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조사기록’에 10년 바친 아버지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박수현군의 아버지 박종대씨(60)의 세월은 아들이 세상을 떠난 전남 진도 동거차도 앞바다에 멈춰 있다.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52분. 수현군은 수학여행을 떠나다가 기울어진 배 안에서 15분 가량의 영상을 찍었다. 영상에 나온 안산 단원고등학교 아이들은 “나 죽는 거 아냐?”라는 말을 농담처럼 던지다가 “혹시 모르니 구명조끼를 꺼내놔야 할 것 같다”며 불안해했다. 불현듯 “엄마, 아빠 사랑해요” 외치기도 했다. 모든 말에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두렵지만 끝내 구조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머리 위로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말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아이들은 그저 따랐다.
박씨는 영상을 아들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아들의 휴대전화에서 발견했다. 그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영상을 언론에 제보했다”고 말했다. 공개된 수현군의 영상에 국민적 공분이 일었다. 구조작업은 왜 이뤄지지 못했는지, 왜 ‘대피하라’가 아니라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나왔는지 의문이 증폭됐다.
그날의 증거를 남긴 아들의 뒤를 이어 아버지는 흩어진 자료를 모으며 진상 찾기에 나섰다. 그리고 그의 염원은 10년째 현재진행형이다.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 조사는 막을 내린 지 오래다. 관계자들에 대한 법원 재판도 끝나간다. 하지만 그는 “아직 진상 규명이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경향신문은 지난 3일 안산 단원구의 한 카페에서 박씨를 만났다. 스스로 세월호 참사 자료 전문가가 되어버린 아버지가 말하는 ‘규명되어야 할 진실’을 들었다.
박종대씨, 아들 잃고 ‘진실’ 천착 시작
특조위·사참위·법원·검찰 자료 모아
어려운 용어 공부하며 읽는 게 일상 돼
기록과 일상
박씨의 일상은 ‘세월호 자료’로 가득 차 있다. 오전 5시에 기상해 밤 11시에 잠들기까지 식사 시간과 1시간여의 아침 산책을 뺀 모든 시간에 기록들을 읽는다. 특조위·사참위 조사 및 검찰 수사 과정에서 나온 진술과 원자료들만 20만여 페이지에 달한다. 직접 정보공개 청구한 자료는 597건이다.
그는 매일 10년 전 4월16일로 돌아간다. 세월호가 침몰하기 전,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들을 두고 탈출하기 이전의 구조당국과 세월호의 교신 기록을 보고 또 본다. 거듭 재구성해보는 현장에서 상황파악 및 구조에 실패하며 허둥대는 목포서·서해청·123정 해양경찰들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말단인 김경일 해경 123정장을 제외하고는 지휘부 중 형사책임을 진 사람은 없다. 박씨는 “법원은 해경 지휘부가 사후적으로 평가할 때 최선의 방법으로 지휘를 하지 못했다는 것만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봤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해경은 단순히 미흡했던 것이 아니라 명백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침몰 당시 ‘당국 역할’ 분초단위 검증
빈 곳은 597건 정보공개청구로 채워
“해경은 그날 명백히 해야할 일 안 해”
박씨는 지금도 침몰 101분 동안 구조당국이 했어야 하는 일은 무엇이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를 분초 단위로 검증한다. 없는 자료는 정보 공개 청구를 하며 일상을 보낸다. 구조당국에 제대로 된 책임을 묻지 못한 논리를 조금이라도 파훼할 수 있는 ‘사실’을 찾기 위해서다.
그 아버지는 왜 그 길을 걸었나
박씨에게는 날짜와 시간을 분 단위까지 기억하는 습관이 생겼다. 평범한 직장인이던 그는 2014년 4월16일 오전 10시8분, 회사에서 ‘아들이 탄 배에 문제가 생겼다더라’는 아내의 전화를 받았던 때를 기억한다고 했다. 아들을 더이상 만날 수 없음을 깨달은 순간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구나. 앞으로 내 인생에 상당 부분을 진상규명이라는 것에 허비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박씨는 “그게 10년이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2015년까지 세월호참사 가족대책위에서 진상규명 분과장을 맡으며 선박 관련 용어들이 즐비한 자료를 읽기 시작한 것이 시작이었다. 분과장 자리를 내려놓고 난 후에는 1970~80년대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단체인 ‘진실의 힘’과 함께 검찰 수사자료 등을 읽어내려갔다. 그는 “용어가 어려워 처음엔 애를 먹었다”며 “참사 이후 공중에 붕 뜨는 듯한 악몽을 꾸는듯한 기분 속에 살면서 그렇게 읽었다”고 했다.
재판이 진행되며 혼란은 가중됐다. 언론 보도가 오히려 의혹을 낳았고 박씨는 ‘무엇이 진실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는 “피해자라서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보이기도 했다”며 “판단이 서지 않는 게 괴로웠다”고 말했다.
그날 복귀하는 삶 ‘상흔’ 남지만
‘진상규명 과제’ 정리해 책 내기도
“국가가 기록 않으니 직접할 수 밖에”
유가족이 기록을 본다는 것
세월호와 그날의 구조 현장을 복기하며 산 세월은 그에게 상흔을 남겼다. 박씨는 종종 세월호 안에서 배가 넘어지는 순간을 겪는 꿈을 꾼다. 강연을 위해 잡은 마이크가 웅웅거리는 순간에는 갑자기 입이 얼어버리기도 한다. “그 소음이 아들의 영상에서 나온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고통을 감내하며 2020년 그는 <4·16세월호 사건 기록연구-의혹과 진실>(선인)이라는 책을 냈다. 진상규명 과제를 정리한 책이다.
책을 펴낼 때 사회가 공인하는 전문가도 아니고 유가족의 연구라서 감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을 걱정했다고 한다. 이런 걱정 때문에 박씨는 어떤 연구자보다도 주석을 길게 썼다.
박씨는 “누군가는 제 말에 ‘그건 네 생각’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며 “참고문헌을 제대로 적는 것은 나는 이걸 봤고, 당신도 이걸 따라서 보면 어쩌면 나와 비슷한 결론을 낼 수 있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10년의 세월. 그는 “국가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기록할 수밖에 없었고, 알지 못하면 온갖 조사 보고서를 검증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직접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조사와 수사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셨을 것 같냐는 물음에 박씨는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는 “참사 이전에는 사회 한 구석에서 빛나진 못하더라도 가장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적당히 잘 살았었다”며 “노벨 문학상을 탈 것도 아니지 않나. 그 삶을 포기한 것은 진실이 아직 밝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후속책도 준비 중이다. 박씨가 준비 중인 <4·16세월호 사건 기록연구> 2·3권은 해경의 구조 시스템이 원칙적으로 어땠어야 했는지, 법원과 사참위는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세세히 들여다보는 내용이다. 그 이후에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을 때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매뉴얼을 쓰고 싶다고 했다. “올해가 환갑인데, 칠십 전에는 그런 책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박씨가 소망했다.