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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올림’픽 대신 가슴 ‘울림’을 픽하다

김서영 기자
7월 28일 일본 도쿄 수영센터에서 열린 수영 100m 준결승에서 황선우 선수가 활짝 웃고 있다.  /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7월 28일 일본 도쿄 수영센터에서 열린 수영 100m 준결승에서 황선우 선수가 활짝 웃고 있다. /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올림픽은 스타를 창조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일년 연기되며 우여곡절 끝에 개최된 2020 도쿄올림픽에서도 한국 대표팀은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그러나 이번엔 다소 색다르다. 우리는 투혼과 열정에 더해 행복과 즐거움까지 내비치는 국가대표를 마주했다. 이른바 ‘즐기는 자’의 탄생이다. 이를 두고 ‘MZ세대의 올림픽’이라며 환호가 뒤따랐다.

‘즐기는 자’는 자연발생하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한국사회는 스포츠와 메달의 의미를 따져 묻는 뼈아픈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 이는 올림픽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가란 질문과도 맞닿는다. 어렵사리 ‘즐기는 자’를 일궈낸 한국사회는 이제 새로운 스포츠 문화로의 갈림길에 서 있다.

2020 도쿄, ‘즐기는 자’의 출현

“많은 분이 응원해주셔서 즐기면서 행복하게 수영했다. 이번 도쿄 물속에서 행복하게 헤엄친 것 같다.”(황선우·수영)

“첫 올림픽이니까 실망하지 않겠다.”(이선미·역도 87㎏ 이상급)

“정말 오늘 밤 높이 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우상혁·육상 높이뛰기)

2020 도쿄올림픽은 ‘즐기는 자’의 탄생을 알렸다. ‘노메달’에 그친 선수들은 더는 과거처럼 “국민께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대신 행복했다, 다음 기회가 있다, 응원과 격려가 힘이 됐다는 등의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 2012 런던올림픽에서 역도 장미란 선수가 4위로 마무리하며 “아쉬움과 실망감을 드렸을까봐 염려된다”며 눈물을 보였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 때문에 이번 올림픽을 두고 금메달 지상주의가 사라졌다, 슬픈 은메달은 없다는 등의 평가가 나왔다. 장인화 선수단장은 지난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결산 기자회견에서 “은메달을 따고도 ‘금메달을 못 따 죄송하다’던 과거 선배들과 달리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 만족하고, 세계적인 선수들과 기량을 겨루는 자체를 즐겼다”고 밝혔다.

이들은 ‘즐기기’와 ‘최선 다하기’가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줬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는 “자신의 성취에 대해 즐거워한다는 것이 열심히 안 했다거나 ‘이 정도면 됐다’고 자기만족하는 건 아니다. ‘원없이 했다’는 의미”라고 평했다. 이어 정 평론가는 “예전에도 이런 경우가 드문드문 있었지만 한 선수의 캐릭터나 개성 정도로 여겨졌다면, 이번에는 대부분 자기표현을 했다는 것이 변화”라고 말했다.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 역시 ‘즐기는 자’였다. 이들은 “메달 색으로 잠재력을 평가할 순 없다”, “내 마음속 금메달” 등 응원을 남겼다. 기사 댓글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메달 순위를 이렇게 안 찾아본 올림픽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관람평이 이어졌다. 더 나아가 팬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선수들의 ‘배경 서사’를 풍부하게 찾아나섰다. 이번에도 출전한 요트 하지민 선수가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음에도 아무도 중계해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온라인에서 퍼졌고, 이밖에도 선수들의 과거 인터뷰 내용이나 ‘짤’이 활발히 공유됐다.

8월 2일 일본 도쿄 국제포럼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역도 최중량급(87kg 이상)에서 이선미 선수가 용상 148kg에 성공했다. / 연합뉴스

8월 2일 일본 도쿄 국제포럼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역도 최중량급(87kg 이상)에서 이선미 선수가 용상 148kg에 성공했다. / 연합뉴스

선수들이 응원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것 역시 이번 올림픽의 특징이다. 탁구 신예로 떠오른 신유빈 선수는 유튜브 채널 <삐약유빈>을 개설했고, ‘숏컷 열풍’을 불러일으킨 양궁 금메달 3관왕 안산 선수는 팬들이 모인 채팅방에 입장해 이야기를 나눴다. 수영 황선우 선수, 배구 주장 김연경 선수를 비롯해 많은 국가대표가 올림픽 기간 SNS를 활발히 활용했다.

경기를 두루 챙겨본 박모씨(30)는 “그간 흔히 쓰였던 ‘효자종목’이라는 말 자체가 이상하다. 메달 못 따면 불효자인가. 선수들의 피, 땀, 눈물을 인정하고 감동하는 것이 의미 있다”고 말했다. 그 역시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 종합순위를 별도로 찾아보거나 의식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올림픽을 볼 때와는 달라진 점이다. 박씨는 “여자배구에서 한유미 해설위원이 ‘스포츠는 경쟁이 아니라 감동’이라고 말했던 것에 공감이 간다. 질책, 아쉬움, 메달 획득에 대한 국가적 사명감에서 벗어나 선수들의 노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메달의 진정한 의미를 묻다

2021년 7월과 8월 우리가 목격한 ‘즐기는 자’는 과연 어디에서 나타났을까. 즐기는 자가 연출한 ‘훈훈한’ 광경을 두고 이번 올림픽에 출전한 주요 그룹인 MZ(1980~2000년대 출생)세대의 발랄함과 당돌함을 배경으로 지목한 보도가 잇따랐다. 이들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MZ세대 국가대표의 즐기는 모습, 이를 향한 지지와 응원에는 단순 세대론으로는 짚어낼 수 없는 ‘아픈 맥락’이 있다.

2016 리우올림픽과 2020 도쿄올림픽 사이 한국 엘리트 체육계는 내부에서부터 크게 무너졌다. 이 5년간 스포츠계에 만연한 폭행 및 가혹행위, 성폭력, 학교폭력에 대한 고발이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경주시청 소속 트라이애슬론 선수였던 고 최숙현 선수는 지난해 6월 팀원들의 구타와 가혹행위에 시달려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망 전 부모에게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란 메시지를 남겼고, 이후 국회에서 청문회가 진행될 정도로 사회적 충격을 안겼다. 조재범 전 쇼트트랙 코치는 국가대표 선수를 미성년자 시절부터 상습 성폭행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0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아 수감 중이다. 이밖에 유도 등 친숙한 종목에서도 미투가 이어졌다. 가장 최근엔 배구 국가대표 자매가 학교폭력 의혹으로 물러났다. 이처럼 뿌리부터 흔들리는 스포츠 생태계를 바로잡아보고자 스포츠혁신위원회가 출범하고 스포츠윤리센터가 설립된 것이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체육교육)는 “그동안 스포츠계에 일련의 큰 비극이 이어지면서 엘리트 체육의 존재 이유에 대한 심도 있는 비판과 회의가 있었던 것”이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꾼 근본 원인이라고 짚었다. 선수들이 각종 부조리에 희생되는 것을 보면서 한국사회가 이젠 ‘메달과 스포츠의 진정한 의미’를 따져 묻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세대가 바뀌어 스포츠의 본질을 즐기게 됐다고 하기엔 그동안 치러야 했던 피눈물이 많았다”고 했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역시 동감했다. 그의 분석이다. “불과 몇개월 전만 해도 ‘한국 스포츠가 이래서야 되겠는가’란 여론이 비등했다. 특히 고 최숙현 선수가 사망했을 때 여론은 ‘그렇게 해서 딴 금메달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번에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은 국민이 스포츠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지켜봤다. 그 결과 국가대표에 발탁돼 자연스럽게 자기표현을 하게 된 것이다.” 정 평론가는 이어 “과거엔 사회적 물의를 빚은 선수나 감독이 ‘메달로 보답하겠다’고 하곤 했다. 그런데 점점 ‘경기로 보답할 필요 없다, 그런 메달은 의미가 없다’는 사회적 합의가 되면서 4위를 해도 박수를 쳐준다.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시민적 성숙에 스포츠 문화도 같이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우상혁이 8월 1일 도쿄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육상 높이뛰기 결전에서 2.35m를 성공한 후 기뻐하고 있다.  /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우상혁이 8월 1일 도쿄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육상 높이뛰기 결전에서 2.35m를 성공한 후 기뻐하고 있다. /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그런 시대는 지났다

엘리트 체육의 오랜 목표였던 ‘국위선양’이 시대가 지나며 자연스레 빛이 바랜 점도 ‘즐기는 자’ 출현의 한 원인으로 꼽힌다. 한국이 국제사회에서나 국가 내부적으로나 메달 순위로 ‘존재 증명’을 해야 하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더불어 메달 획득이 국가와 민족의 성취라는 인식도 옅어졌다. 메달을 따고 나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께 영광을 돌린다”고 울먹이는 것은 낡은 풍경이 됐다.

김정효 서울대 외래교수는 “메달을 많이 딴다고 해서 바로 국격이 높아지거나 선진국이 되지는 않는단 사실을 다들 알게 됐다. 애초에 올림픽 자체가 강대국이 유리한 수영이나 육상 같은 종목에 메달을 많이 편성해 금메달 인플레이션이 있다. 결국 올림픽 성적은 허상”이라고 밝혔다. 이어 “금메달을 보고 예전엔 민족과 국가를 먼저 떠올렸다면 지금은 선수 개인에게 집중한다. 한 개인의 용기와 도전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됐다. 특정 이데올로기를 위해 싸우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했다. 이 맥락에서 부상으로 기권한 마라톤 오주환 선수를 두고 “완전히 찬물을 끼얹는다. (다른 대회에서) 대한민국의 명예를 걸고 더 좋은 성적을 기대해 봐야겠다”고 한 중계(MBC)는 비판의 대상이 됐다.

정윤수 평론가는 대중이 경기결과를 보는 시선이 넓고 다양해진 점을 짚었다. 메달을 노려볼 만한 종목이 있는가 하면 세계 5위권에만 들어도 한국 스포츠 역사에서 금메달 이상의 가치가 있기도 하고, 올림픽에 출전하는 자체에 의의가 큰 종목도 있다는 것이다. 정 평론가는 “그동안은 일률적으로 메달을 땄냐, 못 땄냐를 봤다면 이제는 종목마다, 선수마다 다른 성취 수준을 대중이 이해하기 때문에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대한체육회만큼은 메달 순위에 신경을 쓴다.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대표팀은 금메달 6개, 은메달 4개, 동메달 10개를 획득해 종합 16위로 여정을 마쳤다. 순위에 반영되지 않는 4위 종목은 12개였다. 도쿄에서 폐막식이 진행된 지난 8월 8일 대한체육회는 결산 기자회견을 열어 ‘금메달 7개-종합 10위 이내’, ‘올림픽 5회 연속 10위 이내 진입’이란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점에 아쉬움을 표했다. 이 자리에서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신진 선수와 종목을 발굴해낸 점을 성과로 꼽으면서도 “한국 선수단이 선전했으나 메달 목표를 이루지 못해 아쉽다”며 “귀국하면 각 연맹 관계자, 전문가들과 함께 청문을 하려고 한다.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자체 평가는 일반 국민의 인식과는 괴리를 보인다. 정용철 교수는 “체육계 내부의 반성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했다. “오히려 선수들이나 국민의 시각은 많이 바뀐 데 비해 올림픽을 준비하고 관할하는 주체들이 과거를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금·은·동 랭킹 매기는 것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 나오고 있는데 기성세대가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한줌도 안 되는 엘리트를 소비한다”고 말했다.

윗줄 왼쪽부터 김연경 선수와 여자 배구팀, 근대 5종 정진화, 여자 배드민턴 복식 이소희·신승찬, 가운뎃줄 왼쪽부터 다이빙 3m 우하람, 역도 이선미, 높이뛰기 우상혁, 아랫줄 왼쪽부터 25m 속사 권총 한대윤, 탁구 남자 이상수·정형식·장우진, 체조 류성현 / 연합뉴스

윗줄 왼쪽부터 김연경 선수와 여자 배구팀, 근대 5종 정진화, 여자 배드민턴 복식 이소희·신승찬, 가운뎃줄 왼쪽부터 다이빙 3m 우하람, 역도 이선미, 높이뛰기 우상혁, 아랫줄 왼쪽부터 25m 속사 권총 한대윤, 탁구 남자 이상수·정형식·장우진, 체조 류성현 / 연합뉴스

올림픽, 기로에 서다

한국사회는 이제 올림픽의 의의를 다시 묻고 있다. 메달에 대한 관점뿐만 아니라 올림픽을 보도하는 방식에도 한층 진보한 잣대를 들이댄다. KBS 이재후 아나운서는 폐막식을 중계하며 “비장애인 올림픽 중계방송을 여기서 마친다”고 표현했고, 이는 유일하게 패럴림픽을 안내한 중계였다는 점에서 언론과 대중의 호평을 받았다. MBC가 개막식에서 참가국을 무례하게 소개한 것과 한국과의 축구경기에서 자책골을 넣은 루마니아를 두고 “고마워요 루마니아”란 자막을 넣은 것에 대해서도 국내에서의 비판이 먼저 나왔다. 결국 이는 박성제 MBC 사장의 사과로까지 이어졌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한일전에서 허구연 해설위원이 수비 실책을 한 일본선수에게 “고마워요 사토”라고 한 것이 일종의 ‘밈’이자 유행어가 됐던 점과는 대조적이다.

이 같은 변화는 메달 순위 따지기가 사라진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란 질문으로 이어진다. 김정효 교수는 “스포츠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가치는 공정과 정의다. 이는 끝까지 가져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어 메달 획득을 목표로 하는 노선에서 벗어날 경우 성적이 자연스레 떨어지는 건 감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순위와 관계없이 응원하기와 엘리트체육으로 국위선양하기란 두가지를 동시에 쥘 순 없다. 지금은 생활체육 위주로 갈지, 엘리트체육을 이어갈지의 중간 단계에 있다. 올림픽에선 열심히 싸우고 오는 것에 의의를 두는, 스포츠를 그 자체로 즐기는 시선이 점점 확대될 것”이라고 밝혔다.

‘즐기는 자’가 앞으로도 계속 나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마침 내년엔 큼직한 국제스포츠 행사가 줄 잇는다.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항저우 아시안게임, 카타르 월드컵이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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