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일제 강제동원위 비망록···“한국 정치가 중단한 진상규명”

김찬호 기자
강제동원위원회에서 활동한 조사관들. 왼쪽부터 허광무 박사, 정혜경 박사, 오일환 중앙대 교수 / 박민규 기자

강제동원위원회에서 활동한 조사관들. 왼쪽부터 허광무 박사, 정혜경 박사, 오일환 중앙대 교수 / 박민규 기자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한국 정부가 인정한 피해자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익숙한 듯하지만 막상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그동안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사연이 공개된 적은 많았다. 하지만 강제동원이 ‘무엇’이고, 어떻게 피해를 ‘분류’하고 ‘입증’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몇몇 수치는 제대로 공개된 적도 없고, 상황에 따라 용어 정의도 변했다. 심지어 이를 밝히려는 작업은 과거 정부에 의해 멈췄다. 따라서 위의 질문에 ‘모른다’고 답했다면 정답을 말한 셈이다.

그럼에도 강제동원과 관련해서는 ‘할 만큼 했다’는 주장도 있다. 위로금이 지급됐기 때문이다. 돈의 위력은 크다. 중요한 것이 역사적 진실의 규명인지, 금전적 보상인지를 혼동하게 한다. 두가지가 연결돼 있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적어도 역대 정부는 강제동원 문제를 그렇게 다뤄오지 않았다.

정치권에서 이 문제는 진상규명보다 피해자에게 위로금을 주고 빨리 매듭지어야 할 문제였다. 실제로 정부가 집행한 ‘돈’은 1965년 한일협상으로 받은 배상금의 늦은 집행이 아닌 ‘인도적 차원’의 지원이었다. 또 진상규명을 위해 출범한 조직을 위로금 지급 업무에 활용하다 끝내 폐지했다. 2015년 12월 31일 문을 닫은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 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의 이야기다.

광복 후 76년이 지났다. 강제동원 피해자 상당수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보상이 급해서 진상규명은 빨리 끝내야 한다는 논리는 더 이상 맞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는 잠시 묻어뒀던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경향신문은 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조사관들을 수소문해 만났다. 지난 11년간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이들의 이야기는 모두 한가지 물음에서 모인다. “대체 한국 정치에게 대일항쟁기 피해는 어떤 의미인가.”

■시한부 위원회의 탄생

현대사에서 대일항쟁기 피해 역사를 정리할 절호의 기회가 한 번 있었다. 2004년부터 11년간 존속했던 ‘위원회’의 활동이다. 위원회 설립 근거가 된 것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다. 해당 법 제1조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법의 취지를 따라가지 못했다.

위원회가 처음부터 35자에 달하는 긴 이름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2004년 출범 당시에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였다. 이 조직은 태생적 제약이 있었다. 최초 진상조사 개시결정일 이후 2년 이내에 피해자에 대한 조사를 완료해야 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는 연인원 780만명으로 추산된다. 단순 통계나 숫자가 아닌 사람의 수다. 위원회가 반드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고 분류한 사건·사고도 303개였다. 하지만 이를 추적·조사하는 데는 단 2년만이 허락됐다.

위원회로 파견 나온 10여명의 행정공무원이 진상조사를 할 수는 없었다. 2005년 2월 공개채용을 통해 최소한의 전문 인력 충원에 나섰다. 처음에는 별정직 공무원(4급) 1명과 역사학 전공 석·박사 조사관을 다수 채용했다. 하지만 조사관들은 1년마다 재계약을 해야 하는 신분이었다. 불안한 지위 문제로 이들은 다른 역사 관련 위원회가 발족하면 자리를 옮겼다. 결국 인력충원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2005년 4월 15일 첫 진상조사가 시작됐다.

법에 명시된 위원회의 임무는 크게 여섯가지다. ‘강제동원 피해 진상조사’, ‘피해관련 국내외 자료수집·분석 및 보고서 작성’, ‘유해 발굴 및 수습’, ‘희생자 및 유족의 심사 결정’, ‘사료관 및 추도공간 조성’, ‘호적 등재’다.

가장 중요한 진상규명은 진상조사와 피해조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두 조사를 하나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엄밀히 말해 다르다. 진상조사는 주제별로 진상을 규명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총동원 정책, 집단학살 등의 주제를 정하고 조사를 진행하는 것이다. 꼭 필요한 주제는 위원회 직권으로 조사할 수 있었다.

반면 피해조사는 개인이 입은 피해를 조사해 진상을 규명하는 방식이다. 신고가 접수된 내용을 조사해 법령이 정하는 강제동원피해에 해당하는지까지 판단한다. 정부는 2005년 2월부터 2008년까지 총 3번 기한을 나눠 피해신고 접수를 받았다. 실질적 접수기간은 단 15개월에 그쳤다. 그럼에도 총 22만8126건의 피해가 접수됐고, 52건의 진상조사가 수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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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가 접수된 사례들은 다시 피해유형별로 나눴다. 사망, 행방불명, 후유장애, 귀환 후 사망, 귀환 후 생존 항목으로 분류됐다. 위원회에서 조사과장을 지낸 정혜경 박사는 “이중 주목할 만한 부분은 후유장애 피해였다”며 “강제동원으로 신체적·정신적 피해가 남은 경우인데 조사과만으로 이 피해를 조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는 기술적 문제였다. 후유장애를 조사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없었다. 이에 따라 정신적 피해는 거의 인정되지 못했고, 신체적 피해도 입증할 자료가 없다면 인정이 제한됐다. 정 박사는 “홋카이도 탄광에서 청력을 상실한 피해자가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상황을 자책하며 눈물만 흘리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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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한계는 있었지만 위원회는 조사틀을 갖추고 보고서 등에서 성과를 냈다. 정치권 역시 기한 연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법은 존속 기한을 연장하는 방향으로 계속 개정됐다. 하지만 매번 2년 이내의 시한부 연장이었다. “무기한 기한을 연장해 고령의 피해자와 유가족을 애태우게 할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피해실태를 밝히고, 역사에 남길 목적이라면 위원회 조사는 계속돼야 했다. 반면 보상에 초점을 둔다면 조사는 빨리 끝날수록 좋았다. 미완의 결과라도 보상기준으로 삼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후자를 택했다. 빠른 보상은 선거에서 ‘표’를 기대하게 한다는 점이 주요했다.

위원회의 시한부 연장은 조사관들을 지치게 했다. 위원회 출범부터 2009년까지 일했던 방일권 한국외대 교수는 “2년이라는 시간 중 1년은 진상조사를 하고 나머지 1년은 위원회 기한 연장을 위해 뛰어야 하는 시간이었다”며 “위원회를 없어질 기구로 보고 제때 예산배정을 해주지 않아 맡겨진 일을 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사관들은 알지 못했다. 이 시기가 그나마 진상규명에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는 것을. 위원회의 업무는 2010년 극적인 변화를 맞는다.

■위로금 지급 기관으로

변화의 전조는 이미 2006년에 나타났다. 당시 행정자치부는 ‘일제강점하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제출했다. 내용은 ‘희생자와 그 유족 등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위로금 등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법안은 몇차례 수정을 거쳐 2007년 11월 23일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진상규명과 동시에 지원이 개시됐다. 본격적인 위로금 국면의 시작이었다.

법은 몇가지 한계가 있었다. 우선 위로금 지급대상자를 국외 강제동원 피해자로 한정했다. 국내로 강제동원된 피해자는 배제됐다. 이는 법이 1965년 한일협정에 귀속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일협정 당시 한국 정부는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했다. 이를 근거로 위로금 지급마저 배제됐다.

또 다른 문제는 지원업무를 전담하는 별도 위원회를 설치했다는 점이다. 하나의 사무국 아래 진상규명을 담당하는 조사위원회와 위로금을 담당하는 지원위원회를 따로 두는 형태였다. 부처 간 협업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단순히 사람들 간 융화의 문제가 아니었다.

두 위원회는 피해신고, 위로금 신청을 받는 기간이 달랐다. 조사위원회는 총 세차례 접수를 받고 더 이상 신고를 받지 않았다. 접수기간을 놓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늦게 출범한 지원위원회에 신청했다. 결국 지원위원회도 지급 심사에 필요한 별도의 진상규명을 하는 상황이 됐다. 두 위원회는 처음부터 신고-진상규명-피해판정-위로금 지급의 선순환적 협업을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이미 엇박자가 난 상황에서 정부는 2010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근거로 두 위원회를 하나로 합쳤다. 이는 강제동원위원회가 ‘위로금’ 지급 기관이 되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하나로 합쳐진 위원회 업무는 진상규명보다 피해자 지원에 맞춰졌다. 피해사례 수집과 분석은 중단됐고, 기존에 확정된 피해유형에 맞는 경우에만 지원이 결정됐다. 위원회의 대외협상을 이끌었던 오일환 중앙대 교수는 “존속 기한 연장에 몰두한 시간을 제외하면 대일항쟁기 피해 역사를 정리한 기간은 3년도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피해자 수를 줄여버린 위로금 정책

위원회의 지원사업은 독특한 점이 있었다. 우선 ‘신청주의’라는 점이다. 신고와 신청은 입증 책임이 다르다. 신고는 피해사례가 접수되면 정부가 객관적 자료를 확보해 피해자 여부를 판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반면 신청은 피해자 스스로 증빙자료를 갖춰 위로금 등을 요청하는 방식이다. 이미 고령인 피해자들이 피해사실을 입증할 서류를 직접 제출해야 했다. 피해당사자라면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유가족인 경우 피해자가 어떤 피해사례에 해당하는지부터 찾아야 했다.

강제동원 피해자 중 정부로부터 위로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희생자, 생환자 중 생존자, 미수금 피해자다. 용어구별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진상규명 단계에서 사용한 용어와도 달랐다. 진상규명에서는 통칭 ‘피해자’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피해자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돼 군인, 군속, 노무자, 위안부 등의 생활을 강요당한 자가 입은 생명, 신체, 재산 피해’를 의미했다.

반면 지원은 피해자를 세분화했다. ‘희생자’는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돼 현장에서 혹은 돌아오는 과정에서 사망한 자, 행방불명자, 부상자를 의미했다. ‘생환자’는 일제에 의해 군인, 군무원, 노무자 등으로 국외로 강제동원됐다가 국내로 돌아온 사람 중 건강하게 귀환한 사람을 의미한다. ‘미수금 피해자’는 국외로 강제동원돼 노무 제공을 했음에도 일본 정부 및 일본 기업 등으로부터 급료, 수당 등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결정적으로 이들이 겪은 피해는 1938년 4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 사이에 발생한 것이어야 한다.

위로금을 받기 위해서는 조사위원회에서 피해자 판정을 받았더라도 지원위원회에 별도로 ‘지급신청’을 해야 했다. 일부 피해자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또 조사위원회 의결을 지원위원회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양 위원회에서 결정한 피해자 수가 다르다는 점이다. 조사위원회에서 피해자로 결정한 것은 약 21만명이다. 반면 위로금 신청은 11만2556건이 접수됐고, 이중에서 7만2631건만 인정됐다. 위로금은 사망, 미수금 등과 같은 사유로 1인당 총 3개 항목까지 중복 지원이 가능했다. 이에 따라 지원위원회에서 실제 피해자로 인정된 것은 최대 약 7만명에서 최소 약 2만5000명 정도다.

결국 강제동원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가 아닌 사람들이 발생하게 됐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피해 사실을 입증할 자료를 뒤늦게 발견한 사람들이다. 조사위원회, 지원위원회는 모두 접수 기한에 제한이 있었다. 이들 역시 피해자이지만 피해자가 아닌 사람들로 남았다. 오 교수는 “기간을 정해두고 신청한 사람만 보상해준다는 발상은 정부 스스로 피해자 수를 축소한 결과가 됐다”며 “결국, 일본 정부만 좋은 일이 된 셈”이라고 말했다.

조사위원회가 신고받은 피해 내용을 정리한  ‘피해진상 관리시스템’ / 정혜경 박사 제공

조사위원회가 신고받은 피해 내용을 정리한 ‘피해진상 관리시스템’ / 정혜경 박사 제공

그렇다면 강제동원피해자로 정부의 인정을 받은 사람은 몇명일까. 조사위원회가 받은 신고는 전산 상 ‘피해진상 관리시스템’으로 분류됐다. 반면, 지원위원회가 받은 신청은 ‘위로금 등 지급관리시스템’으로 분류됐다. 지원위원회가 피해자로 인정한 사람 중에는 조사위원회와 겹치는 사람도 있고, 뒤늦게 새로 신청한 사람도 포함된다. 결국 중복된 사람은 제외하고, 새로 인정된 사람은 추가해야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있다.

해당 시스템을 이관받은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관계자는 “현재까지 이 시스템들을 업무에 사용하고 있지만 두 시스템은 연동되지 않는다”며 “위로금 등 지급관리시스템에서 통계자료를 추출해내기 어렵기 때문에 확인을 위해서는 하나하나 검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정부가 인정한 강제동원 피해자는 각각의 기록마다 기준이 다르고 정확한 수치도 알기 어려운 상태다. 위원회 조사과장·심사과장을 지낸 허광무 박사는 “접수 기한을 제한하는 법을 개정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었지만 정치권에 이를 아무리 설명해도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위원장들의 기행

위로금 지급이 위원회의 주요 업무가 되면서 피해 사례를 모으고 역사로 남기는 작업은 소수 조사관에게 맡겨졌다. 이들이 새로운 자료발굴과 진상조사를 추진하면 “시간을 끌며 자리를 지키려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정부와 국회 역시 빠른 처리를 요구했다.

“청와대 행정관의 지시로 피해자에게 전화하는 시간을 계산한 업무순환도를 만들어 제출했다. 조사관 한명이 하루에 처리할 건수도 제출했다. 행정관은 ‘무슨 전화통화를 하는데 몇분씩 걸리냐. 1분이면 됐지’라며 질타했다” 조사과장으로 자주 불려갔던 정 박사의 말이다.

현장에서 피해자와 직접 대면하며 사례를 수집했던 각 시·군·구 전문위원들에 대한 예산도 끊겼다. 피해 역사를 수집하는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이 자리는 ‘공무원’이 대체했다. 남은 조사관들 업무는 더욱 가중됐다. 하지만 이들을 가장 지치게 한 것은 정치권에서 내려보낸 낙하산 인사였다. “위원장들 일화를 모아 책을 한권 내자”는 말이 조사관들 사이에서 유행할 정도였다.

정 박사는 “노무현 정부 때 새로운 국장 한명이 내려왔는데 강제동원위원회가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면접을 보러왔다”며 “그는 면접장에서 ‘독립운동을 열심히 기념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청와대 지시였기 때문에 인사위원들이 ‘강제동원위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설명해준 뒤 그를 국장으로 받았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로 바뀐 후에 이러한 인사는 더욱 심해졌다. 산부인과 전문의, 출마를 앞둔 검사출신 인사가 위원장으로 내려왔다. 조사관 A씨는 “일본 유텐사에 있던 유골을 봉환하는 추도식에서 당시 위원장이 소주를 마시고 취해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 있던 모습이 기억난다”며 “옆에는 두손을 공손히 모은 일본대사가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조사관 B씨는 “일본과 유골봉환 협상을 마무리짓기 위해 당시 위원장을 모시고 출국했다”며 “일본 하네다공항에 내리자마자 위원장이 본인 공천에 문제가 생겼다며 그 자리에서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그해 일본과의 유골봉환 협상은 결렬됐다.

■한국 정치에서 피해 역사란 무엇인가

위원회가 관심을 받는 것은 3·1절, 광복절, 일본의 ‘다케시마의 날’ 정도였다. 정치인들은 대중 앞에서 위원회가 만든 자료를 흔들며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반성을 외쳤다. 그리고 돌아서며 위원회 해산을 지시했다. 허 박사는 “피해를 조사해 역사에 남기는 일, 억울함을 해소하고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 이역만리로 끌려간 피해자를 사후에라도 모시고 오는 것 등은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책무가 아니냐”고 말했다.

강제동원위원회에서 활동한 조사관들. 왼쪽부터 오일환 중앙대 교수, 정혜경 박사, 허광무 박사 / 박민규 기자

강제동원위원회에서 활동한 조사관들. 왼쪽부터 오일환 중앙대 교수, 정혜경 박사, 허광무 박사 / 박민규 기자

2015년 12월 31일 위원회는 11년간의 굴곡 많았던 여정을 멈췄다. 마지막으로 조사관들에게 “위원회가 부활한다면 다시 참여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들은 모두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오랜 침묵 끝에 정 박사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위원회가 해산되며 최소한 이것만은 조사를 이어가달라고 마지막 보고서를 올렸다. 하지만 이마저도 무시됐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지난 11년 최선을 다했다.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해 위원회가 해산된 것에 책임감을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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