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을 권리, 낳지 않을 권리···'자발적 비혼모' 사유리가 쏘아올린 화두

이영경·탁지영 기자


‘자발적 비혼 출산’ 사실을 공개한 방송인 사유리의 인스타그램 캡처.

‘자발적 비혼 출산’ 사실을 공개한 방송인 사유리의 인스타그램 캡처.

“‘낙태를 인정하라’ 있잖아요. 근데 그거를 거꾸로 생각하면 아기를 낳는 것을 인정해라 이렇게 하고 싶어요. 낙태뿐 아니라, 아기를 낳는 것도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일본 출신 방송인 후지타 사유리(41)의 ‘자발적 비혼 출산’은 한국 사회에 커다란 화두를 던졌다. 그는 지난 16일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출산 소식을 공개했다. 한국에서 비혼모로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는 외국 정자은행을 통해 정자를 기증받아 일본에서 아들을 출산했다고 밝혔다. 먼 길을 돌아 원하던 생명을 품에 안은 순간, 사유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도 출산의 정반대 말 ‘낙태’였다.

“마이 바디, 마이 초이스(My body, my choice).” 낙태죄 폐지 시위에서 외쳐지던 구호는 임신과 출산을 원하는 비혼 여성의 입에서도 똑같이 흘러나왔다. “내 몸에 대한 나의 선택을 존중하라.”

‘원하는 아이를 낳을 권리’와 ‘원치 않은 아이를 낳지 않을 권리’는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재생산권에 대한 문제라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최근 정부가 낙태죄에 대한 처벌조항을 유지한 ‘낙태죄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불거진 여성 재생산권에 대한 논란은 사유리가 비혼 여성으로서 정자를 기증받아 임신·출산하는 것이 어려운 현실과 맞닿아 있다.

사유리가 16일 KBS 인터뷰를 통해 비혼 출산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여론이 폭발적으로 반응한 것도 이같은 맥락이다. 페미니즘 의학수다모임 ‘언니들의 병원놀이’ 박슬기 산부인과 전문의는 “비혼 여성이 아이를 키울 수 없어서 임신 중지하는 것도 안 되고, 비혼 여성이 자기가 원해서 아이를 낳는 것도 안 된다는 것은 결국 정상가족 제도 안의 사람들만 국민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라고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다양한 상황에 처한 여성들의 임신을 둘러싼 이야기 다룬 소설 <280일>의 작가 전혜진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자궁을 포함해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문제를 자신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여성에게 자기결정권이 있다는 것도, 낙태의 비범죄화와 정자은행 출산 이슈는 결국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KBS 방송 화면 캡처.

KBS 방송 화면 캡처.

원하는 아이를 낳을 권리

“한국에서 산부인과를 갔어요. 난소 나이 검사를 했는데 48살이라는 거에요. 의사선생님께서 자연임신이 어렵고 이 수치라면 지금 당장 시험관을 하더라도 성공확률이 높지 않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도 늦었는데 지금 시기를 놓치면 평생 애기를 못 가진다라고 솔직하게 말씀하셨어요. 사랑하지 않는 남자랑 결혼해서 급하게 시험관을 하고 아이를 가지냐, 아니면 혼자서 아이를 기르냐 선택지가 두 개밖에 없었어요. 근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급하게 찾아서 결혼하는 건 어려웠어요.”

높은 제도의 벽과 사회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사유리가 비혼 출산을 결심한 이유다. 사유리는 비혼 여성으로서 정자 기증을 받아 출산하는 것이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말로 요약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결혼하는 사람만 시험관이 가능하다. 한국에서 하고 싶었는데 못했다. 불가능했다”고 밝혔다.

생명윤리법은 임신을 위한 체외수정 시술시 시술 대상자의 배우자가 있는 경우 배우자 서면동의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시술 대상자가 비혼일 경우 배우자 서면동의가 필요하다는 별도의 조항은 없어 비혼 여성이 정자를 기증받아 체외수정 시술을 받는 것이 '불법'은 아니다.

하지만 의료현장은 다르다. 법률적 부부관계가 증명될 경우에만 체외수정 시술을 해주는 것이 관행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한산부인과학회는 2017년 보조생식술 윤리지침을 만들면서 "정자공여시술은 원칙적으로 법률적 혼인 관계에 있는 부부만을 대상으로 시행한다"고 정한 바 있다.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현장에서는 법적으로 부부라는 게 증명돼야만 시술에 있어서 비용 지원 등 허가가 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법적으로 체외수정 시술에서 비혼여성을 배제하고 있진 않지만, 일선 현장에서 실질적 '차별'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공공정자연구원 보고서를 보면 영국과 미국, 일본,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는 법적 부부뿐 아니라 비혼 여성과 동성 부부도 정자를 기증받을 수 있다.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는 “사유리씨의 사례는 재생산권과 가족구성권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출산할 권리와 하지 않을 권리를 이야기하는 연결 지점을 잘 보여준다”며 “출산을 장려하면서도 원하는 출산은 ‘결혼한 가부장제 구조 안에서의 출산’인 것이다. 모순적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2016년10월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집회에 참여한 한 여성이 ‘My Body. My Decision.’(나의 몸, 나의 결정)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서성일 기자

2016년10월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집회에 참여한 한 여성이 ‘My Body. My Decision.’(나의 몸, 나의 결정)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서성일 기자

원치 않는 아이를 낳지 않을 권리

사유리의 ‘자발적 비혼 출산’은 ‘낙태죄 이슈’를 소환했다. 헌법재판소가 2019년 낙태죄 처벌조항이 위헌이라는 취지로 판단하자 정부는 임신 초기인 14주까지는 요건 없이 임신중단을 허용, 15~24주 내에는 사회·경제적 이유의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은 '낙태죄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하지만 위헌 판결의 핵심인 처벌조항은 유지했다. 여성이 낙태를 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의사, 한의사, 조산사 등이 낙태를 하게 하면 징역 2~3년 이하의 처벌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여성에 대한 처벌을 유지하고 보건의료에 대한 접근성을 제약해 건강권과 자기결정권, 사회적 권리 제반을 제약하는 기만적인 법안”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허민숙 여성학자는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고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온전히 여성이 가질 수 있다는 가장 근본적인 원칙을 무시한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는 “사유리가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며 ‘생명을 존중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이를 낳고 키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지원할지’라는 메시지를 전했다”며 “정말로 생명을 존중한다면 이미 태어난 아이들과 아이를 정말로 원해서 키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장벽이 없도록 도와주는게 사회가 할 일이라는 이야기를 명확하게 전한 것”이라고 말했다.

낳을 권리, 낳지 않을 권리···'자발적 비혼모' 사유리가 쏘아올린 화두

‘정상 가족’을 벗어난 다양한 가족에 대한 인정이 필요

“일본도 한국도 세계에서 저출산 1위 2위 일거예요. 근데 아기를 가지려고하는 사람을 도와주지는 않아요. 아이를 갖기 어려운 사람이 회사 쉬고 병원을 다녀야 하는데 도와주지를 않고 일을 그만둬야 해요.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면 법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런 기증을 자유롭게 받을 수 있는 구조에 대해 이야기 해봤으면 좋겠어요.”

“한국에서는 싱글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많다고 느꼈어요. 제가 이런걸 하면 어떨까 하고 말하면 사람들이 욕하고 싫어할 것이다 생각했죠. 제가 욕먹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거는 괜찮아요. 그런데 애기를 이상한 눈으로 볼 수 있잖아요. 저 때문에, 제 욕심 때문에, 아빠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 미안했어요. 솔직히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하고 아빠가 있는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산부인과에 갈 때도 남편이랑 같이 오는 사람, 아빠가 애기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 너무 부러웠어요. 근데 만약 계속 폭행하고 술 마시는 아빠가 있는 것보다는 엄마가 혼자여도 열심히 살면 애기가 이해해준다고 생각해요. 아빠가 있는게 최고겠지만 시선이 많이 변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어렵겠지만요.”

사유리는 ‘저출산’을 우려하면서도 정작 정상가족 밖의 출산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 사회, 또 비혼모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한국의 혼외출산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최저 수준이다. 2018년 OECD 가입국 혼외출산율 평균은 40.7%인 반면, 한국은 2.2%다.

권김현영은 “페미니즘 운동의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정상가족’을 벗어난 다양한 형태의 대안적 가족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인데, 한국 사회에는 너무 틈이 없어 그런 선택을 하고 싶어도 제도적 차원에서 거의 불가능하다”며 “사유리가 그런 변화의 화두를 던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유리의 ‘자발적 비혼모’ 선택에 대한 폭발적 반응은 20대 여성들이 비혼을 선택하는 건 기존의 낡은 결혼 제도와 가부장적 질서를 고치자는 의미였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김순남 대표는 “출산율은 역설적으로 ‘저출산 정책’을 포기해야 해법이 보인다. 우리가 아이를 낳았을 때 사회에 어떤 시스템이 있는가로 질문이 이동해야 한다. 출산율이 오르냐 아니냐의 도구적인 구도를 벗어나야 한다”며 “사회가 가족구성권, 재생산권에 기반해 그 결정을 존중하고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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