있었다.

남북하나재단이 조사한 발표자료만 봤을 때 탈북민들의 정착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런데 취재과정에서 만나본 탈북민들은 이 같은 조사결과를 부정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월평균 임금 189만9000원이라는 돈을 만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월 300만원 이상 돈을 벌려면 다단계를 하거나, 성매매업소를 다니거나, 보이스피싱에 가담해야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들 안에서도 북한에서의 출신성분이나 교육수준, 한국에 일가친척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소득수준이 갈린다.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45.9%는 자신을 대한민국 사회의 하층민으로 여기고 있었다.

김정옥씨(가명·26)는 2017년 초 한국으로 왔다. 그 역시 모자 가정이다. 2009년 북한이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온 가족이 1~2년은 넉넉히 먹고살 수 있는 돈이 50㎏짜리 쌀 한 가마니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떨어졌다. 중학교(우리나라의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의대에 진학하려 했던 그는 시험을 포기하고 2013년 중국으로 갔다. 러시아에서 노동을 하다 병을 얻어 돌아온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곳에서 김씨는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당했다. 북한 여성을 매매하는 브로커는 북한에서 여성이 오면 “오늘 돼지 몇 마리 들어왔다”고 표현했다. 그들은 소·돼지와 같은 취급을 받으며 팔려나갔다. 김씨 역시 5살 많은 중국인 남성과 강제로 결혼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곧바로 아이를 낳았다. 외부 교류는 불가능했다. 중국말을 할 수 있었지만 중국인들과 말을 섞을 수 없었다.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중국인들은 그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북한 출신이라는 신분이 드러나면 언제든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될 수 있었다. 누구든 자신을 신고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중국에서 4년을 보냈다.

“아이 들쳐업고 산을 넘어 들어온 한국”…우리 안의 탈북자들

중국 남편을 설득해 고생 끝에 온 한국

그는 끊임없이 남편을 설득했다. “내가 한국땅에 들어가 한국 국적을 얻으면 당신을 초청할 수도 있고, 우리 애도 당신이 일하러 나가면 키울 사람이 없으니 내가 데려가 기르겠다”고 했다. 언제든 아이가 보고 싶으면 한국으로 올 수 있고, 우리가 중국으로 갈 수도 있으니 ‘잠깐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자고 했다. 그렇게 남편을 속여 한국으로 들어왔다. 브로커는 “그냥 가볍게 여행 간다는 생각으로 출발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 여정은 여행이라 보기 어려웠다. 조금만 걸으면 “안아줘. 업어줘” 하는 네 살배기 아이를 들쳐업고 3~4시간씩 가파른 산을 오르내렸다. 국경 지대마다 브로커들이 바뀌었다. 아이를 등에 지고 한 달을 걸어 태국으로 들어왔다. 그곳에서 또다시 한 달간 강제수용소에 갇혀 조사를 받았다. 수용소 안에는 80명의 탈북민과 그 자녀들이 있었다. 국정원에서 3개월간 조사를 받고, 하나원에서 3개월간 사회적응교육을 받고 나자 그와 그의 아이는 한국땅 어딘가에 ‘던져졌다’. 그들에게 배정된 임대아파트에는 가스레인지 하나만 설치돼 있었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돈이었다. 옷은 하나원을 나올 때 입고 있던 옷이 전부였다. 정착지원금으로 받은 일시금 400만원 중 250만원을 브로커 비용으로 지불하고, 남은 150만원 중 100만원을 송금 브로커를 통해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보냈다.

2013년 북한을 탈출한 이후 처음으로 가족과 전화 연락이 닿은 것도 이때였다. 송금 브로커는 김씨가 건넨 100만원 중 30만원을 수수료로 챙기고, 70만원을 북한에 보낸다고 했다. 30만원의 수수료 안에 김씨가 북한에 남겨둔 가족들과 잠깐 통화할 수 있는 비용도 포함돼 있었다. “전화가 계속 끊겼어요. 2분쯤 통화하다보면 끊기고, 통화하다 또다시 끊기고. 엄마는 ‘가족들 다 잘 지낸다’고 했는데 다른 분(탈북민)이 ‘너희 아버지는 이미 병으로 죽었다’고 했어요.”

김씨는 현재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에게 진료를 받도록 권한 한 탈북민은 “아무리 봐도 애가 정신이 이상한 것 같아서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의사가 ‘우울증’이라고 했다”면서 “그러니 정옥이가 ‘내가 왜 우울증이란 말이오!’ 하며 화를 냈다”고 했다. 김씨는 그러나 지금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있다.

“아이가 자랄수록 점점 아빠 얼굴이 나왔어요. 나는 중국에서의 일을 기억조차 하기 싫은데 아이 얼굴을 보면 자꾸 애 아빠 얼굴이 보이고, 그러면 중국에서의 일들이 생각나니 미칠 것 같았어요. 여섯 살이 되니 말도 안 듣고 자꾸 투정을 부리니 ‘내가 왜 쟤를 중국에 놔두고 오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이 계속 들었어요.”

아이를 때리고 하루종일 후회하기도 했다.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절대 놓지 않고 데려온 자식인데 한국 사회에서 아이는 그에게 장애물이 됐다. 어린이집을 보냈지만 계속 아팠다. 툭하면 감기에 걸렸고 열이 났다. 마트 계산원, 식당 종업원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어보려 노력했지만 매번 한 달을 채우지 못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갈 수 없으면 그 역시 직장에 나갈 수 없었다. 지난해 아이가 수족구에 걸려 일주일간 일을 나가지 못하자 곧바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20대 젊은 나이에 기초생활수급자로 살기 싫어 노력했지만 그는 기초생활수급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수급비 월 87만원. 이 돈으로 아이 어린이집 특별활동비, 통신비, 교통비를 내고 의식주 비용을 충당한다. 아이가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힘들어해 지난해 수급비를 조금씩 모은 돈으로 작은 에어컨 하나를 샀다. 안정된 직장을 구하고 싶지만 어린이집 운영시간에 맞춰 일할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은 없었다. 어린이집은 오후 8시까지 운영했다. 그러나 오후 5시만 되면 모든 아이들이 귀가했다. 컴퓨터 교육이 끝나고 오후 6시에 아이를 데리러 갈 때마다 아이는 어린이집에 혼자 남아 놀고 있었다.

고아원에 보내지는 탈북민 아이들

남쪽 사람들은 친절했지만 그들이 건네는 친절한 말 속에는 탈북민에 대한 묘한 우월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식당 종업원으로 일할 때였다.

“제 발음이 이렇다보니 처음부터 탈북자라고 밝혔습니다. 다함께 점심식사를 하는데 반찬으로 나물이 나왔어요. 나물을 많이 먹으니 함께 일하는 아주머니가 ‘한국 애들은 이런 거 잘 안 먹는데 왜 잘먹나 했더니 네가 북한사람이라 그렇구나’라고 하셨어요. 듣기가 좀 그랬어요. 북한사람은 나물도 못먹고 살아 내가 나물을 많이 먹는다는 말인 건지…. 그 뒤로 연필을 입에 물고 서울 표준말 발음을 계속 익혔어요.” 실제 그는 표준말과 북한 사투리를 섞어 쓰고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한 적도 있었다. 하나원에서 함께 있었던 탈북민들과 연락을 끊고, 몇날 며칠을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아이도 눈치를 보며 “나가서 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쥐여주면 동영상을 보며 김씨 곁에 머물렀다. 만약 그때 그가 다시 살아볼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그는 한성옥 모자보다 더 먼저 세상에 알려졌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빈소가 차려지고, 정치권은 그들의 죽음을 이용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김씨는 “우리 아이와 같은 반 엄마들은 아이에게 신경도 많이 쓰고, 여러 가지를 많이 가르치려고 하던데 나는 그런 것들을 해주지 못해 속상할 때가 있다”고 했다. 또 “좋은 옷도 사 입히고, 학원도 보내고 싶다”고도 했다. 아이에게 좋은 환경을 물려주고 싶어했다.

부모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 아이들은 하나원을 나오는 순간 고아원에 보내지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고아원에 머무는 것이다. 김씨는 “공부를 하려면 아이를 보내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다. 그는 언젠가는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다. 아직은 먼 꿈이다. 김씨는 지난 8월 22일 “(알려주신대로) 오늘 아동수당 신청을 하고 왔다”고 연락을 해왔다. 미취학 아동은 월 10만원의 아동수당이 나온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했다. 긴급생계지원비 신청이 가능하다는 것을 몰라 신청하지 못했던 고 한성옥씨처럼 그 역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을 정보에 어두웠다.

감히 생각해본다. 대한민국 안에서 섬처럼 홀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손을 우리 국민 한 사람이 한 사람씩만 잡아준다면 섬과 섬이 이어져 하나의 땅이 되지 않을까. 그러면 이 땅에서 적어도 굶어 죽은 채 두 달간 방치되는 ‘제2의 한성옥 모자’는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Today`s HOT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기념식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폭격 맞은 라파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침수된 아레나 두 그레미우 경기장 휴전 수용 소식에 박수 치는 로잔대 학생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