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 전속성’ 벽에 가로막힌 배달라이더

김지환 기자

보험료 냈는데도 불승인…

특고노동자들 “까다로운 요건 폐지해야”

지난 4월 5일 서울 종로구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에서 열린 배달노동자 산업재해 문제 해결을 위한 인수위 면담 요청 기자회견에서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등 참가자들이 인수위로 면담요청서를 배달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4월 5일 서울 종로구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에서 열린 배달노동자 산업재해 문제 해결을 위한 인수위 면담 요청 기자회견에서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등 참가자들이 인수위로 면담요청서를 배달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부업 배달라이더인 ‘배민 커넥터’로 일하던 박재범씨(49)는 지난 1월 15일 경기도 안산시 초지동의 한 사거리에서 음식배달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녹색으로 신호가 바뀌는 걸 보고 앞차를 추월해 주행하던 중 오토바이가 횡단보도에서 미끄러졌다.

■산재 불승인 이유는

박씨는 이 사고로 갈비뼈 3개에 금이 가고 왼쪽 신장이 파열됐다. 현재까지 치료비로만 1000만원이 들어갔다. 그는 우아한청년들(배민 커넥터 운영사)이 주 단위로 산재보험료(월 7600원가량)를 원천징수했기 때문에 당연히 산재보험이 적용될 것으로 생각했다.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는 사업주가 산재보험료를 모두 부담하지만 배달라이더와 같은 특수형태근로종사자는 사업주와 종사자가 반반씩 보험료를 부담한다. 박씨의 예상과 달리 근로복지공단은 ‘산업재해 불승인’ 통보를 했다.

산재보험료를 내고 있었는데 왜 불승인이 됐을까. 이유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가 두곳 이상의 업체로부터 일감을 받아 일할 경우 사고가 난 업체에서 벌어들인 소득이 월 115만원을 넘거나 일한 시간이 93시간 이상이어야 한다는 ‘전속성’ 요건 때문이다.

직장인인 박씨는 지난해 10월 10일부터 주말에 부업으로 배달 일을 시작했다. 딸이 올해 대학 입학을 하면서 돈 들어갈 일이 늘어나서다. 일감은 쿠팡이츠, 배달의민족 2개의 플랫폼으로부터 받았다. 사고가 날 때까지 3개월간 220만원가량 벌었다. 소득의 80%가 배달의민족에서 발생했다. 박씨는 “처음에는 안전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고, 오토바이·헬멧만 있으면 앱 설치 뒤 바로 배달을 할 수 있는 쿠팡이츠에서 일감을 받았다”며 “하지만 11월부턴 시간제 보험이 도입돼 있던 배달의민족에서 대부분의 일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만약 박씨가 배달의민족 한곳에서만 일감을 받아 일했다면 소득이나 일한 시간과 무관하게 전속성을 인정받아 산재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다. 하지만 두곳에서 일감을 받았기 때문에 사고가 난 업체(배달의민족)에서 ‘월 소득 115만원, 종사시간 93시간 이상’이라는 요건을 충족해야 했다. 박씨는 이 기준에 미달해 근로복지공단이 산재 불승인 통보를 했다. 박씨는 “일 시작할 때 두개 업체에서 일감을 받았다는 이유로 전속성이 없다고 판단한 걸 납득할 수 없다”며 지난 3월 21일 근로복지공단에 심사 청구를 했다. 그는 “사고 전까지 전속성이라는 단어 자체를 몰랐다”며 “배달의민족, 쿠팡이츠 등 플랫폼 업체들도 전속성 문제 때문에 산재보험 적용이 어려울 수 있다는 걸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근에도 음식을 배달하다 사망했지만 산재보험을 적용받지 못한 사례가 발생했다. 지난 3월 30일 서울 서초구 고속버스터미널 인근에서 전기자전거를 이용해 일하던 40대 여성 A씨가 5t 트럭에 치여 숨졌다. 라이더유니온에 따르면 A씨는 지난 1월부터 매일 12시간씩, 8만보를 걸어 배달했다. 그러다가 다리가 아파 전기자전거를 장만했는데 이 자전거로 쿠팡이츠 배달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A씨 역시 배달의민족, 쿠팡이츠 두곳에서 일감을 받아 일했기 때문에 산재보험을 적용받으려면 사고가 난 쿠팡이츠에서 ‘월 소득 115만원, 종사시간 93시간 이상’이라는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고인은 쿠팡이츠뿐 아니라 배달의민족에서도 해당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속성 기준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박씨와 A씨처럼 전속성 기준 때문에 산재보험을 적용받지 못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를 산재보험 적용의 사각지대로 내몰고 있는 전속성 기준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은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적용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원칙적으로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에 해당해야 산재보험법을 적용받을 수 있다.

다만 산재보험법 제125조에 “특수형태근로종사자에 대한 특례”라는 샛길이 있다. 노동자는 아니지만 업무상 재해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라면 산재보험을 적용하겠다는 내용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원래 노동자였지만 자영업자로 신분이 바뀐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보호할 필요성이 커진 데 따른 조치다.

문제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가 산재보험 적용을 받으려면 세가지 ‘허들’을 더 넘어야 한다는 점이다. ‘주로 하나의 사업에 노무를 상시적으로 제공하고 보수를 받아 생활할 것’, ‘노무를 제공할 때 타인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 두 요건을 모두 충족하고, 대통령령이 정하는 직종에서 일해야 산재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다.

배달라이더는 퀵서비스 기사로 분류돼 보험설계사, 골프장 캐디, 택배기사, 학습지 교사, 대리운전기사 등과 함께 대통령령이 정한 15개 직종에 포함돼 있고, 노무를 제공할 때 타인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하지만 배달라이더들의 상당수가 산재보험을 적용받지 못하고 있다. ‘주로 하나의 사업에 노무를 상시적으로 제공하고 보수를 받아 생활할 것’이라는, 전속성 기준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 특례가 시행된 2008년 당시 보호 대상으로 꼽힌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골프장 캐디, 레미콘 기사 등은 주로 하나의 사업장에서 일을 했다. 이 때문에 전속성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산재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문제가 크게 불거지지는 않았다.

IT(정보기술) 발전으로 복수의 플랫폼을 통해 일감을 받아 일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대리기사·배달라이더 등이 대표적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1월 공개한 ‘플랫폼 노동종사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대리운전 종사자는 8만명에서 11만명 사이로 추정된다. 이중 하나의 대리운전업자로부터 업무를 의뢰받아 대리운전을 하는 사람은 9명뿐이었다. 복수의 플랫폼에서 일감을 받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하나의 사업장에서 일하는 게 되레 이례적인 일이 돼버렸다. 음식배달을 부업으로 하는 사람도 늘어나면서 그 부업에서의 수입으로만 생활하지 않는 사례도 덩달아 늘었다. 전통적인 전속성 기준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은 불가피하게 전속성 기준의 해석을 수차례 변경해왔다.

1단계에선 본업이 회사원이고, 부업으로 배달 일을 하는 경우 부업의 소득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게 아니니 특수형태근로종사자 특례 조항을 아예 적용하지 않았다. 2단계에선 부업에도 특례 조항을 원칙적으로 적용하되, ‘한곳에서만 일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3단계에선 2개 이상의 업체에서 일을 하더라도 산재보험을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사고가 난 곳에서의 소득 혹은 일한 시간이 특정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렇게 조금씩 전속성 기준을 유연하게 해석하면서 적용 범위를 확대해왔지만, 여전히 박씨와 A씨 사례처럼 전속성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가정이긴 하지만 이런 불합리한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B씨가 쿠팡이츠, 배달의민족 두곳 모두에서 ‘월 소득 115만원, 종사시간 93시간 이상’을 충족했다고 가정해보자. 산재보험은 중복가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두곳 중 하나로만 가입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산재보험 가입이 안 된 곳에서 사고가 나면 월 소득, 시간 기준을 충족시키고도 산재보험을 적용받을 수 없다. 권오성 성신여대 법학부 교수는 “전속성 기준을 유지하는 것은 배달라이더, 대리기사 등 새롭게 등장한 유형의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보호를 사실상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배달라이더 박재범씨가 지난 3월 23일 서울 종로구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특수형태근로종사자 산재보험 전속성 폐지’를 요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 라이더유니온 제공

배달라이더 박재범씨가 지난 3월 23일 서울 종로구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특수형태근로종사자 산재보험 전속성 폐지’를 요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 라이더유니온 제공

■이번엔 폐지될까?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전속성 폐지’를 골자로 하는 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돼 있다. 전속성이 충족되지 않는 사업장에서 산재가 발생해도 보상이 되도록 하는 내용이다. 더불어민주당 임종성 의원이 지난해 10월 관련 법안을 대표 발의했고, 국민의힘도 법안 발의를 준비 중이다.

‘플랫폼노동 희망찾기’는 성명을 내고 “산재보험법상 특수형태근로종사자 특례 제도가 시행된 지 14년이 됐지만, 정부는 전속성을 핑계로 특수고용노동자를 산재보험에서 실질적으로 배제해왔다”며 “수많은 안타까운 사연과 지난한 싸움 끝에 정부와 국회가 전속성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꾸물거리는 사이 또 한 명의 플랫폼 노동자가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다”고 비판했다.

라이더유니온은 지난 4월 5일 서울 종로구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배달라이더 산재 문제 해결을 위한 면담 요청서’를 인수위 측에 전달했다. 인수위는 라이더유니온 요청을 받아들여 조만간 면담에 나설 예정이라고 한다. 인수위도 전속성 폐지에 공감하는 것으로 알려져 향후 관련 법안 논의가 급물살을 탈 가능성도 있다.

소극적으로 전속성 기준을 해석해온 노동부는 2020년 뒤늦게 전속성 폐지로 방침을 정했다. 노동부는 최근 “개정 법안이 조속히 통과돼 시행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노동계는 전속성 폐지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된 만큼 노동부가 법 개정 전이더라도 전속성의 해석을 더 유연하게 해서 산재 사각지대를 해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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