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에게 커밍아웃, 죄책감 갖지 말길”

김서영 기자

영화 <너에게 가는 길> 변규리 감독과 주인공 2인

나비씨와 변규리 감독, 비비안씨(왼쪽부터)가 영화 <너에게 가는 길>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서영 기자

나비씨와 변규리 감독, 비비안씨(왼쪽부터)가 영화 <너에게 가는 길>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서영 기자

“저는 비비안이고요. 우리 아들은 동성애자입니다.”

“저는 나비입니다. 우리 애는 FTM 트랜스젠더입니다.”

성소수자 부모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 개봉을 하루 앞둔 지난 11월 16일 저녁,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변규리 감독과 주인공 비비안씨, 나비씨를 만났다. 각각 게이, 트랜스젠더를 둔 엄마로서 영화에 등장하는 두 출연자는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목걸이를 두르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배지를 단 차림이었다.

영화 제작에 소요된 시간은 4년. 그 사이 이들은 ‘성소수자 부모’로서 성장해 나갔다. 자녀들이 성소수자로서 겪는 차별과 고통을 함께 겪었고 다른 부모들은 할 필요가 없는 투쟁을 했다. “성소수자 부모를 아무나 체험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라는 비비안씨의 말처럼 이들의 경험은 분명 특수하다. 하지만 이 둘이 먼저 지나간 ‘너에게 가는 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모-자녀 간 관계맺기라는 보편성이 그려진다.

■성소수자 부모, 성장하다

비비안씨와 나비씨는 소위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비비안씨는 항공사 승무원이라는 직업상 게이를 포함해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나봤고, 소방관인 나비씨는 딸이 어릴 때 ‘레즈비언일 수도 있겠구나’ 짐작을 하면서도 ‘뭐 어때’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자녀의 커밍아웃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비비안씨의 아들 예준씨는 해외유학 중 편지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전했다. 비비안씨는 “아이가 커밍아웃했을 때 나 스스로 벽장에 들어가는 경험을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다, 평생 비밀로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중압감이 너무 컸고, 고립돼 외롭게 살아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소수자 부모’란 정체성으로 내가 내 벽장 안에 갇혔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늘 소통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도 아이가 7년 동안 우리에게 말할 수 없었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우리 스스로는 좋은 부모라고 상상했지만 기대만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진짜 공감을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아들을 알고 나니 과거 유명 연예인이 성정체성을 폭로당한 후(아웃팅) 방송가에서 사라졌던 사건이 다시 보였다.

비비안씨(왼쪽)와 나비씨가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서영 기자

비비안씨(왼쪽)와 나비씨가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서영 기자

나비씨 역시 자녀 한결씨를 통해 트랜스젠더를 처음 접했다. 여자아이에게 연애편지를 쓰던 한결씨에게 “너 레즈비언 같아”라고 했을 때 “바이지”라는 답을 들으면서 바이섹슈얼을 알게 됐고,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동행한 한결씨가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소개한 것을 계기로 “FTM(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를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한결씨의 성전환 수술과 법적 성별 정정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했다.

‘성소수자 부모’로 각성하고 나서 바라본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지난 몇년간은 트랜스젠더에게 특히 더 가혹한 시간이었다. 지난해 한 트랜스젠더 지원자가 숙명여대에 합격하고도 반대에 부딪혀 입학을 포기하고, 변희수 전 하사가 성전환 수술을 받은 이후 ‘심신장애’를 이유로 육군에서 강제 전역하는 일이 이어졌다. 전역처분 취소청구 소송을 진행 중이던 변희수 전 하사는 결국 올해 초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1년 9개월 만인 지난달, 강제 전역은 위법이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어디까지나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란 격언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성소수자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부모에게도 충격을 넘어 두려움을 안겼다. 나비씨는 “발밑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그는 “내가 연대하고 우리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비롯해 모든 것이 불안하고 두려워지니까 꼼짝할 수도 없었다. 나도 이런데 한결이는 얼마나 세상이 공포스러울까, 트랜스젠더들이 살기 힘든 세상이라면 결국 죽는 게 더 편안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결씨에게 일상적인 안부 전화를 가장해 상태를 살폈고, 한결씨는 “괜찮다”는 말로 안심을 시켰다. “카드 결제 ‘딩동’ 소리가 울리면 다행이다 싶죠. 어디에 가서 카드를 썼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생각을 할 정도입니다.” 나비씨의 말이다.

이처럼 낯선 충격을 극복하려 하는 두 엄마를 내세운 <너에게 가는 길>은 가족 간 관계맺기에 관한 영화이자 두 여성의 성장기로 비친다. 출연자들은 이를 “한 번 보면 퀴어영화, 두 번 보면 가족영화, 세 번 보면 여성영화, 네 번 보면 인생영화”라고 표현했다. 변규리 감독은 “‘성소수자 부모’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마주한 여성이자 엄마들의 성장 서사이며, 부모란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비씨와 비비안씨(위)와 비비안씨가 퀴어퍼레이드서 ‘나는 내 게이 아들을 사랑한다’는 팻말을 들고 행진하는 장면.  (주)엣나인필름

나비씨와 비비안씨(위)와 비비안씨가 퀴어퍼레이드서 ‘나는 내 게이 아들을 사랑한다’는 팻말을 들고 행진하는 장면. (주)엣나인필름

■어떤 성소수자 부모가 될 것인가

“어렵고 힘들 때 힘이 돼줄 수 있는 게 부모여야 하잖아요. 좋은 것, 잘난 것은 아무나 칭찬해주잖아요. 조금 못나고 모자라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부모였으면 좋겠는데, 그 얘기 못 하는 거죠.”(나비)

“성소수자 당사자들에게 ‘절대 부모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커밍아웃하면서 부모에게 고통을 준다는 죄책감을 안 가졌으면 좋겠어요.”(비비안)

일반적으로 성소수자가 커밍아웃을 하는 데 있어서 부모는 최후의 대상이다. 가장 큰 장벽이기도 하다. 차라리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말할지언정 부모에게는 끝까지 숨기는 경우가 많다. 부모에게의 커밍아웃은 ‘모 아니면 도’이기 때문이다. 말해보기 전까진 부모의 반응을 예상할 수 없고, 한번 말하고 난 다음엔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성소수자 입장에서 비비안씨와 나비씨 같은 엄마를 두는 건 흔치 않은 행운일지 모른다.

<너에게 가는 길>은 극적으로 대비되는 ‘부모의 사랑’을 보여준다. 2018년 9월에 열린 제1회 인천 퀴어퍼레이드 참가한 성소수자 부모들은 ‘퀴어축제 반대’, ‘동성애 반대’ 팻말을 들고 “집에 가!”를 외치는 소위 ‘혐오세력’과 대면한다. 이들은 “사랑하니까 반대합니다”를 내걸고 성소수자 부모들과 충돌한다. 변규리 감독은 “그들이 ‘부모로서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나왔다’고 하는 걸 보며 사랑이 이렇게 작동할 수도 있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경험했다. 양쪽의 부모들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부딪히는 상황이 아이러니였다”고 말했다.

<너에게 가는 길> 포스터.  (주)엣나인필름

<너에게 가는 길> 포스터. (주)엣나인필름

이 아이러니는 ‘내 아이가 성소수자일 때, 나는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란 묵직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예비 부모 혹은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에게 특히 와닿을 부분이다. 비비안씨는 “(자녀의) 커밍아웃을 받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는 조언을 했다. 통상 인구의 5% 정도를 성소수자라고 했을 때, 이중 부모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비율은 그중에서도 소수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우리 아이가 나를 얼마나 믿으면 내게 커밍아웃을 했겠나. 요즘 젊은 성소수자 중에는 굳이 부모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토록 내밀한 얘기를 나와 나눠주는 건 영광”이라고 말했다. 비비안씨는 다시금 강조했다. “선물을 줬는데 그게 선물인지 모르고 폭탄이라고 생각해 던져버리지 마라. (아이의 커밍아웃은) 내 인생에 있어 분명 선물이다.”

나비씨는 “가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모로서 아이를 낳은 건 사실이지만, ‘나 없이는 네가 존재할 수 없다’ 식의 태도는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이다. “보통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을 한정적으로 생각하잖아요. 남들과 비슷하게, 무난하게. 그 평온함의 균열을 자녀가 깼다고 원망하기보다는 나의 성장을 위해 자녀가 기회를 줬다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는 “단순히 자녀가 성소수자인 것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자녀의 삶을 존중하면 어떤 삶을 살든지 믿어줄 수 있다. 그렇지 못한 부모는 자녀가 성소수자로 정체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모가 원하지 않는 다른 길을 가는 경우에도 좌절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자녀들이 우리를 끌어다 세상 공부를 시켰다. 자녀를 핑계로 자기의 좌절을 드러내지 말고, 자기 세계관을 돌아보고 키워가는 기회로 생각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수많은 ‘너’에게 가는 길

비비안씨와 나비씨 둘 다 이번이 성소수자 부모로서 첫 커밍아웃은 아니다.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서 활동을 해왔고, 방송에 출연하거나 주변인들에게 알린 적이 이미 있다. 그럼에도 <너에게 가는 길> 출연과 개봉은 “가장 큰 커밍아웃(비비안)”이라 할 정도로 각별하다. 나비씨는 “영화를 찍으면서 세상에 소리치고 사람들에게 ‘한걸음 더 나아가 달라’ 요청하는 마음을 먹었다. 좀더 많은 사람이 여기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면서 ‘우리 한걸음 더 나아갔으면 좋겠어요’라고 소리치는 계기가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2018년 인천 퀴어퍼레이드에서 혐오세력과 대치한 성소수자 부모들.  (주)엣나인필름

2018년 인천 퀴어퍼레이드에서 혐오세력과 대치한 성소수자 부모들. (주)엣나인필름

문제는 과연 언제까지 외쳐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들이 오래도록 주장해온 차별금지법과 생활동반자법은 지지부진한 논의 과정을 겪고 있다. 21대 국회에 4개의 평등법 또는 차별금지법이 발의돼 있지만 처리는 요원하다. 최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 국민동의청원’ 심사 기한을 21대 국회 임기 마지막 날인 2024년 5월 29일까지 연장했다. 대선 국면에서도 핵심 이슈로 다뤄지지는 않는 모습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일방통행식 처리는 안 된다”며 물러섰고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도 반대 의사를 밝혀왔다. 생활동반자법도 초안이 국회에 제출된 것은 2014년이지만 아직까지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 성소수자 당사자와 부모들이 성소수자의 가족구성권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 역시 <너에게 가는 길>에서 다뤄진다. 변규리 감독은 “동성결혼이 당장 어렵다면 순차적으로 가족구성권이나 파트너십, 동반자법을 제도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어쨌든 한 시민으로서 법과 사회제도로 보장받으며 살고 싶은 성소수자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가족주의를 떠나 한 시민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보장해달라는 점임을 감안해 국회에서 앞장서서 담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보면 <너에게 가는 길>이란 영화 제목은 여러 의미를 가진다.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서 ‘님’이 여러 대상으로 해석될 수 있듯이 ‘너’ 역시 많은 것을 지칭한다. ‘길’ 역시 쌍방향으로 통한다. 변규리 감독은 “길이라는 것이 미완성의 이미지이기도 했고, 계속 관계가 변화하고 노력하는 여정의 느낌이 있었다. 부모님들이 성소수자 당사자들에게 다가가는 여정, 혹은 자신에게 가는 길이라는 생각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 영화에 다가와 주시는 관객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나비씨는 “자식을 통해 좋은 어른,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나에게 가는 길. 그런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가는 길”이라고 했다. “연대해 주시는 길. 관객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함께 잘사는 세상으로 연대해서 가는 길”이란 비비안씨의 말처럼, <너에게 가는 길>은 수많은 ‘너’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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