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검사 불법 감금·협박에 30년 전과자로 살았다”···검찰 허위자백 강요에 ‘전과자’ 주홍글씨

이홍근 기자

검찰 서기로 근무하던 서른살 이치근씨

‘진정서’ 위조 공범 몰려 ‘한탄의 세월’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향신문 자료사진

“위조된 진정서를 진정한 기록인양 담당 검사에게 인계하기로 한 점이 유죄로 인정된다.”

1991년 7월 판사의 유죄 선고로 검찰 서기이던 서른살 이치근씨는 전과자가 됐다. 법원은 이씨가 다른 수사관 A씨와 공모해 A씨의 비위를 고발하는 진정서를 위조했다고 판단했다. 법대에 앉은 판사는 이씨가 열흘 가까이 감금된 상태에게 검사들에게 허위 진술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검사들이 조사 중 잠을 재우지 않은 사실도, 몽둥이를 들고 폭언하고 협박한 사실도 재판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기자에게 “누명을 썼다. 억울하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괘씸죄에 걸려 구속됐다고 호소하지도 못했다.

31년 넘게 주홍글씨를 이고 살아온 이씨는 지난 6월28일 용기를 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를 찾았다. 단독으로 진정서를 위조한 진범 A씨가 이씨를 찾아와 “억울하게 범인으로 만들어 미안하다”며 재심을 돕겠다고 한 게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하게 마음먹은 동력이 됐다. 이씨는 “검사들이 강압 수사를 감추려고 멀쩡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었다”며 “재심을 통해 명예를 회복하고 가해자들의 사과를 받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한 진실화해위는 가해 혐의를 받는 당시 검사들을 불러 조사할 예정이다.

1991년 검찰의 강압수사 허위 진술을 강요받고 법원에서 유죄 판결 받은 이치근씨가 지난 7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 회의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1991년 검찰의 강압수사 허위 진술을 강요받고 법원에서 유죄 판결 받은 이치근씨가 지난 7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 회의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이 사건은 1990년 10월 서울지방검찰청(서울지검) 7급 수사관이던 A씨가 진정서를 위조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사기 사건을 수사 중이던 A씨는 내부 감사를 받게 됐다. A씨가 1000만원의 뒷돈을 받고 해당 사건을 무혐의 처리했다는 내용이 담긴 진정서가 대검찰청에 접수된 것이다. 그러자 A씨는 진정사건 접수계 말단 직원이던 이씨에게 “수사검사가 진정서 기록을 보게 가져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직속 상관에게 보고한 뒤 A씨에게 진정서를 건넸다. 진정서를 넘겨받은 A씨는 원본을 파기한 뒤 직인 등을 위조해 자신의 비위 내용이 삭제된 가짜 진정서를 만들었다.

위조 사실을 몰랐던 이씨는 A씨가 돌려준 진정서를 가지고 B검사에게 배당 결재를 올렸다. B검사는 진정 사건 조사를 마친 뒤 대검에 진정기록을 보냈다. 그런데 대검에서 별도 보관하고 있던 진정서와 비교한 결과 내용이 달랐다. B검사가 보낸 진정서에는 원본에 있던 “A씨가 1000만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내용이 없었다. 대검은 진정서 위조 의혹에 대한 규명을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에 지시했다.

“말할 때까지 협박”···몽둥이 들고 진술 강요

검찰은 다짜고짜 A씨의 공범으로 이씨를 지목했다고 한다. 1991년 4월 이씨는 검사실에 감금됐다. 삐삐와 지갑, 가방 등도 모두 빼앗겼다. 소지품 압수에 필요한 압수수색 영장도 발부받지 않았다는 게 이씨의 주장이다. 이씨는 “B검사를 포함해 대여섯명의 검사가 돌아가면서 조사를 했다”며 “C검사는 몽둥이를 들고 들어와 주변을 쾅쾅 치며 협박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접수계 직원이라 진정서에 담긴 사기 사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호소하고, 위조할 이유도 없다고 수차례 반복해서 진술했으나 검사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A씨도 15일 경향신문과 만나 “이씨가 위조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며 “진정서를 검사실에 전달만 하는 사람이 서류의 내용을 어떻게 알겠냐”고 말했다.

검사들의 가혹행위는 진범 A씨가 도주한 뒤 더 심해졌다고 한다. A씨는 이씨와 다른 검사실에서 감금돼 수사를 받고 있었다. A씨는 감금 나흘째 되던 날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검찰청을 빠져나와 도주했다. 검찰 수사관이 사건관계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뒤 이를 숨기기 위해 진정서를 위조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질까 우려한 검찰은 사건을 덮기 위해 이씨에게 사표를 강요했다. 이씨는 “A씨가 사라지자 폭언과 협박의 정도가 심해졌다”며 “C검사가 사표를 쓰고 입을 닫지 않으면 감옥에 넣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결국 열흘 가까운 감금 끝에 이씨는 같은 해 4월17일 사표를 쓰고 검사실에서 풀려났다.

1991년 5월1일자 조선일보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처

1991년 5월1일자 조선일보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처

그로부터 며칠 뒤 이씨는 조선일보 기자를 만나 피해 사실을 털어놨다. 검찰이 이씨의 사표만 받고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보도가 나가자 검찰은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받던 이씨를 구속했다. 이씨가 진실화해위에 제출한 진실규명 신청서에 따르면 B검사와 C검사는 “네가 검사들을 상대로 싸워봤자 무죄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냐”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앞으로 (법무사) 사무장 생활도 못한다”고 겁박했다. 그러면서 “자백만 하면 서류손상으로만 기소해 최대한 구형을 낮게 해 주겠다”고 회유했다.

도주했다가 자수한 A씨도 검찰 조사에서 이씨의 무고를 증언했으나 검찰이 이씨를 범인으로 몰아 가혹행위까지 한 터라 사건을 원점으로 돌릴 수 없었다고 한다. A씨에 따르면 검찰은 오히려 이씨가 공범이라고 진술하지 않으면 이씨의 단독 범행으로 꾸며서 기소하겠다고 A씨를 협박했다. 다른 검찰청에서 근무하던 동생까지 언급하며 협박하자 A씨는 결국 이씨와 공모했다고 검찰에 거짓 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씨는 “1심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도 검사들의 허위 자백 강요가 이어졌다”고 했다. 그는 “서울지검 소속 사무국장이 서울구치소로 면회를 와서 자백하라고 회유했다”면서 “A씨의 변호인도 ‘공소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판사가 실형을 선고한다’고 내게 말했다”고 했다.

“법조계에 봉사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으로 검찰직 공무원이 된 이씨는 1991년 7월4일 입직 4년 만에 모는 것을 잃었다. 검찰의 보복이 두려워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고도 항소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졌다. 연일 술을 마시며 방황하던 중 어린 딸을 잃기도 했다.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는 터라 직장을 잃을까 두려워 수십년간 피해 사실을 입밖에 내지도 못했다고 한다.

31년이 지난 지금 이씨가 원하는 건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이다. 이씨는 “진정한 사과를 받고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며 “아들이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자식에게 떳떳한 아빠가 되고 싶다.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담당검사였던 B변호사는 통화에서 “오래되어서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이씨가 별다른 진술을 하지 않고 입을 닫아서 공범으로 기소한 것”이라며 “이씨가 주장한 대로 서류만 전달했다고 진술했으면 입건이나 기소가 안 됐을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어 “강압수사나 진술 강요 등 인권침해는 말이 안 된다”며 “오히려 검찰 수사관을 기소하는 건 너무하다는 내부 비판이 있을 정도였는데 강압수사를 할 수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당시 검사였던 C변호사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나지만 수사했던 사실은 기억이 안 난다”며 “이씨라는 인물 자체도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다.


Today`s HOT
휴전 수용 소식에 박수 치는 로잔대 학생들 침수된 아레나 두 그레미우 경기장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해리슨 튤립 축제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