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배부른 소리

‘면부심’의 수타면···‘시간이 멈춘 마을’, 그 곳에 노부부의 ‘동생춘’이 있다

글·사진 이명희 선임기자

‘옛날 짜장편’-탕탕, 면은 때려야 제 맛

[오늘도, 배부른 소리]‘면부심’의 수타면···‘시간이 멈춘 마을’, 그 곳에 노부부의 ‘동생춘’이 있다

시인이 밤보다 검다고 노래한 짜장면은 비주얼보다 냄새가 더 강렬하다. 코끝을 스치는 짜장면 냄새에 당할 자가 있을까. 한동안 먹지 않으면, 먹고 싶어지는 것도 짜장면이다. 촌스런 그릇에 두툼한 면발, 그 위로 야채와 고기를 넣고 볶아내 윤기가 자르르한 짜장이 올라앉아 있다. 얼른 비벼 한 젓가락 입에 넣는 순간 세상을 얻은 것처럼 미소가 절로 번진다.

그래도 제일 맛있는 짜장면은 갓 뽑은 면에 따뜻한 춘장 소스를 끼얹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손으로 직접 면을 뽑는 곳을 찾기가 이제는 힘들다는 것. 면 잘 뽑는 전설의 고수들이 옛날 방식 그대로 짜장면을 만드는 집을 맥이 끊기기 전에 찾아 떠나본다. 탕탕, 손으로 치댈수록 반죽은 더 쫄깃해진다.

에효, 오늘도 배부른 소리다.

충남 서천군 판교면 ‘동생춘’의 조용덕씨가 수타로 뽑은 면을 들어보이고 있다.

충남 서천군 판교면 ‘동생춘’의 조용덕씨가 수타로 뽑은 면을 들어보이고 있다.

②충남 서천군 판교면 ‘동생춘’

“우리집은 탕수육이 맛있는데 죄다 짬뽕만 시킨다니까. 여기 짜장 하나, 짬뽕 하나∼”

“그럼, 탕수육도 주세요.”

전날 영업 여부 확인을 위해 전화했을 때 “오늘 올 것도 아닌데 왜 전화를 하느냐”며 “우리집은 쉬는 날 없어”라고 퉁명스럽게 답한 목소리의 주인공인 듯 했다. 가게에 딸린 방에 앉아 있던 주인의 강권(?)에 못이기는 체 탕수육까지 주문했다. 이곳도 메뉴 선택은 역시 ‘주인 마음대로’인가.

수타면의 고수를 찾아 두 번째로 간 곳은 충남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 판교면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홍성·논산과 함께 충남 3대 우시장이 섰던 곳이다. 그러나 우시장이 없어지면서 일자리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옛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아 ‘시간이 멈춘 마을’로 불리는 이 마을에 노부부가 운영하는 중식당 ‘동생춘’이 있다. 수타면으로 꽤 알려진 식당으로 예능 프로그램 <수요미식회>에도 소개됐다.

허름한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테이블은 달랑 4개, 평일인데다 점심 시간 전이라 손님은 없었다.

주문을 하고 나서 할머니에게 언제부터 했는지 물었다. “오래됐어. 뭘 자꾸 물어.”(할머니)

“쉬는 날은 없어요?”(나)

“내외가 하는데 쉬고 말고 할 게 뭐 있어.”(할머니)

“아∼네.(여기도 쉽지 않겠구나).”(나)

주문과 동시에 백발의 할아버지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사진 촬영은 허락 받았다. 면의 고수는 패션 감각이 남달랐다. 알록달록한 민소매 셔츠에 카고 반바지. 은발의 머리는 뒤로 묶었다. 팔뚝은 건장한 청년 못지않게 다부졌다.

충남 서천군 판교면 ‘동생춘’의 조용덕씨가 수타로 면을 뽑고 있다.

충남 서천군 판교면 ‘동생춘’의 조용덕씨가 수타로 면을 뽑고 있다.

충남 서천군 판교면 ‘동생춘’의 조용덕씨가 수타로 뽑은 면을 들어보이고 있다.

충남 서천군 판교면 ‘동생춘’의 조용덕씨가 수타로 뽑은 면을 들어보이고 있다.

양손에 잡힌 반죽이 길게 늘어나고 다시 접히기를 반복했다. 공중에서 몇 번 꼬이기를 반복하더니 두 가닥이 네 가닥 되고, 네 가닥이 여덟 가닥 다시 열여섯 가닥으로…. 순식간에 면발을 다 뽑았는가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바로 면을 잘라버렸다. “아~ 잠시만”을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길게 뽑은 면을 찍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있던 할머니는 “사진 초짜인가 보네. 우리집에 사진 찍으러 얼마나 많이 오는 줄 알어?. 잘 좀 찍어봐”라며 주방쪽으로 왔다.

“몇 가닥이에요?”(나)

“그런 거 난 몰라. 배운대로 그냥 하는 거지”(할아버지)

충남 서천군 판교면 ‘동생춘’의 짜장면

충남 서천군 판교면 ‘동생춘’의 짜장면

충남 서천군 판교면 ‘동생춘’의 짜장면

충남 서천군 판교면 ‘동생춘’의 짜장면

충남 서천군 판교면 ‘동생춘’의 내부.

충남 서천군 판교면 ‘동생춘’의 내부.

탕수육이 나왔다. 금방 튀겨낸 탕수육은 맛이 괜찮았다. 탕수육을 먹는 사이 짜장면과 짬뽕이 나왔다. 모두 우리가 흔히 보던 모습은 아니었다. 면은 하얗고 보들보들했다. 짜장면은 건더기라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소스를 끼얹어 빈약했다. 면의 빛이 오히려 죽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춧가루를 달라고 했다.

“음, 그래도 먹을 줄은 아네”(할머니)

“(음, 이집은 짜장보다는 짬뽕 맛집이야)”

짬뽕은 담백했다. 아니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맛이었다. 해물이 풍성하지는 않았지만 국물이 자극적이지 않고 순했다. ‘면부심(면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큼 수타면은 훌륭했다. 다른 수타면들에 비해 가늘게 뽑은 면은 면 자체 만으로도 충분히 맛있었다.

면의 고수 조용덕씨(78)는 11살때부터 중국집에서 일했다고 한다. 충남 예산의 화교가 하던 중국집 ‘동생춘(東生春)’에서 일을 배웠다. 그 가게가 없어지자 이름을 빌려와 1969년 판교로 와서 식당을 차렸다. 상호의 한자만 ‘東’에서 ‘同’으로 살짝 바꿨단다. 실내는 개업 당시 모습 그대로다. 면을 쳐대는 게 체력소모가 보통 큰일이 아닐텐데, 면을 치는 할아버지를 보니 여든 가까운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취미로 마라톤도 하고 있다고 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짬뽕과 짜장면을 하나씩 더 주문했다. 수타이니 적어도 2인분은 주문해야 했다. 할아버지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능숙한 솜씨로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경쾌하게 면을 뽑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향해 뽑은 면을 드는가 싶더니 이번에도 습관처럼 면을 바로 잘랐다.

“아∼ 자르지 마시라니깐요”

“난 다 된줄 알고” 할아버지가 멋쩍게 웃었다. 다시 새로 나온 짬뽕을 먹었다. 당분간 중식은 못 먹을 것 같았다. 무뚝뚝한줄만 알았던 할머니는 고구마를 먹어 보라며 테이블에 가져다 놓았다.

“태호야~, 고구마 우유 넣고 좀 갈아줘.”(할머니)

어디선가 무슨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홍반장’처럼 이번에도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믹서기로 고구마를 갈기 시작했다.

“면 하나 다시 해 줘어. 사진 찍게”(할머니). 부부의 대화로 이 집의 진짜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다.

괜찮다고 사양하긴 했지만 무심하게 건넨 할머니의 한마디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가게 벽에는 SBS <생활의 달인>에 나온 사진이 붙어 있다. 할아버지는 누군가 와서 영상을 찍어 갔는데 방송에 나오는 지도 몰랐다고 한다. 아들이 방송에 나온 것을 보고 연락이 와서 알았다고 했다.

동생춘의 메뉴는 간단하다. 짜장면, 짬뽕, 우동은 6000원, 탕수육은 2만5000원이다. 인근에 간다면 한번 들러 보시라. 해맑게 웃으며 면을 뽑는 고수가 있고, 무뚝뚝해보이지만 속은 다정한 할머니가 있어 마음까지 채울 수 있다.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 데 할머니가 고구마를 사가라고 했다. “차도 있는데 고구마 한 박스 안 사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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