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생존자, 오늘도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반기웅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김선정씨(가명·36)는 경기도의 한 플라스틱 제조회사 품질검사팀에서 일했다. 정규직으로 입사했고, 오래 다닐 생각이었다. 2018년 10월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퇴근하고 씻는데 가슴에 멍울이 잡혔어요. 병원에서 검사해보나 마나 유방암일 확률이 높다고 하더군요. 제일 먼저 든 생각이 ‘회사는 어떻게 하지’였어요.”

김씨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4개월 질병휴가(병가)를 내고 복귀할 생각이었는데 예상보다 치료가 길어졌다. 항암과 방사선, 표적, 재활치료를 받았고 4개월 병가가 끝나갈 때 즈음 2개월 연장했다. 이후 회사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당신이 회사의 인력 티오를 잡고 있다. 하지만 너무 신경 쓸 것 없다. 그런데 언제쯤 돌아올 수 있냐’고 물었다. 회사의 전화는 주기적으로 이어졌다. 비슷한 대화를 여러차례 했다. 어느 날 회사에서 ‘일주일 쉬고 다음 2주는 일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김씨는 제안을 거절했고 얼마 뒤 회사를 그만뒀다. “따지고 보면 해고는 아니죠. 그런데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근로기준법은 공무원을 제외한 노동자에게 병가를 보장하지 않는다. 민간기업은 자체 규정에 따라 병가를 운용하기 때문에 사업장마다 상황이 다르다. 민간기업의 평균 병가기간은 90일 정도에 그친다. 이 때문에 국내 암생존자 절반가량은 직장을 포기한다. 실제로 암진단 당시 직장을 가지고 있던 암환자를 2년간 추적 조사했더니 53%의 환자가 직장을 잃었고, 이들 가운데 치료 후 재취업한 비율은 23%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Psycho-Oncology, 2007). 2014년 서울대병원 암통합케어센터에서 폐암 경험자 829명을 대상으로 한 암발병 전후 고용 변화 조사에서도 대상자의 43%가 직장을 잃었다고 답했다.

한국은 질병 관련 차별금지법 없어

김씨는 1년 넘게 치료에 전념했다. 지난해 3월 지역의 학교 계약직으로 취업했다. 채용 전형 과정에서 암 병력을 밝히지 않았다. 추적검사를 받으러 가는 날에는 연차를 냈다. 김씨는 주변 직원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아 더 일에 몰두했다. 검사를 위해 연차를 아껴야 했기 때문에 쉬지 않고 일했다. 무리였을까. 후유증이 나타났다. 몸 상태가 악화하면서 병원에 자주 가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관리자에게 암환자라는 사실을 밝혔는데 학교 측은 “채용 전 암환자는 사실을 알았다면 고민했을 것”이라며 “함께 일하기 부담스럽다”는 뜻을 전해왔다. 당초 재계약 의사를 밝혀왔던 학교 측은 김씨와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김씨는 “학교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면서도 병력에 따른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씨가 당한 차별은 구제받을 방법이 없다. 국내에는 암 병력 등 질병과 관련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없다. 국내와 달리 미국장애인법(ADA)은 암생존자들에게 차별 대우를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내 암생존자의 사회복귀율은 30%대에 그친다. 김씨와 같은 유방암 생존자의 사회복귀율 역시 33%다. 유방암 진단 후 1년 반 기준 사회복귀율이 평균 80%를 웃도는 유럽과 비교하면 크게 떨어지는 수치다. 지난해부터 시행 중인 경력 단절 여성 등의 경제활동 촉진법도 김씨와 같은 암생존자를 보호하지 못한다. 경력단절여성법 대상은 혼인, 임신, 출산, 육아와 가족구성원의 돌봄 등을 이유로 경제활동을 중단한 여성이다. 자신의 치료를 위해 경제활동을 중단한 경우는 제외된다.

경력 단절로 인한 사회복귀 실패는 생계에 영향을 미친다. 사단법인 쉼표가 300명의 젊은 유방암 생존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암 발병 후 경력 단절, 직종 변경으로 인한 수입 감소 금액은 월평균 171만원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소득 손실은 개인의 몫이다. 질병을 이유로 근무할 수 없는 경우 상실되는 소득분을 보장해주는 상병수당 제도가 있긴 하지만 보장 대상은 임신과 출산 진료비로 한정돼 있다. 암과 같은 질병으로 인한 소득손실은 보장 대상이 아니다. 김씨는 “아파서 퇴사하면 실업급여 신청도 안 된다. 재취업이 힘들다고 판단돼 지급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재취업 지원 프로그램도 없다. 여러 곳에 알아봤는데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다행히 암은 완치가 됐는데 삶의 질이 전보다 떨어졌다”고 말했다.

삼성서울병원 제공

삼성서울병원 제공

더 쉽게 무너지는 젊은 암생존자

경제적 지원만큼 필요한 것은 심리적 지지다. 생계와 직업적 발전에 대한 두려움, 주변 시선에 대한 부담이 암생존자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특히 젊은 암생존자 사이에서 심리·사회적 문제가 두드러진다. 삼성서울병원 암병원에서 진행한 디스트레스 조사(15세 이상 암환자 8510명)에 따르면 15~39세 암환자는 65세 이상 환자보다 직장·재정 문제는 5배, 육아 문제는 6.3배 더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용동작심리치료사 신연수씨(가명·39)는 2008년 신장암 진단을 받았다. 당시 신씨는 서울의 한 공공기관과 분기별로 계약을 맺고 수업을 하는 프리랜서였다. 신씨는 암 발병 사실을 숨겼다. “큰 병으로 수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기관에서 재계약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죠” 암보험을 들어놓지 않아 치료비도 부담이었다. 이대로 실직하면 끝이라는 불안감이 컸다.

신씨는 수술을 한 뒤 3주 만에 수업을 진행했다. 기관에서 대체인력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수업을 미룰 수 없었다. 프리랜서였기 때문에 병가도 낼 수 없었다. 결국 몸에 무리가 왔다. 척추에 문제가 생기면서 2년 동안 일을 하지 못했다. 신씨의 삶에서 2년이 사라졌다. 무엇보다 정신적인 후유증이 컸다. 암 발병과 수술 이후 충분히 회복하지 못하고 일을 강행한 것이 화근이었다. 극심한 우울증이 찾아왔다. 암 관련 뉴스만 들어도 공포와 분노가 밀려왔다. 신씨는 “내가 가진 질병에 대해 충분히 애도하고 인식을 한 뒤 일을 해야 했다”며 “그 시간을 건너뛰고 막무가내로 일을 하던 시간이 트라우마가 돼서 돌아왔다”고 말했다.

암생존자의 권리는?

장은종씨(37)는 지난 2019년 임신 5주차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지역 병원에서 그가 처음 들은 말은 ‘아이를 포기하라’는 권유였다. 장씨는 그렇게 쉽게 아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와 산모가 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논문을 찾고 기사를 검색해 정보를 모았다. 아이를 잃지 않고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았다.

항암치료 기간 동안 장씨는 케어를 받기 위해 요양병원을 알아봤다. 병원 측에서는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임산부는 위험하다. 우리는 케어 못 한다”며 장씨를 곤란해했다. 결국 장씨는 요양병원을 포기하고 집에서 케어를 받았다. 지난해 1월 장씨는 무사히 아이를 출산했다. 장씨는 자신이 암환자라는 이유로 아이를 낳을 권리와 치료받을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후 암환우 커뮤니티를 살펴보니 ‘나는 잘 몰라서 아이와 의절했다’는 엄마들이 많았다. 장씨는 “나와 아이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알려진 바와 달리 임산부도 암치료와 출산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꼭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장씨는 현재 암생존자를 위한 NGO에서 일한다.

맞춤형 재활 운동 처방을 위해 모인 암 경험자들. 사단법인 쉼표 제공

맞춤형 재활 운동 처방을 위해 모인 암 경험자들. 사단법인 쉼표 제공

1988년 미국을 시작으로 캐나다, 이탈리아 등 해외에서는 매년 6월 5일을 암생존자의 날로 지정해 캠페인을 벌인다. 암생존자의 권리 강화와 암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서다. 김수근 강북삼성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직업성 암과 직장복귀 기고문에서 “암에 대한 의료적 측면 지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측면의 지원이 필요하다”며 “암생존자 권리에 대한 홍보와 정보 제공을 통해 인식의 전환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일본의 암환자에 대한 직장생활 지원정책, 대한산업보건협회)

정부도 암생존자의 사회적 복귀에 관심을 갖고 있다. 암관리법을 근거로 암생존자의 건강증진과 사회복귀 지원을 위한 ‘암생존자통합지지사업’을 시행 중이다. 대표적인 사업은 전국 12개 암센터에 설립한 암생존자 통합지지센터다. 암생존 클리닉과 심리, 재활 등 상담 프로그램 중심이다. 프로그램 참가자의 평균 연령은 50대로 중장년층, 고연령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젊은 암생존자의 감수성과 맞지 않는다. 일자리 복귀와 출산, 육아 등 젊은 암생존자에게 필요한 지원과도 거리가 있다. 서지연 사단법인 쉼표 대표는 “제4차 암관리 종합계획에도 암생존자의 사회복귀와 청년 암케어 부분이 포함되지 않았다”며 “암관리는 예방과 치료, 질병 데이터 수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력 단절과 육아, 자기돌봄 지원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Today`s HOT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