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길의 사진공책
[김창길의 사진공책] 41.6%…고독한 혹은 고립된

숫자가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1인 가구가 그렇다. 지난해 12월에 집계된 1인 가구의 비율은 41.6%다. 과반은 못되지만, 셋 중 하나꼴이니 화두로 삼을 만한 숫자다.

<41.6% 1인가구>는 혼자 사는 사람들의 초상들을 보여주는 전시다. 강홍구, 김흥구, 최형락 등 9명의 사진작가가 참여했다. 같은 주제의 공모전에 당선된 7명의 사진가가 찍은 사진도 걸렸다. 재단법인 숲과나눔이 기획했다. 오는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보안여관(BOAN1942)에서 열린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41.6%에 해당하는 ‘1인 가구’라는 말이 합당한 표현일까? ‘가구(家口)’는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수’를 뜻한다. 그런데 함께 사는 사람이 없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가구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맞을까? ‘독거(獨居)’라는 말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이 단어의 쓰임새는 노인 계층과 반복되어 사용된 탓에 좀 어색하기도 하다. 물론, 지금 정확한 표기법을 따지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가족의 규모에 대한 고민은 50여 년 전부터 시작된 것 같다. 젊었던 시절의 주명덕 작가는 <한국의 가족> 연작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다. 1971년에 찍은 논산의 가족 식구는 무려 마흔다섯 명이었다. 같은 연도이지만 서울 동부이촌동의 가족사진은 네 명이다. 당시에는 두 사진을 비교하며 핵가족화 현상을 운운했을 것이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정부가 가족의 숫자까지 신경 쓰던 시절이었던 것. 지금은 제발 아이를 낳아 달라는 유인책을 내놓지만 돈 몇 푼으로 젊은 부부가 아이들을 낳을 리 만무하다. 새로운 생명을 키우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일까?

지난 주말에 주명덕 작가와 비슷한 연배의 원로 사진작가를 만났다. 점심이나 먹자며 전화가 왔다. 쉬는 날이라 귀찮았지만 작가의 집 근처로 찾아가 점심을 같이 먹었다. 만나고 나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설 연휴를 홀로 지냈다고 한단다.

“나이 먹으면 했던 얘기 또 할 수도 있으니, 이해해. 들었던 얘기면 바로 얘기하고. 그만 이야기할 테니.”

이 정도의 말을 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으시니, 그리 늙었다고 볼 수는 없을 터다. 하지만 살아온 시간의 간격이 꽤 큰지라 대화에 자꾸 쉼표와 줄임표가 끼어들었다. 그러다가 스마트폰 속에 저장된 사진들을 보며 이야기했다. 지난해 전시에 걸려 있던 대형 사이즈의 작품들과 요즘 하는 컴퓨터를 이용한 사진 작업들. 그리고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들. 요즘 독거노인들은 그나마 다행일까? 정신만 또렷하면 SNS로 다른 세계와 연결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외롭겠지. 스마트 기기의 액정 화면들은 차가우니까.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식구들의 얼굴을 새삼스레 보았다. 속 꽤 썩이는 식구들이지만,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그리고 침대 머리에 기대어 읽기 힘들어 책장에 꽂아둔 책을 다시 꺼내 펼쳤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동서문화사) 356쪽에 책갈피가 꽂혀 있었다. “그러나 인간 최악의 적은 내 집의 가족이라는 매우 믿을만한 말도 있어.” 이런... 주석에는 이해를 돕기 위한 성경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마태오복음서 10장 34절)

강홍구 <잠>

(C)강홍구

(C)강홍구

사람이 사는 장소에 대해 천착했던 강홍구 작가다. 전남 신안군 앞바다 어의도에서 태어난 예술가. 섬에서 나온 그가 육지에서 30여 년 동안 혼자 살았던 경험을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이불 위에 그린 그림들이다.

불광동에 작업실이 있던 시절이었다. 북한산 쪽으로 산책을 하며 기이한 집들을 목격했다. “산비탈에 세워진 집들은 하나도 같은 게 없었다. 바위투성이의 산언덕에 한 채의 집을 짓는 것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겠는가. 재료들이야 빤하다. 시멘트, 목재, 플라스틱 등 결국 아파트를 짓는 재료와 똑같다. 하지만 그 재료들이 가진 놀라운 개별성과 개성이 훨씬 잘 드러난다.” 그래서 그는 카메라를 손에 들었다. 사라지기 전에 놀라운 개별성을 드러내는 집들을 기록해야 했다.

10여 년 전부터는 자기가 찍은 사진 위에 그림을 그렸다. 작가의 주관적인 감정을 충분하게 담아낼 수 없는 기계로 찍은 사진 위에 어떤 감정을 더하고 싶었던 것. 이번 전시에 내놓은 작품들은 숫제 대상이 되는 오브제 자체에 그림을 그렸다. 잠을 자기 위한 사물 위에 잠을 표현한 것이다. 제발 꿀잠이었으면 좋을 텐데.

김원 <쪽방, 2023>

(C)김원

(C)김원

쪽방촌 옥상에서 한 노인이 실내 자전거를 타고 있다. 김원 작가는 서울 동자동 쪽방촌을 13년 동안 촬영해 나가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방문했으니, 천 번이 넘었을 터다. 우리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단지 빵이나 라면을 원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쪽방촌 사람들이 힘겨워하는 것은 외로움이었다. 작가는 어느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쪽방촌에서 화가 한 명을 사귀었다. 두 발을 잃은 화가다. 그의 말을 김원 작가가 전했다. “사람들은 쪽방촌을 이상하게 봐요. 비참한 곳, 더러운 곳, 불쌍한 곳, 가면 안 되는 곳으로 봐요.” 화가의 말을 받아 적던 사진가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쪽방촌에는 쌀도 오고, 반찬도 오고, 빵도 오고, 옷도 온다. 회사도 오고, 기관도 오고, 교회도 오고, 정부도 온다. 목사도 오고, 복지사도 오고, 봉사자도 온다. 그런데 사람은 안 온다.”(한겨레, “20년 만에 다시 붓을 드니 통증도 원한도 사라지네요”, 2017년 8월 30일.)

김흥구 <고립된 생에 관하여>

(C)김흥구

(C)김흥구

지난해 5월 보건복지부가 ‘제1차 고독사 예방 기본계획(2023~2027년)’을 발표했다. 임종의 순간까지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기 위한 계획인데, 취지와는 달리 죽음에 대한 단어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을 김흥구 작가는 말했다. 일본을 참고해볼까? 긍정적인 의미가 내포된 ‘고독’이라는 표현 대신에 일본 정부는 ‘고립사’라고 표기한다. 누군가 홀로 죽은 상태에서 며칠 동안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고독을 즐겨서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고립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쨌든 지난해 우리나라 정부 조사에 따르면 1인 가구 5명 가운데 1명이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죽음을 맞는다. 김흥구 작가는 고민한다. 자살도 고립된 죽음이 아닐까? 작가의 카메라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시도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서울 한강의 한 대교로부터 시작해 쪽방과 판자촌으로 이어진다. 고립사는 무연고 사회와 연결되기에. 인간관계의 연결고리는 점점 약해지는 듯하다. <아무도 모른다>(2004)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제목은 이제 낯설지 않다.

심규동 <고시텔>

(C)심규동

(C)심규동

김미월의 소설 <여덟 번째 방>(민음사)에서 주인공 영대는 친구가 소개해준 값이 싼 방을 찾아간다. 대문에 붙어 있는 전단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잠만 자는 방’ 영대는 궁금했다. 이 방에서는 오로지 잠만 자야 하나? 집주인은 영대가 물어보기 전에 영대의 궁금증에 대해 설명했다.

“잠만 자는 방이 뭔고 하니 그 방에선 잠만 잘 수 있단 거요. 밥해 먹고 볼일 보고 그런 건 못 해요. 부엌이랑 화장실이 방 밖에 따로 있거든. 공용이야. 그러니까 원룸은 아니고 딱 방 하나만 있다는 거지.”

10여 년 전에 발표됐던 소설이라 그럴까? 지금은 그저 ‘고시텔’이라 하면 그만인 것을, 당시에는 잠만 자는 방에 대한 설명이 요구되는 터였나보다. 사진작가 심규동은 바로 잠만 자는 방, 고시텔 주거자였다. 그는 말한다. “고시원은 희망이었다.” 작가에게 고시원이 있었기에 서울살이가 가능했단다. 광각 렌즈로도 담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좁은 고시원.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작은 방들을 찍어 2017년 <고시텔>(눈빛)이란 사진집도 출간했다.

윤정미 <반려동물>

(C)윤정미

(C)윤정미

펫팸족이란 신조어가 있었다. pet(애완동물)과 family(가족)의 합성어다. 사진을 찍은 윤정미 작가도 펫팸족이다. 많은 사람이 그렇듯이 작가도 자녀들 때문에 애완동물을 키우게 됐다. “삭막한 도시의 아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제 아이들도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했어요. 오랜 숙원 끝에 생후 2개월 된 몽이를 입양했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강아지를 실질적으로 돌보는 일은 엄마인 제 몫이 되었고 그렇게 몽이와의 동행은 시작됐어요” 지난 2016년에 출판된 사진집 <반려동물>(이안북스)에 적은 작가의 노트다.

윤정미 작가는 애완동물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는 공간을 유심히 살핀다. 작가의 일관된 표현 방식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는 2004년 딸 아이 사진을 찍으면서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이의 방에 있던 장난감의 색깔이 모두 핑크색이라는 것. 아이의 옷도 마찬가지였다. <핑크&블루> 프로젝트는 바로 일상의 공간을 채우는 색깔에 대한 작업이었다. 이번 전시는 홀로 사는 공간에 함께 지내는 애완동물이 사진에 담겨 있다.

이한구 <영분, 전지적 시점, 2023>

(C)이한구

(C)이한구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영화 <플랜 75>는 초고령사회에 직면한 일본의 고민을 무섭도록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물론, 설정은 허구다. 청년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75세 이상의 노인들이 스스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인 ‘플랜 75’를 시행한다는 이야기. 그러나 슬픈 장면은 디스토피아적인 설정에 있지 않다. 대부분 홀로 사는 노인들이기에 며칠이 지나야 그들의 죽음을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허구가 아니기에.

홀로 사는 노부모가 걱정이다. 밥은 드셨을까? 주무시고 계실까? 어디 아프시지는 않으실까? 갑자기 쓰러지신다면…. 독거 노부모의 집에 캠코더를 설치하는 자식들이 있다. 그들은 노부모의 일상을 스마트폰으로 지켜본다. 집안 높은 곳에 설치한 캠코더는 전지적 시점을 가능하게 한다. 노부모는 캠코더 아래서 무슨 생각을 하실까? 이한구 작가의 사진에 담긴 어머니는 꽃무늬 이불을 덮고 깊은 잠에 빠져있다. 어머니, 무슨 꿈을 꾸고 계시나요?

임안나 <중력을 떠난 일상, 2023>

(C)임안나

(C)임안나

하얀 방의 작고 소소한 오브제에서 시작한 임안나 작가의 상상력과 작품의 스케일의 확장은 현재진행형이다. 주로 어떤 상황을 설정해 장면을 연출해 사진을 찍는다는 점에서 가상이라 할 수 있는 사진들이다. 하지만 가상이 가짜일까? 소설이 허구라며 작가를 거짓말쟁이로 취급하지는 않을 터. 가상의 사진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이 관객의 몫일 것이다.

임안나 작가는 혼자 사는 사람들의 생활 공간을 찾아가 그들의 사적인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를 연결하는 온라인 행위에 주목했다. 한 중년 남성이 팔을 괴고 누워있다. 그의 방에는 대형 TV와 자전거, 기타, 오디오, 리모컨, 레코드판, 헤드폰과 속옷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질서 정연한 모습은 일자로 뻗은 그의 뒷모습. 실체가 보이지는 않지만, 그의 앞에는 작은 모니터가 있는 것 같다.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공광이 그의 머리 테두리에서 발산하고 있다. 몸은 현실의 공간에 누워있으나 그의 정신은 어딘가 다른 곳에 연결돼 있을 것이다.

조대연 <남쪽의 시간, 2023>

(C)조대연

(C)조대연

다섯 명의 자식을 출가시킨 모양이다. 결혼 기념사진 다섯 장이 액자에 담겨 나란히 걸려 있다. 네 개의 나무 액자는 크기와 앵글이 비슷하다. 파란 액자에 담긴 사진은 좀 다르다. 차렷 자세가 아니다. 주례 선생님도 없다. 부부만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늦둥이의 결혼식이었을까? 어쨌든 결혼식 사진들은 부재의 증거로 남아있다. 자식들은 출가했다.

얼룩이 지워지지 않은 흰 수건이 옷걸이에 걸려 있다. 어깨에 두르는 하얀 스카프인 줄 알았다. 이 방을 지키고 있는 여인은 사진 속의 자녀들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어본 적이 있었을까? 여인이 지키고 있는 이 방을 부드러운 분위기로 감싸고 있던 벽지들은 우글우글해졌다. 사진을 찍은 작가 조대연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그들에게 ‘소멸’이라는 단어는 이제 너무 익숙하다.”

최형락 <혼자 사는 청년들, 2023>

(C)최형락

(C)최형락

시간은 앞으로만 전진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꺼운 책을 읽어야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는 이들을 역사상 최초로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라고 말한다. 차는 없어도 집은 있었는데, 요즘은 영혼까지 끌어모아야 작은 아파트를 살 수 있으니까.

사진작가 최형락은 김미월의 소설 <여덟번째 방>의 주인공처럼 자발적으로 혼자 살기로 한 사람들을 만났다. 서울에 집이 있지만, 혼자만의 삶을 위해 뛰쳐나온 젊은이들이다. 영특할 순 없는 선택이다. 경제적인 계산이 빠른 요즘 젊은 직장인들은 결혼 후에도 주거비용을 아껴 청약통장에 돈을 넣으며 부모와 같이 사는 사람들도 꽤 된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혼자 산다는 것은 사서 고생하는 꼴이 될 수 있다. 김미월의 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어쩔 수 없잖아. 주인공은 원래 갖가지 시련을 겪어야 하는 법이니까. 그렇다고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어. 스토리에 따르면 주인공은 그것을 다 극복하게 되어 있거든.”

그렇다. 최형락의 사진들이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흙수저니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라는 말들은 너무 자본주의적인 표현이지 않을까? 우리는 자발적으로 혼자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방점은 ‘혼자 살기’가 아니라 ‘자발적’이라는 단어에 찍혀야 할 것이다. 그들은 작은 방에서 시련을 겪을지 모르지만, 거리에서는 그리고 다른 공간에서는 기지개를 켤 테니까.

이런 기사 어떠세요?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