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부 ‘일회용컵 보증금제’ 의지는 있나

이효상 기자

전국 시행 또 연기… 장관 “탁상행정 맞습니다” 변명 아닌 변명

한화진 환경부 장관(오른쪽)이 지난 10월 4일 오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화진 환경부 장관(오른쪽)이 지난 10월 4일 오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간경향] “(일회용컵에) 라벨지를 붙이는 방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거 누가 붙입니까? 가맹점에서 알바생들이 붙이지 않습니까? 알바생이 라벨지를 잃어버리면 누가 책임집니까? 탁상행정 아닙니까?”(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

“전형적인 탁상행정이 맞습니다. 내가 와서 보니 그렇게 돼 있었습니다.”(한화진 환경부 장관)

지난 10월 4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환경부 국정감사에서는 야당 의원의 “탁상행정이 아니냐”는 지적에 부처 장관이 “탁상행정이 맞다”고 긍정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탁상행정으로 지목된 정책은 일회용컵 보증금제도다. 정책이 시행되면 소비자는 카페 등에서 일회용컵에 담긴 음료를 살 때 보증금 300원을 내야 한다. 이 보증금은 컵을 반환하면 돌려받을 수 있다. 일회용품 감축을 위해 2020년 여야 합의로 국회에서 관련 법이 통과됐다. 2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올해 6월부터 전국적으로 시행하기로 했는데, 정권교체 이후 시행일자가 오는 12월 2일로 한차례 연기됐다. 환경부는 최근 이 정책을 12월 2일 시행하기는 하되, 세종시와 제주도에서만 시행하기로 범위를 좁혔다. 반쪽짜리 시행으로 사실상의 정책 후퇴라는 지적이 나왔다.

한 장관의 ‘탁상행정’ 발언은 이 같은 지적에 대한 답변의 성격이 짙다. 제도 설계에 있어 미흡한 부분을 지난 정부의 책임으로 돌리는 동시에, 이를 연이은 시행 연기와 시행 범위 축소의 구실로 삼은 것이다. 이제 막 취임 5개월차에 접어드는 한 장관이기에 댈 수 있었던 알리바이였다.

일회용컵 보증금제, 왜 후퇴했나?

윤석열 정부의 정무직 장관으로서는 야당 의원의 질의를 역이용한 재치있는 답변이었을지 모르지만, 환경 행정을 이끄는 환경부 수장으로서는 무책임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비록 기간이 짧았지만 대처할 시간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활용 라벨 부착 업무가 개별 점포의 부담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짜 문제라고 생각했다면 정책을 수정했어야 한다. 하지만 12월 2일부터 일회용컵 보증금제가 적용되는 세종과 제주의 카페 점주들은 이 업무를 그대로 부담해야 한다. 정책을 추진할 책임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대책을 마련하기는커녕 관전평만 내놓은 셈이다.

일회용컵 보증금제도를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로 삼고도 온전히 추진하지 못한 점도 문제다. 환경부는 제도 시행을 불과 20일 앞둔 지난 5월 20일 시행 유예를 발표했다. 직후 한화진 장관은 “일회용컵 보증금제는 12월 1일까지 유예기간을 두었지만 12월 2일에는 분명히 시행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고 했다.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12월 2일 제도 시행에 들어가는 매장은 당초 제도 적용 대상으로 삼은 전국 3만8000여개 매장의 1.5% 수준인 586개 매장에 불과하다.

법적인 문제도 있다.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촉진에 관한 법’은 부칙에서 일회용컵 보증금제를 “공포 후 2년이 경과한 날부터 시행한다”고 규정한다. 개정법 공포가 2020년 6월 9일 이뤄진 만큼 제도는 올해 6월 10일 시행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환경부는 법률 개정 없이 시행일을 미뤘다. 환경단체들은 법에서 정해진 시행일을 행정부가 임의로 변경해 입법권을 침해했다고 보고 감사원에 감사를 청구했다. “행정가로서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전용기 의원 질의에 한 장관은 “법을 바꾸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고 답했다.

환경부는 지난 9월 23일 일회용컵 보증금제를 12월 2일부터 제주특별자치도와 세종특별자치시에서 우선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제도의 얼개도 모습을 드러냈다. 일회용컵의 보증금액은 300원으로 정했다. 카페 등 매장 점주들이 애로사항으로 꼽힌 재활용 라벨 구매비(6.99원/개)와 보증금 카드수수료(3원/개), 일회용컵 처리지원금(표준컵은 개당 4원·비표준컵은 개당 10원)은 정부가 적용 매장에 지원하기로 했다. 사업 적용 대상은 2020년도 말 기준 전국에 매장이 100개 이상인 커피·음료·제과제빵·패스트푸드 업종의 프랜차이즈 가맹점이다.

전국 시행을 70여일 앞두고 제주·세종 두 지역에서만 축소 시행하는 이유에 대해 환경부는 “제도의 단계적 확대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환경부 관계자는 지난 9월 23일 축소 시행 계획을 발표하면서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시스템적으로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상당히 많다는 점을 저희가 인지를 하게 됐다”며 “(제주·세종의) 선도 사업을 통해서 성과 창출과 함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하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해명에도 불구하고 환경부의 정책 추진 의지에 대한 의구심은 커지고 있다. 친기업 행보의 일환으로, 혹은 ‘자영업자 달래기’ 카드로 오랜 기간 준비한 일회용컵 규제를 완화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지난 5월 환경부는 여당인 국민의힘이 일회용컵 보증금제 시행 유예를 요청하자 이틀 만에 시행 유예를 발표했다. 제도 시행의 직전 단계로 ‘공개시연회’를 연 지 열흘 만에 시행을 연기한 것은 이례적이다. 규제 완화에 방점을 둔 한화진 장관의 행보도 이 같은 의구심에 무게를 싣는다. 한 장관은 지난 6월 전국경제연합회를 방문해 “환경규제는 예방 차원에서 경직적으로 설계되는 경향이 있다”며 규제 혁신을 위한 핫라인 구축을 요청했다.

더욱이 환경부는 ‘제도의 단계적 시행’을 강조하면서도 어느 시점에 어느 지역으로 적용 대상을 확대해 나갈지 밝히지 않았다. 허승은 녹색연합 녹색사회팀장은 “제도 시행 의지가 없다고밖에 해석할 수가 없다. 의지가 있다면 몇년 이후에 시행하겠다는 로드맵이라도 내놓지 않았겠느냐”고 했다.

대학생 환경 동아리 푸름 회원들이 지난 5월 29일 오전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 부근에서 일회용컵 보증금제도 시행 유예 등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대학생 환경 동아리 푸름 회원들이 지난 5월 29일 오전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 부근에서 일회용컵 보증금제도 시행 유예 등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2년간 허송세월?

정부의 준비 부족도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환경부는 일회용컵 보증금제도의 핵심 쟁점이던 교차반납을 시행 초기에는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교차반납이란 A브랜드 매장에서 음료를 일회용컵에 구매했어도 컵 반납은 다른 브랜드 매장에서 가능한 방식을 말한다. 환경부는 “일회용컵은 교차반납을 원칙으로 하되, 시행 초기에는 예외적으로 브랜드별로 반납받을 수 있도록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시행 초기’가 언제까지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따라서 제주·세종 지역에서는 음료를 구입한 브랜드에서만 일회용컵을 반납할 수 있다.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최근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제도 적용 대상 55개 브랜드 중 제주·세종에 1개 점포만 운영 중인 브랜드가 각각 11개, 15개였다. 윤 의원은 “서귀포시에서 커피 한 잔을 사서 제주시로 이동했다면 1시간 10분을 다시 가서 컵을 반납해야 한다”며 “정책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교차반납은 환경단체와 매장 점주들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쟁점이었다. 환경단체는 제도의 목표가 일회용컵 회수와 재활용에 있는 만큼 소비자의 일회용컵 반납이 수월한 교차반납 허용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3월 한국리서치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50%는 제도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 ‘반납처 증가’를 꼽았다. 반면 매장 점주들은 교차반납이 이뤄질 경우 주거단지 등과 접근성이 높은 일부 매장의 부담이 커질 수 있다며 우려했다. 특정 매장으로 일회용컵 반납이 집중돼 컵 보관에 따른 악취 등 위생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공공장소에 무인회수기를 설치해 자영업자의 부담을 경감하는 방안이 대안으로 떠올랐지만, 무인회수기는 현재도 개발 중이다. 지금까지 3차례 성능평가를 했지만, 기준을 충족한 업체는 한 곳도 없었다. 자원순환보증금관리센터(코스모) 관계자는 “무인회수기는 매장의 부담을 줄일 수 있기에 설치하려고 한 것이지 제도 시행을 위한 필수 시설은 아니다”라며 “일회용컵의 컵 종류가 다양해 이를 분류할 수 있어야 하는데다 재활용 라벨을 99.9% 이상의 정확도로 인식하는 기술이 개발돼야 하는데 제시하는 기준을 충족하는 업체가 없었다”고 했다.

영향을 받는 이해관계자가 많은 제도인 만큼 소통과 설득 노력이 필요했지만, 이 역시 부족했다는 지적이 있다. 환경부는 지난 2년 동안 프랜차이즈 본사와는 200여차례 간담회를 연 반면, 제도의 실제 적용 대상이 되는 가맹 점주들과는 지난 5월부터 10여차례만 회의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도 프랜차이즈 본사의 역할 분담은 이끌어내지 못했다. 고장수 카페사장협동조합 이사장은 “환경부와 18차례 회의를 했는데 마지막 18번째 회의에 와서야 축소 시행한다고 일방 통보했다”며 “보증금 300원에 과세하지 않도록 판매정보관리시스템(POS)을 정비해야 하는데 시스템을 새로 만든 곳이 거의 없다. 재활용 라벨을 일회용컵에 부착하는 영역에서도 본사의 역할을 강조했지만 결국 가맹점주들이 부담을 지게 됐다”고 했다. 환경부 관계자는 “프랜차이즈 본사의 POS 시스템 개발은 지속 점검 중으로 10~11월 중 완료할 예정”이라고 했다.

수거·운반 업체도 혼선

일회용컵 수거·운반 업체들도 환경부의 갑작스러운 축소 시행 발표에 날벼락을 맞게 됐다. 수거·운반 업체들은 소비자들이 매장으로 반납한 컵을 회수해 창고에 보관했다가 재활용업체로 넘기는 역할을 한다. 업무 수행을 위해 차량을 구입하거나 창고 부지를 마련한 곳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곳이 저소득 계층의 자활을 지원하는 지역자활센터다. 전국에서 80여개 업체가 수거·운반업체로 등록을 했는데, 이중 55곳이 지역자활센터였다.

지난 6월 제도 시행을 예상하고 월세 220만원의 창고 부지를 구한 한 지역자활센터장은 “폐기물 수집·운반업으로 사업 신고를 하기 위해서는 차량과 창고를 마련해야 한다. 사업 신고를 마친 상황에서 정부가 시행을 유예하는 바람에 빈 창고 월세만 나갔다”며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활센터도 수거·운반 사업을 한다고 참여자들을 모집했는데 갑자기 연기하는 바람에 항의를 받았다”고 했다.

코스모와 협약을 맺고 수거·운반 시범사업을 진행한 전주덕진자활센터도 전주시가 선도 시행 지역에서 빠지면서 사업을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 센터 역시 차량을 두 대 구입하고 월 100여만원에 창고부지를 임대했다. 수거·운반 사업을 준비한 지역자활센터 모두가 정책 변경과 관련한 사전 언질은 듣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환경부는 뒤늦게 전주시를 선도 지역에 포함시키는 방안 등을 검토했다고 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일회용컵 보증금제 도입 운동을 전개해온 자원순환사회연대 김미화 이사장은 “정부가 2년의 유예기간 동안 준비를 안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프랜차이즈 본사의 책임을 강화해야 했는데 정부가 밀리면서 준비가 안 된 채 부담을 지게 된 가맹점의 혼란이 심화됐고, 반발도 커졌다”며 “결국은 설득의 실패가 아닌가 싶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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