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취재했다는 죄로 경찰조사 받고 있습니다”

조해람 기자
지난 3월13일 우크라 르비우의 기차역. 장진영 사진가 제공

지난 3월13일 우크라 르비우의 기차역. 장진영 사진가 제공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이던 3월 현지에서 체류하며 현장을 취재한 장진영 사진가. 강윤중 기자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이던 3월 현지에서 체류하며 현장을 취재한 장진영 사진가. 강윤중 기자

사진가 장진영씨(42)는 국내 언론 최초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현장 취재했다. 전쟁이 터졌다는 말을 듣자마자 출국을 준비해 3월 초 우크라에 입국했다. 30kg의 장비를 등에 지고 르비우와 키이우를 2주 동안 누볐다. 위험하고 고된 일정이 예상됐지만, 외신의 눈으로만 전해지던 전쟁의 진짜 모습은 어떤지 직접 보고 싶었다. 매체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사진가인 그의 사진은 국내 언론에 실려 현장의 비극을 있는 그대로 알렸다.

이 취재로 장씨는 피의자가 됐다. 정부 허가 없이 우크라를 취재한 혐의(여권법 위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여권법 17조는 “천재지변, 전쟁 ,내란 등 위난상황에서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특정 지역에서의 여권 사용을 제한하거나 방문·체류를 금지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외교부는 전쟁 발발 후 우크라를 여행금지구역으로 지정했다.

“이런 허가제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언론이 더 다양한 시선을 독자에게 전하려면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로 해야 해요.” 장씨만의 생각은 아니다. 3월18일 외교부가 전선에서 가장 먼 우크라 서부 일부 지역에 한해 ‘최대 3일·4명’이라는 제한 조건을 걸어 방문을 허가하자 유럽 주재 특파원들은 “언론의 기능을 수학여행 수준으로 격하시켰다”는 비판 성명을 냈다. 장씨는 정부의 태도를 두고 “고민 없이 그저 복잡한 일을 만들기 싫다는 것”이라며 “취재 경험이 쌓여야 한국 언론만의 시각을 보여줄 수 있다”고 했다. 피난민이 빽빽한 기차역과 황량해진 수도에서 그는 무엇을 봤고, 돌아와서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지난 달 26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장씨를 만났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이던 3월 현지에서 체류하며 현장을 취재한 장진영 사진가가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한 음악회가 열리는 서울 정동 거리에서 포즈를 취했다.  강윤중 기자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이던 3월 현지에서 체류하며 현장을 취재한 장진영 사진가가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한 음악회가 열리는 서울 정동 거리에서 포즈를 취했다. 강윤중 기자

15년의 공백…노하우 끊긴 한국의 ‘분쟁 취재’

“기사들을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전쟁 발발 초기인 지난 2월 말, 장씨도 다른 사람들처럼 처음에는 뉴스 기사로만 우크라 전쟁 소식을 접했다. 모든 기사의 출처가 미국·유럽의 주요 언론이라는 걸 본 순간부터 계속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무슨 대단한 사명감이 아니라 그저 정말 현장이 궁금하다는 생각”으로 출국을 준비했다. 2019년 홍콩 민주화시위도 취재해봤기에 분쟁지역 취재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전쟁으로 ‘여행금지’된 우크라 입국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준비부터 취재까지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팁을 전수받을 선배가 없었다. 2007년 샘물교회 피랍 사건 이후 생긴 여행금지제도 때문에 15년간 한국 언론은 분쟁지역을 자유롭게 취재하지 못했다. 그나마 위험지역을 자주 다녀온 선배에게 짐 싸는 법과 주의사항 등 조언을 들었다. 옷은 2세트만 챙겨 최소화하고 촬영장비는 넉넉하게 챙겨 3월5일 폴란드 국경도시 프셰미실을 통해 우크라 서부 르비우에 도착했다. 피난민으로 가득찬 르비우역에 도착하니 오후 10시 통금시간이 넘었다. 피난민과 취재진이 몰려들어 숙소는 이미 가득 찼다. 취재가 어렵겠다고 판단해 하루 뒤 키이우행 기차에 올랐다.

전선에 최대한 가까이 가보려는 장씨의 노력은 키이우에서 벽에 부닥쳤다. 전시상황인 우크라에서 전방에 가려면 기자의 소속 매체가 외교부에서 허가를 받은 뒤 우크라 국방부에 별도로 요청해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프리랜서인 장씨는 국내 여러 매체에 연락했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키이우에 며칠 머물면서 도시의 분위기를 스케치했다. 350만명 중 200만명이 빠져나간 황량한 도시에서, 그의 표현대로라면 “도처에 이별이 부유하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지난 3월12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기차역에서 한 군인이 피난을 떠나는 가족을 배웅하고 있다. 장진영 사진가 제공

지난 3월12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기차역에서 한 군인이 피난을 떠나는 가족을 배웅하고 있다. 장진영 사진가 제공

허가서가 없으니 키이우 시내 취재도 만만치 않았다. 거의 400m마다 군경의 검문을 받아야 했고, 키이우 시민이 경찰을 불러 검문당한 적도 있었다. 현지 취재 가이드 역할을 하는 ‘픽서’를 고용할 돈도 없었고, 분쟁지역 취재가 오랫동안 막힌 탓에 국내 언론과 픽서 네트워크 사이의 연결고리도 거의 사라졌다. 취재가 현실적으로 어려워 다시 르비우로 돌아간 장씨는 1주일 정도 더 취재하고 귀국했다.


도시가 고요하게 말했다…“이것이 전쟁이다”

장씨는 “솔직히 제 사진이 아주 특별한 시선을 담지는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찍은 사진은 전쟁의 ‘스테레오타입’ 너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총탄이 빗발치고 탱크가 불에 타는 모습도 전쟁이지만, 수많은 이별과 죽음을 옆에 둔 채 어떻게든 일상을 이어가는 ‘인간의 얼굴’도 전쟁의 진실이다. 현장에 있었기에 장씨는 그 장면들을 기록할 수 있었다.

키이우는 “총소리 없이 조용하게, 여기가 바로 전쟁터라는 걸 말해주는” 도시였다. 인구 350만의 도시에서 200만명이 빠져나갔다. 고요함 속에 때때로 공습경보가 울리고, 황량한 도로에는 접촉사고가 난 차가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키이우역에서는 떠나는 가족과 떠나지 못하는 아버지, 피난하는 부인과 전선에 남는 남편의 이별이 이어졌다.

장씨의 뇌리에 깊게 새겨진 곳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르비우였다. 우크라를 빠져나가는 난민 대부분이 르비우를 거쳐 폴란드 등으로 향한다. 중간 규모인 도시 인구의 몇 곱절 되는 난민이 몰려들어 “한국전쟁 때 부산 같은 활기”가 느껴졌다고 장씨는 말했다. 상거래활동도 활발했고, 우크라 각지에서 몰려든 난민들이 운동장에서 풋살을 하는 풍경도 봤다.

지난 3월17일 우크라 르비우에서 한 어머니가 전사한 아들의 관에 엎드려 울고 있다. 장진영 사진가 제공

지난 3월17일 우크라 르비우에서 한 어머니가 전사한 아들의 관에 엎드려 울고 있다. 장진영 사진가 제공

활기의 뒷면에는 비탄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었다. 르비우의 한 성당에서 열린 장례식. 전사한 아들 이반을 보내는 어머니의 대성통곡이 “가장 아팠다”고 했다. 관을 묻기 전 모두가 가슴에 손을 얹고 우크라 국가를 부르는데, 어머니는 손도 얹지 못하고 관을 바라보며 읊조렸다고 했다. “누군가에겐 조국을 지킨 충성스러운 군인이었겠지만, 어머니에겐 다른 문제죠.” 이반의 장례식 옆 한 도서관에서는 시민들이 위장막을 만들었다. 아무나 와서 위장막에 종이를 엮고 다시 갈 길을 갔다. 인근 기지에선 총기사용교육과 응급처치 교육이 이어졌다. 그 옆에서는 다시 풋살 경기가 열리고, 물건을 사고 판다. 때때로 공습 경보가 울렸다. 피난민이 들어왔고 젊은이들은 계속 전선에 나갔다.

3월17일 우크라 르비우에서 시민들이 군용 위장막을 만들고 있다. 장진영 사진가 제공

3월17일 우크라 르비우에서 시민들이 군용 위장막을 만들고 있다. 장진영 사진가 제공

“경찰·소방관이 위험 무릅쓰듯, 언론인도 그럴 수 있어야”

한국에 들어온 장씨는 가명으로 국내 매체 몇 곳에 사진을 실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이 그를 불렀다. 여권법 위반 혐의의 피의자가 된 그는 이미 한 번 조사를 받고 다음 조사를 기다리고 있다. 장씨가 우크라를 다녀간 뒤 정부는 3~5일간 서부 4개 주에서 최대 4명이 현지취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 26일부터는 2주간 11개 주에서 취재할 수 있지만 ‘허가제’의 틀과 기간·지역 제한은 그대로다. 장씨와 함께 취재한 외신 기자들은 여전히 현장에 있다.

“어떤 직업이나 위험이 상존하죠. 외교부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이 최우선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경찰은 범인을 상대하면 안 되고 소방관은 불을 끄지 못하게 막나요?” 장씨는 정부가 “복잡한 일을 피하기 위해” 지나친 보신주의로 일관한다고 지적했다. 기계적으로 분쟁 취재를 제한하기보다는 “경찰과 소방관에게 하는 것처럼, 언론인에게도 위험한 상황에서 어떻게 안전을 확보해줄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취재가 훨씬 자유로운 외국 언론의 경우 종군기자들이 워크샵을 열어 현장 안전수칙과 응급처치법 등을 공유한다. 전쟁보도로 유명한 CNN이나 BBC의 노하우는 그렇게 쌓였다. 장씨는 한국 언론도 노하우를 갖추려면 2007년 이후 끊긴 분쟁지역 취재의 맥을 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장씨가 우크라 현지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 역시 매순간 고민을 나누고 조언을 구할 ‘선배’의 부재였다. 그는 “일본인 기자 2명을 만났는데, 10년차 이상 선배와 5년차 이하 후배가 항상 같이 다녔다”며 “나 혼자 판단하면 시야가 좁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모습이 부러웠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이던 3월 현지에서 체류하며 현장을 취재한 장진영 사진가. /강윤중 기자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이던 3월 현지에서 체류하며 현장을 취재한 장진영 사진가. /강윤중 기자

장씨는 언론활동이 자유로워야 ‘외신 받아쓰기’를 넘어 한국 언론만의 다양한 시각을 보장할 수 있다고 본다. “공식 브리핑처럼 모든 기자가 같은 내용을 전하는 보도가 80%라면 나머지 20%에서 매체와 기자의 색깔이 나온다. 그것이 언론 자유의 이유이자 언론인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 자신도 우크라에서 ‘나만의 시각’을 잘 전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지만, “계속 지금처럼 분쟁 취재 경험이 축적되지 않는다면 외신 이상의 시각을 가지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 적극적인 취재로 전문성을 점차 늘려가면 언론 신뢰도 높일 수 있고, 독자도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며 진실을 더 잘 접할 수 있다고 장씨는 믿는다.

장씨의 아쉬움에 공감하는 동료들이 있다. 장씨는 여러 분쟁지역을 다닌 김영미·강경란 PD를 비롯해 11여명의 사진가들과 지난달 31일부터 서울 류가헌갤러리에서 ‘금지된 현장’ 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들은 성명에서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정부의 취지에는 국민으로서 충분히 공감하지만, 후방의 안전한 곳에서 단기간에 취재하라는 법률적 제한은 우리나라 언론의 후진화로 이어질 것”이라며 “허가제와 같은 통제보다는 정부의 정보력과 외교·행정적 지원을 통한 자국 언론인 보호를 통해 언론의 취재 및 보도의 보장을 촉구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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