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그들이 ‘탈남민’이 되는 까닭은

주영재 기자

대부분 자녀 교육 때문에 제3국으로…남한의 ‘삐딱한 시선’도 견디기 힘들어

8월 20일 서울 용산구 소월로에 있는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여명학교’의 학생들이 그린 그림들이 이 학교 미술실에 전시되어 있다. 주영재 기자

8월 20일 서울 용산구 소월로에 있는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여명학교’의 학생들이 그린 그림들이 이 학교 미술실에 전시되어 있다. 주영재 기자

이태강씨(가명·22)의 아버지는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올 정도로 북한 사회에서 엘리트 계층에 속했다. 하지만 이씨의 아버지는 북에서는 아이들의 미래를 보장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북한 사람들도 자식 교육을 위해 해외 이민을 생각하는 여느 한국인과 같았다. 이씨의 가족은 북한을 떠나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는 나오지 못하고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탈북을 할 수 있었다. 2008년 북한을 떠난 이씨는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그렇게 한국에서 몇 년을 살다 캐나다로 떠났다. 이씨는 “어머니가 느끼기에 한국은 너무 좁고 주변 분들도 외국으로 이민 가서 애들을 잘 키우고 있다고 들어서 ‘이민’을 갔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한국 국적’을 감추고 난민신청을 한 것인지, 이민을 신청한 것인지는 어렸을 때라 알지 못한다. 그곳에서 4년 반을 살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수술을 받았는데 조금 더 있으면 비행기를 탈 수 없을 정도로 악화돼 한국에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은 후였다. 캐나다에서 난민신청을 했다면 심사기간 동안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 있고, 의료 혜택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난민 자격이 인정되지 않으면 결국 한국에 돌아와야 한다.

올해 북한이탈주민 6명 위장망명 신청

북한이탈주민(탈북민)들이 한국을 거쳐 유럽과 북미 지역 등에서 난민신청을 하는 소위 ‘탈남’ 사례는 2010년 이후 크게 줄었다.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난민들이 몰리면서 난민 심사가 엄격해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브로커를 끼고 하는 해외 위장망명의 위험성이 탈북민 사회에서 많이 알려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브로커들은 탈북민의 이름으로 은행 신용대출과 자동차 담보대출을 받고 그 일부를 탈북민들에게 주는데,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해외에서 불법체류자로 전락하거나 한국에 돌아와 채무자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간혹 일어나고 있다. 8월 21일 통일부에 따르면 탈북민의 해외 위장망명 신청 사실이 해외 공관 등을 통해 확인돼 ‘북한이탈주민법’에 따라 보호종료 처분된 사람의 수는 최근 5년간 63명이다. 올해의 경우 지난 7월 말까지 6명이 보호종료 처분을 받았다. 5년간의 보호처분 기간 중에 있는 사람이 위장 난민신청을 했다가 거부된 숫자다.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진 경우는 개인 보호 등의 이유로 확인이 안 된다.

대개 한국 국적이 있는 걸로 밝혀지면 난민 신분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하게 된다. 2015년 캐나다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을 거쳤다고 반드시 난민 인정이 불허되는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이 반드시 불법인 것만도 아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지난해 초 보도에 따르면 캐나다에서 한 탈북 여성은 북한에서의 고난과 한국에서 겪은 가정폭력을 이유로 난민 자격을 신청해 인정받았다. 위장망명으로 추방돼 한국에 돌아와도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다만 북한이탈주민법에 따라 탈북민에게 제공하는 주거와 보조금 등의 보호혜택을 누릴 수 없게 된다.

목숨을 걸고 한국에 온 이들의 ‘탈남’을 이해하려면 이들이 애초에 탈북을 택한 이유를 알아야 한다. 북한에 식량난이 극심했던 1990년대 중반 이후 약 10년간 경제적 곤란함이 탈북의 가장 큰 이유였다면, 그 이후에는 북한 체제에 대한 환멸이나 자녀 교육 등 정치·사회적 이유로 탈북을 택한 이들이 많다.

탈북민, 그들이 ‘탈남민’이 되는 까닭은

그들은 왜 한국을 떠나나

박영자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탈북민은 북한 대신 남한 체제를 선택했다는 인식이 강해서 그에 맞는 대우나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상당히 강하지만 한국 국민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저발전 국가에서 온 이주민과 비슷하게 인종차별적 대우를 하는 것에 상실감과 분노를 많이 느낀다”고 설명했다. 탈남의 배경에 한국의 인종주의적 차별이 작용한다는 말이다. 박 연구위원은 “모국이 어디냐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 시선이 그들을 좌절하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이라고 말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탈북자들의 사연이 너무나 다양해 획일적인 분석은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탈북자가 북한에서 억압적 역할을 하는 특수기관에 근무하면서 원한을 많이 산 경우 한국에서도 불안해 살 수 없어 해외로 간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탈남의 주요 동기가 자녀 교육이라는 데 전문가들의 견해는 대체로 일치한다. 임 교수는 “10여년 이상 탈북민 면접조사를 했는데 순수하게 불평등과 편견, 가난 때문에 해외로 나간 사례는 내가 아는 한 많지 않다”며 “한국에서 해외로 가는 탈북민의 상당수는 교육을 이유로 들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애초에 자식들 공부 때문에, 자식의 미래 때문에 탈북을 한 경우이기도 하다.

탈북민들은 탈북 과정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여러 질병을 얻는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기도 한다. 아이들은 한참 배울 나이에 교육 공백기를 갖는다. 마음과 육체에 여러 상처를 안고 한국에 오지만 한국 사회는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기보다 왜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느냐고 다그치기만 한다.

이들에 대한 혐오 시선마저 존재한다. 2006년 경기도 안성에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한겨레학교’가 세워질 때 주변 주민들의 반발이 극심해 어려움을 겪었다.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가 학교 이전 부지를 알아볼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 지역 동사무소로 항의전화가 오기도 했다.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은 “생존의 위험 앞에서 생긴 상처가 많은데 이를 도외시하고, 적응을 못하면 바보처럼 보는 시선에 또다시 상처를 입는다”며 “자녀들의 상처가 치유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상처를 갖는 걸 보면서 부모들은 다시 새로운 출발을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조 교감은 탈북민의 상처를 보듬으려면 위로하고 인내해주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탈북민들은 탈북 과정에서 ‘내가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구나’라는 두려움을 갖게 되는데 관악구에서 탈북 모녀가 죽은 지 두 달 만에 발견된 것은 그 트라우마를 다시 드러낸 것”이라며 “이럴 때 통일부 장관이나 대통령이 탈북민을 만나 ‘배고파서 왔는데 여기선 그런 일 없게 하겠다’ ‘불안해하지 말라’는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 교감은 “지금은 탈남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돌아오는 사람이 많다”며 “이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제도의 사각지대를 없애는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개선이 시급한 대상은 탈북민 엄마를 둔 중국에서 태어난 청소년들이다. 이들은 탈북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북한이탈주민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부모의 한쪽이 외국인이거나 한국 출생을 요구하는 다문화가족지원법의 지원도 받지 못한다. 통일 이전 동독민들에게 동독의 억압적인 사회제도가 고통을 줬다면 통일 후에는 통일 자체가 고통을 줬다는 말이 있다.

박영자 연구위원은 “북에서 체제의 희생양이었는데 한국에서도 자신이 정치적으로 탄압받았거나 고통을 받았다고 소명하면 그 국가의 상황에 따라 난민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탈북민을 열등한 이등시민으로 보고 대하는 한 탈남 탈북민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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