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스스로 되뇌이며 올바른 길을 찾는 것

김소영

‘어린이는 어른의 길잡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어린이 교육과 사회의 책임

독서교실에는 ‘누가 무슨 책을 읽고 있나’ 공책이 있다. 빌려 가는 책의 제목과 빌린 사람을 적어두는 공책이다. 이름 대신 사인을 남겨도 된다고 안내하는데 이름을 적는 어린이는 아무도 없다. 처음 온 어린이들은 일생을 결정하는 일인 양 고심해서 사인을 만든다. 그러고는 다음주에 그 사인을 까먹어서 다시 만든다. 결국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매번 다른 사인을 하기 때문에 이 공책은 이제 낙서장처럼 되어버렸다. 어린이들은 암호 같은 말을 적기도 하고, 하트나 ‘스마일’ 같은 간단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지원이도 그랬다. 주로 웃긴 그림을 그렸고 이모티콘 같은 그림으로 사인을 대신하기도 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그래서 지원이가 자기 공책에 그린 그림을 보았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여성의 토르소가 공책 한 면을 다 채우는 크기로 그려져 있었다. 조금 긴 얼굴에 턱은 뾰족했고 입은 꼭 다물었고(웃지 않았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인 모습이었다. 긴 머리를 대충 묶어 한쪽만 귀가 보였는데 길쭉한 귀고리가 달려 있었다. 목걸이 줄은 장식적이지만 끝에 달린 장식은 조그마했다. 그래서 귀고리와 목걸이가 서로 잘 어울렸다. 브이넥 스웨터를 입은 현대적인 여성이었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두 눈이었다. 살짝 치켜올라간 커다란 두 눈은 이 그림에서 유일하게 과장된 부분이었다. 눈 아래 작은 점도 찍혀 있었다. 이 여성이 누구를 닮았는지는 나중에야 떠올랐다. 모딜리아니의 ‘잔 에뷔테른의 초상’ 속 인물이었다.

“그림을 그리며 고민을 하고 괴로운 건 더 잘그리게 되느라 그런거야”
어린이에게 조언을 할 때면 어린 시절의 나에게 말하는 듯한 기분 들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지 고심하면서 우리의 갈 길이 정해지기에
가정과 학교는 출발점일 뿐, 결국 사회가 어린이 교육의 책임을 져야

어린이가 그림을 망쳤을 때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어
새 종이에 그림을 다시 그리듯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는게 어른들의 몫

넋을 놓고 그림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그림, 생각해서 그린 거야, 아니면 어떤 그림을 보고 연습한 거야?”

“제가 그냥 생각해서 그렸어요. 심심해서….”

“아니 어떻게 이렇게 잘 그렸어? 왜 그동안 선생님한테 그림 잘 그린다고 얘기 안 했어? 어떻게 이런 걸 비밀로 할 수가 있어? 너무하네!”

내가 따지자 지원이는 웃으면서 말을 흐렸다.

“아…저 그림 잘 못 그려요. 저보다 잘 그리는 애들 되게 많아요. 이거는 그냥…제가 보기에는 좀 눈이…균형이 안 맞잖아요.”

그러고 보니 두 눈의 크기와 모양이 대칭이 아니었다. 그게 지원이 눈에는 결점으로 보인 모양이지만, 나는 그래서 이 그림의 분위기가 독특하다고 설명했다.

“제가 옛날에는 그래도 잘 그렸던 것 같은데요, 그때는 뭐 그릴까 생각 안 하고 그려도 잘했거든요. 지금은 생각을 해서 그런지 더 안 돼요.”

나는 지원이에게 말했다. 그건 그림을 더 잘 그리게 되느라 그러는 거라고. 무엇이든 하면 할수록 다음에 더 잘할 방법을 찾게 된다고.

“아무 고민 없이 할 때보다 고민을 할 때가 더 힘들기 때문에 못 그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런데 생각해 봐. 어느 쪽이 더 잘 그리겠어? 그러니까 이럴 땐 괴로운 게 더 좋은 거지.”

이런 말을 할 때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내가 어린 시절의 나 자신에게 말하는 듯해서다.

학교 신문에 실린 옆반 친구의 글을 읽었을 때의 기분이 지금도 또렷이 생각난다. 아마도 ‘후회’를 주제로 한 글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서 유행하는 가방을 샀는데, 막상 그것을 가지고 다니려니 어깨가 너무 아파서 고생했다는 내용이었다. 내용도 공감이 갔지만 나도 갖고 싶어했던 한쪽으로 메는 가방의 모양이나 사람들의 말투, 사소한 묘사들이 모두 생생했다. 어린 마음에도 부러워할 수조차 없을 만큼 잘 쓴 글이었다. 그게 속상했다. 같은 주제로 응모했다 떨어진 내 글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글을 잘 쓴다고 하려면 이만큼 잘 써야 되는구나’라고 체념하면서 내 글도 잊은 것 같다.

만일 그때 누군가 내게 “글쓰기도 수영처럼 연습이 필요한 거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돼. 글은 자기만을 위해서 쓸 수도 있어. 그러면 내 생각을 내가 읽을 수 있거든.” “너무 힘들면 쉬었다가 다시 써도 돼. 오늘 쓰고 내일 읽어도 돼.” 같은 말을 해주었다면 어땠을까? 글쓰기뿐 아니라 삶의 다른 영역에도 작게나마 영향이 있지는 않았을까?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내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에게 그런 말을 해준다. 그러면 요란한 시간여행 없이도 이 말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좋은 점이 또 있다. 그 말을 드디어 나 자신도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럴 때면 내 삶도 새로워지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은 어린이 자신보다 어른에 의해 만들어지는 부분이 많은 구간이다.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만 수정할 수도, 지어낼 수도, 마음대로 잊을 수도 없다. 어린 시절의 어떤 부분은 어른이 되고서도 한참 뒤에야 그 의미를 알게 된다. 시차는 추억을 더 애틋하게 만들고 상처를 더 치명적인 것으로 만든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이 각자 얼마나 다른 환경에서 자랐는지 깨닫고 자주 마음이 좁아졌다. 내가 제일 부러워한 건 ‘곱게 자라서 맺힌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상적인 어린 시절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내가 갖지 못했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내 인생이 일찌감치 모양 잡힌 것 같아서 도무지 힘이 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떨치게 된 건 한 어린이 덕분이다. 어머니는 아이가 신발을 갈아신거나 급식을 먹을 때 느린 편이라 선생님이나 친구들한테 싫은 소리를 자주 듣는다고 하셨다. 그 뒤로 나는 그 어린이뿐 아니라 다른 어린이들에게도 자주 “천천히 해”라고 말하게 됐다. 생각해보니 나도 어렸을 때 빨리 하라는 말만 들은 것 같았다. 누가 천천히 하라고 했으면 조금은 안심이 됐을 텐데.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해냈을까?

사실 “천천히 해”는 내가 아는 가장 ‘맺힌 데 없는’ 선배가 자주 하는 말이다. 퇴근길에 비가 오면 그 선배는 사무실에서 지하철역까지 꼭 후배들을 차로 데려다주었는데, 우리가 차에 탈 때도 내릴 때도 늘 그렇게 말했다. “천천히 해.” 나는 그 말이 좋았다. 덕분에 차를 얻어타는 게 미안하지 않고 고마웠다. 한편으로는 선배는 그런 말을 듣고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되었나보구나 싶었다. 나중에 내가 “천천히 해”라고 말하고 보니 나도 그런 말을 들어본 사람이었다. 꼭 인생 초기에 자리 잡힌 대로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어린이에게 하는 말을 나에게도 해준다. 반대로 어린이에게 하지 않을 말은 스스로에게도 하지 않는다. 이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래야 나의 말에 조금이라도 힘이 생길 것 같아서다. 일의 결과가 생각만큼 좋지 않을 때 괜찮다고, 과정에서 얻은 것이 많다고 나를 달랜다. 뭔가를 이루었을 때는 마음껏 축하하고 격려한다. 반성과 자책을 구분하려고,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 덕분에 나는 나를 조금 더 잘 돌보게 되었다.

나는 예전에 ‘어린이는 어른의 길잡이’라는 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어린이를 대상화하다 못해 신성시하는 듯해서였다. 어른이 어린이를 잘 가르치고 이끌 생각을 해야지, 어린이한테 길 안내의 책임을 떠맡기다니. 그리고 어린이가 길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무슨 신비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린이에게 할 말을 고르고, 그 말에 나를 비추어 보면서 ‘길잡이’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 어린이가 가르쳐주어서 길을 아는 게 아니라 어린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심하면서 우리가 갈 길이 정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를 가르치고 키우는 일, 즉 교육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 된다. 가정과 학교는 교육의 출발점일 뿐, 결국 책임은 사회가 져야 한다. 그러기 싫어도 사회의 몫으로 돌아오고 만다.

어린이·청소년을 포함한 ‘어린 세대’의 그릇된 면이 드러날 때면 곳곳에서 “교육의 실패” “시민 양성의 실패” 같은 탄식을 보게 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혹시 나는 이 말에 책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을 담았던 게 아닐까? 마치 사회 구성원으로서 나는 잘못한 게 없고 신입을 잘 훈련시키지 못한 가정과 학교를 점검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듯이. 하지만 어린이는 사회 바깥에서 다 자란 다음 사회에 배치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어린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 속에서 자란다. 가정에서 보는 것,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기초로 삼아서 세상을 보고 세상에서 배운다.

사회의 문제는 학교, 가정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온라인개학 이후 학교가 단지 건물과 교과 과정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학교 자체도 다양한 직군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학생과 학생이 관계 맺는 사회다. 가정도 사회와 분리될 수 없다. 사회의 돌봄 없이 어린이를 가정에만 내맡길 때 어떤 참혹한 학대가 일어날 수 있는지 뼈아프게 확인하고 있다. 교육을 이야기하려면 사회를 보아야 한다. 성범죄자들이 처벌받지 않고, 감염병 사태 중에 도서관보다 성매매 업소가 먼저 문을 열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어린이와 여성을 함부로 대하고, 소수자를 혐오하는 이들에게 마이크가 주어지는 세상에서 학교와 가정이 청정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나는 교육의 실패를 선언하고 싶다면 세상의 실패를 선언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냉소주의자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소식들이 쏟아질 때면 자연히 포기 쪽으로 몸과 마음이 기운다. 분노와 무력감 사이를 오가다 보면 이 나라를 외면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가 버리는 짐을 어린이가 떠안겠지. 나는 계속 싸울 것이다. 그리고 조그마한 좋은 것이라도 꼼꼼하게 챙겨서 어린이에게 줄 것이다. 거기까지가 내 일이다. 그러면 어린이가 자라면서 모양이 잘못 잡힌 부분을 고칠 것이다.

내가 이렇게 큰소리치는 것도 다 어린이 때문이다. 어린이가 그림을 망쳤을 때 “다 소용없는 일이란다. 구겨 버리렴”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고칠 수 있는지 보고, 안 되면 새 종이를 주고, 다음에는 더 잘 그리도록 격려할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이 말해야 한다. 실제로 어린이라면 어떻게 할까? 내가 새 종이를 주며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늘어놓기도 전에 어린이는 종이를 뒤집어 뒷면에 새로 시작한다. 냉소주의는 감히 얼씬도 못한다.



[김소영의 어린이 가까이]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스스로 되뇌이며 올바른 길을 찾는 것

▶김소영

독서교실에서 어린이와 함께 읽고 쓰고 배우고 가르친다. 비양육자로서, 돌봄과 교육의 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린이’에 관심이 많다. 어린이에게 좋은 세상이 어른에게도 좋은 세상이라고 믿는다. <어린이책 읽는 법> <말하기 독서법>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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