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골라 풀어주는 사면법…잠재적 수혜자 국회는 ‘모른척’

허진무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5일 용산 대통령실로 출근하며 ‘인사 실패 논란’에 대한 질문에 손가락을 흔들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5일 용산 대통령실로 출근하며 ‘인사 실패 논란’에 대한 질문에 손가락을 흔들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법무부가 이르면 오는 9일 사면심사위원회를 열어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첫 특별사면 대상자를 심사할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상 아무런 제약 없이 행사되는 대통령의 특별사면권은 그동안 특정 정치인과 재벌 총수의 중대 범죄에 면죄부를 부여해왔다는 지적이 꾸준히 반복돼왔다. 법률을 통해 사면권을 견제할 필요가 있다는 제언도 주기적으로 등장했지만, 입법기관인 국회의원 스스로가 대통령 특사의 잠재적 수혜자인 까닭에 제도 개혁에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8·15 광복절 기념 특별사면 대상자로 가장 앞줄에 등장하는 인물은 전직 대통령 이명박씨다. 그는 뇌물·횡령 혐의로 2020년 10월 대법원에서 징역 17년을 확정받고 현재까지 2년8개월을 복역했다. 지난 6월에는 고령과 건강 악화 때문에 형집행정지 결정을 받아 3개월 일시 석방됐다. 형집행정지 결정 당시 서울대병원 입원 상태였던 그는 집행정지 결정 이틀 만에 퇴원해 현재는 자택에 머무르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특별사면 대상자로 이름이 오르내린다. 그는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뇌물 혐의로 지난 1월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6월이 확정됐지만 1년6개월만 복역한 뒤 지난해 8월 가석방된 상태다.

대통령이 범죄의 종류를 정해 그에 해당하는 모든 범죄자를 사면하는 일반사면과 달리 특정 범죄자를 골라 사면하는 특별사면은 국회의 동의가 필요 없다.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사면법이 제정된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단행한 특별사면은 103회(감형·복권 포함)에 달한다. 일반사면은 9회(감형·복권 포함)에 불과하고 1996년 이후에는 아예 없었다. 정부가 ‘국민 통합’이나 ‘경제위기 극복’을 명분으로 특별사면을 단행할 때마다 ‘특혜’ 논란이 따라다녔다.

특별사면권에 대한 제한과 견제는 입법으로 이뤄져야 하지만 국회는 개정에 미온적이다. 사면법은 제정 이후 74년 동안 내용이 거의 바뀌지 않았다. 정부의 개정안 발의는 1건, 국회의 개정안 발의는 46건 있었지만 실제 사면법 개정은 3차례에 불과했다. 제정 이후 60년 만인 2008년 개정으로 사면심사위원회를 도입했고, 2011년 개정으로 위원회 회의록을 사면 5년 뒤 공개하도록 했고, 2012년 개정으로 한자 용어를 한글로 바꿨을 뿐이다.

박덕흠 국민의힘 의원이 2017년 11월 발의한 개정안은 국가보안법 중대 위반, 뇌물·횡령·배임, 성폭력, 공직선거법·정치자금법 위반 범죄에 대해선 형기의 2분의1이 지나지 않으면 특별사면 대상자가 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채이배 전 바른미래당 의원이 2018년 3월 발의한 개정안은 사면심사위 회의록을 사면 즉시 공개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이 개정안들은 제20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이성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0년 11월 발의한 개정안은 사면심사위 회의록뿐 아니라 속기록도 공개하는 내용이다. 지난 2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됐지만 회의에선 언급조차 되지 못했다.

전직 대통령 이명박씨가 2018년 9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결심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전직 대통령 이명박씨가 2018년 9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결심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일각에서는 특별사면권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헌법상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평등의 원칙을 위반하는 데다 사법부의 오판을 바로잡기 위해 행사된 사례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김재윤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17년 논문 <정치적 특별사면과 사법정의>에서 “특별사면은 대상자 선정이 불공평하고 정략적 판단에 의해 이뤄져 법치국가의 근간인 권력분립의 원칙과 평등의 원칙을 해칠 우려가 매우 높다”며 “사면법에서 특별감형·복권만을 남겨두고 특별사면을 삭제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적었다.

특별사면권은 정권이나 정치권 스스로 내려놓기가 쉽지 않은 ‘유혹적 권한’이다. 역대 정부는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는 수단으로 특별사면을 활용해왔다. 윤 대통령은 2018년 서울중앙지검장일 때 이명박씨를 수사해 구속시켰음에도 보수 진영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후 그의 사면 필요성을 수차례 주장했다. 이명박씨가 대통령일 때 삼성그룹으로부터 받은 ‘부정한 청탁’도 이재용 부회장의 아버지인 이건희 당시 회장의 특별사면이었다. 이씨는 2009년 헌정사상 처음으로 이 회장 1명만을 위한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2018년 3월 발의한 개헌안에 특별사면권 제한 조항을 담았으면서도 재임 기간 5회에 걸쳐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촛불정부’를 자칭한 문재인 정부도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를 사면했다. 박씨 사면으로 ‘부패범죄자는 사면하지 않겠다’는 공약도 스스로 파기했다.

임재성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는 1일 통화에서 “국회의원 자신이 혜택을 입는 사면권을 스스로 제한하는 입법이 가능할지 의문”이라며 “검찰이 검사 범죄를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법원이 사법농단 혐의 판사에 무죄를 선고한 것처럼 사면은 정치권의 ‘제 식구 감싸기’ 수단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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